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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Mar 24. 2023

'싸우는 할머니'의 얼굴들

〈잊혀진 여전사〉, 〈왕십리 김종분〉 리뷰


7★/10★


  김진열 감독이 연출한 두 편의 다큐멘터리 〈잊혀진 여전사〉(2005), 〈왕십리 김종분〉(2021)은 서로 다른 두 할머니의 삶 궤적을 좇는다. 〈잊혀진 여전사〉의 주인공은 빨치산 출신 박순자다. 1931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난 그는 일제 강점기 때 좌익 활동의 연락책을 맡으며 활동을 시작했다. 모두에게 가혹했지만, 여성에게는 유독 더 가혹했던 세태를 직접 겪으며 사회주의 해방과 여성 해방이 모두 필요하다고 느꼈던 그에게 빨치산 입문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잊혀진 여전사〉 스틸


  그러나 여성이 빨치산 활동을 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이 입에 젖을 물리며 야산을 걸은 일, 행군하다 소변이 마려울 때마다 곤란했던 일, 아이를 두고 몰래 집을 나오며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겠다고 다짐했던 일, 여성 빨치산이 있단 소식을 들으면 유독 집요하게 추적하던 서북청년단을 피해 남장을 하고 목소리도 내지 않은 일 등등. 영화에는 여성 빨치산들이 엄혹한 세월을 치열하게 견뎌낸 증언이 가득하다.


  검거된 후 오랫동안 수감되었다가 출소한 박순자는 결혼하지 않으면 집요하게 뒤를 캐던 경찰을 피해 또 다른 빨치산 남성과 ‘동지결혼’을 했고, 세탁소·미용실 등을 운영하며 생계를 이어왔다. 87년도부터 비전향 장기수의 공적 활동이 가시화되면서는 여러 집회에 참석하고 후배 운동가들과 교류하며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여성과 혁명가라는 이중 정체성을 동시에 살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한 그녀 삶에 깊게 새겨진 주름이 아름답다.


  한편 〈왕십리 김종분〉의 주인공은 왕십리 길가에서 30년째 작은 노점을 하고 있는 1939년생 김종분이다. 돈을 벌지 않는 남편을 대신해 시작한 장사로 자식들을 번듯하게 키워낸 김종분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묻어난다. 


〈왕십리 김종분〉 스틸


  그러나 소박하지만 단단하게 자기 삶을 일궈온 김종분에게는 깊은 아픔이 있다. 그의 둘째 딸 김귀정은 1991년 노태우 규탄 집회에서 경찰의 최루탄을 피해 도망가다 넘어진 후 실신해 끝내 사망했다. 사인은 ‘압박에 의한 질식사’였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대학에 진학해 과외 등을 하며 가족을 돕고 자신의 미래를 꿈꾸던 한 청년의 허망한 죽음이었다. 그러나 김종분은 자식의 죽음이라는 압도적 슬픔에 무너지지 않았다. 대신 적극적으로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활동에 참여했다. “작은 딸 덕에 팔도강산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 연결로 유가협, 학생들을 만났다. 안 가본 대학이 없다”고 말하는 김종분. 딸의 죽음이 새롭게 만들어준 사회적 연결망 속에서 김종분을 슬픔을 달랬다. 여전히 ‘빨갱이’를 운운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표정이 음울해지고 딸의 묘소 앞에서 오열하지만, 김종분은 개인적 슬픔을 집단적 정의로 승화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김진열 감독은 〈잊혀진 여전사〉, 〈왕십리 김종분〉을 통해 ‘싸우는 할머니’에게 구체적인 얼굴을 선물했다.



*〈잊혀진 여전사〉는 다큐멘터리 전문 OTT VoDA에서 개최한 ‘푸른영상 기획전’에서 감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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