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그라운드〉(2022)
홈그라운드/Home Ground
권아람/한국/2022/78min/‘지금 여기, 한국영화’ 세션
1970년대 명동 ‘샤넬’은 바지씨, 치마씨들의 은밀한 아지트였다. 1996년, 레즈비언 청년들은 한국 최초의 레즈비언 바 ‘레스보스’를 직접 오픈한다. 2000년대 초, 커뮤니티를 찾던 10대 퀴어들은 신촌의 작은 공원에 모여든다. 명우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레스보스를 지키고 있지만, 코로나 위기로 손님들의 발길이 뜸해진다. 명우는 레스보스를 지킬 수 있을까?(서울국제여성영화제)
퀴어 이론가 리 에델만은 자신의 책 《미래 없음No Future》에서 퀴어의 ‘미래 없음’을 급진 정치학의 토대로 정초했다. 이성애 규범과 성별 이분법이 공고한 사회는 퀴어의 미래가 ‘없다’고 가정하거나, 존재하더라도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공포와 불안을 끊임없이 생산한다. 에델만은 퀴어를 향한 비난을 전유한다. 생물학적 재생산의 ‘불능’ 혹은 ‘대문자 아이’로 상징되는 미래(‘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와 같은 수사)에 기반한 비난을 ‘지금, 여기’에 초점을 맞추는 퀴어 정치의 상상력을 위한 자원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인류의 미래가 지구에게는 곧 ‘미래 없음’을 의미하는 시대에 에델만이 제안한 ‘미래 없음’은 퀴어 정치학에 한정되지 않는 복합적인 정치를 펼쳐낼 장이 될 가능성도 품는다. 매력적인 개념이다.
다만 이론적 매혹과 현실을 살아가는 퀴어 삶의 관계에는 조금 더 세심한 접근이 필요하다. 퀴어의 ‘미래 없음’에 기반해 지금, 여기를 바꿔낼 정치적 상상력을 벼려내는 일과 고군분투하며 현실을 살아가는 퀴어의 삶을 등치시키면, 현실의 삶이 이론의 무게에 짓눌리거나 그 복잡한 맥락이 소거되는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현실을 살아내는 퀴어의 삶에 주목하여 ‘미래 없음’과 동시에 ‘다른 미래’ 역시 말해야 한다.
〈홈그라운드〉는 이를 위한 좋은 참조점이 되어준다. 곧 일흔을 앞둔 명우는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레즈비언 바 레스보스를 운영하고 있다. 1996년 처음 생긴 레스보스는 레즈비언 청소년들의 모임 장소였던 일명 ‘신공’(신촌공원) 근처에서 운영되다 지금은 이태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영화는 레스보스의 이야기와 명우의 이야기를 교차로 엮어낸다. 레즈비언이 ‘부치’, ‘펨’이란 말 대신 ‘바지씨’, ‘치마씨’로 불리던 시절부터 여성을 사랑하는 여성이었던 명우와 그런 명우가 다른 레즈비언들이 편하고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로 운영해온 레스보스. 이 둘에게는 레즈비언들의 역사가 켜켜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이들이 쌓아온 역사는 퀴어 미래를 쌓아가기 위한 주춧돌이 되어준다. 아무도 퀴어로 나이 든다는 것의 의미를 알려주지 않는 사회에서, 상상할 만한 미래가 필요한 다음 세대 퀴어에게 ‘네게도 미래가 가능하다’는 위안을 건네는 것이다.
레즈비언들이 몸과 마음을 부대끼며 쌓아온 역사와 그로 인해 가능해지는 미래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하는 것은 계보다. 공동체, 장소, 기억, 미래 등 정체성의 토대가 될 만한 퀴어 선배들이 꾸려온 정보로부터 차단당한 퀴어들은 고립되는 일이 잦다. 비슷한 경험과 감정을 가진 자가 도처에 있는데도 혼자라고 느끼며 외로워하는 것이다. 요컨대 퀴어들은 집단적 삶의 연속성, 즉 계보를 갖지 못한 채 파편화된 존재로 적대적인 세상에 노출된 상태다. 그러나 명우와 레스보스가 레즈비언의 역사일 수 있다면, 레즈비언에게도 계보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영화에는 레스보스를 오가는 손님들이자 명우의 후배 레즈비언들의 인터뷰가 다수 나온다. 이들의 이야기가 모여 계보의 사전적 뜻인 ‘계승되어 온 연속성’이 구체화된다.
물론 명우와 레스보스가 품은 레즈비언 기억과 계보의 가능성을 낭만화할 수만은 없다. 명우는 여전히 이성애자 친구들에게 자신의 ‘행복’을 증명해야만 하고, 노인의 돌봄을 가족에 위임하는 사회에서 노후를 걱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머리만 길러도 집에서 사업자금을 대준다고 했어.” 명우의 오랜 친구이자 ‘형님’인 꼭지의 말이다. 물론 꼭지는 그 제안을 거부하고 평생을 짧은 머리 여자로 살았다. 명우와 꼭지뿐 아니라 많은 퀴어가 공적 지원이 전무한 상태에서 치열하게 자립을 모색한다. 그리고 레스보스와 같은 퀴어 공간은 자립의 과정이 버거운 퀴어들이 서로에게 위로와 위안을 건네는 장소로 기능해왔다.
명우는 젊은 퀴어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 여전히 집회에 참석하고 대화를 나누며 자신이 가졌던 편견을 되짚어보고 반성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우리가 ‘미래 없음’의 이론적 가능성을 모색하면서도 미래를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상상하는 일 역시 필요하다는 데 동의한다면, 명우와 레스보스, 그리고 그곳을 거쳐 간 많은 퀴어가 만들어온 궤적이 분명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주리라는 데에도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도래할 ‘다른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우리가 척박한 땅에서 일궈온 기억, 계보, 공동체라는 자산으로부터 시작될 미래를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