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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Oct 13. 2023

[BIFF] 인간의 내면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영화들

부산국제영화제


파문/Ripples

Japan/2023/120min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아시아영화의 창’ 섹션     


  남편, 아들과 살며 시아버지 병간호를 하는 여자.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아무런 말도 없이 집을 떠난다. 남편은 몇 개월 후 암에 걸렸다는 진단과 함께 집에 돌아오지만, 그사이 아들은 취업해 타지로 떠났고 시아버지도 생을 마감했으며 여자는 녹명수(녹색 생명수)를 판매하는 사이비 종교/이익 집단에 빠진 상태다. 영화는 여자가 진정한 행복과 해방을 찾는 과정을 좇는다. 선한 마음을 베풀면 행복해진다는 종교적 가르침은 그녀를 구할 수 없다. 남편과 아들은 각자의 목적에 따라서 자신을 대할 뿐이다. 마침내 여자는 깨닫는다. 동일본 대지진 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살아갈 수는 없었다는 직장 동료에게 서로의 상처를 돌보는 관계로 자유와 해방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을 배운 것이다. 다만 그 자유와 해방이 제시되는 과정의 플롯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 점, 장애 여성 캐릭터 재현에 대해서는 아쉬움 등이 남는다. 블랙 코미디와 드라마 장르의 결합은 인상적이다.




하우 투 해브 섹스/How to Have Sex

United Kingdom, Greece/2023/98min

몰리 매닝 워커 감독/‘플래스 포워드’ 섹션     


  그리스 휴양지로 여행을 떠난 영국의 십 대 여성 셋. 그들은 클럽, 파티 소리와 술 냄새가 진동하는 휴가를 보낼 예정이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섹스. 친구들과 달리 아직 성 경험이 없는 태라는 이번 여행에서 근사한 첫 경험을 해보고 싶고, 친구들도 그런 그녀를 응원한다. 그러나 태라는 겉으로는 쿨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이미 정해져 있는 젠더, 놀이 각본에서 계속 어긋남을 느낀다. 남자와 자고 싶기도 하지만, 휴양지에서 섹스가 이뤄지는 방식에 불편한 긴장을 느끼기도 하는 태라. 태라는 자신의 모순된 욕망과 감정으로 점차 혼란스러워진다. 태라가 절친한 친구들에게조차 자기 감정을 전달하기가 어렵다는 점은 태라의 감정이 아직 제대로 언어화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십 대들이 섹스에 대해 갖는 ‘쿨함’ 이면에 어떤 폭력의 가능성이 있는지, 우리가 ‘동의’라 부르는 것이 얼마나 복잡한 권력 관계 속에서 작동하는지를 고민하게끔 하는 작품이다.




아그라/Agra

India, France/2023/132min

카누 벨 감독/‘아시아영화의 창’ 섹션     


  25살의 남성 구루. 그는 지독한 망상과 욕구 불만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구루는 자신이 직장에 다니며, 직장 동료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곧 그녀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전부 거짓이다. 매일 데이팅 앱을 들여다보며 불만족스러운 자위로만 위태로운 현실을 지탱해나가는 구루. 그의 망상은 점점 심각해져 가족의 안전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른다. 즉, 구루는 여성을 혐오하는 동시에 욕망하는 ‘루저 남성’이다. 영화의 전반부는 구루의 괴로움을 통해 동시대 남성의 보편적 정서 구조를 집요히 파고든다. 그리고 후반부. 구루는 한 장애 여성을 만나 마침내 바라던 섹스를 하고 사랑의 감정을 나눈다. 그리고 그 여성의 수완으로 늘 갈등과 위계의 공간이었던 좁은 집을 더 높고 큰 건물로 탈바꿈시킨다. 결국 구루의 망상은 경제력으로 대변되는 큰 건물(높은 건물은 남성기의 오래된 은유다)의 문제였던 것이다.


  영화가 남성성, 계급, 젠더 관계를 재현하는 방식과 별개로, 장애를 다루는 방식에도 눈길이 간다. 날로 심해져가는 구루의 광증은 장애 여성을 만난 이후 한 번에 치유되는 듯 보인다. 여자들의 거부에 괴로워하던 구루가 장애 여성을 눈독에 들인 것, 그런 구루가 섹스와 사랑으로 단번에 멀끔한 협상가가 된 것 등은 이 영화가 장애를 그저 하나의 도구로 활용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고민케 한다. 전반부의 굉장한 몰입감이 후반부에 가면서 느슨해지는 건, 플롯의 치밀함을 더 밀고 나가지 못하고 이를 도구적 캐릭터와 설정으로 채워나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날의 딸들/The Daughters of That Day

Korea/2023/94min

고훈 감독/‘와이드 앵글-다큐멘터리 경쟁’ 세션


  한국의 중년 여성 양경인과 르완다의 한국 유학생 바치스. 세대도 국적도 다른 이 둘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각각 제주 4·3과 르완다 대학살 희생자의 가족이라는 것. 영화는 양경인과 바치스가 자국에서 발생한 역사적 비극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는지를 담아낸다. 양경인의 곁에는 바치스가, 바치스의 곁에는 양경인이 있다. 즉 바치스는 양경인의 여정에서 4·3을 배우고, 양경인은 바치스의 고향으로 함께 가 르완다 대학살과 제주 4·3의 같고 다름을 보고 듣는다. 양경인의 어머니는 40년 동안 가장 친한 친구에게조차 자기 가족이 4·3 피해자라는 사실을 숨겼고, 바치스는 부모님 두 분이 모두 살아 있는 한국의 친구들을 보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를 신기해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의 아픔을 조금씩 이해하며 상처를 이야기하고 보듬는 법을 배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르완다에서 포괄적 용서가 이뤄졌다는 점이다. 대학살로 인구의 10퍼센트가 죽었는데도 르완다에서는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했다. 자기 아이를 산 채로 채석장에 던진 남자를 용서한 여인이 보여주듯이. 이러한 용서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영화 상영 후 GV에서, 바치스와 양경인은 르완다의 용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말했다. 바치스는 르완다가 작은 나라여서 서로를 용서하지 않으면 도무지 이웃과 함께 살아갈 수 없다는 점을 그 이유로 꼽았다. 황폐화된 나라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용서가 필수적이었다는 것. 물론 이 과정은 당연히 쉽지 않았다.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용서의 가치를 진정성 있게 교육한 것도 큰 요인이라고도 덧붙였다.


  양경인은 여기에 신앙의 맥락도 작동한다고 말을 더했다. 인간의 몫은 용서이고, 그 이후의 일은 신이 담당할 것이라는 믿음이 포괄적 용서를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더불어 국가가 용서를 돕긴 했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용서를 구하는 가해자의 진정성이라고도 덧붙였다. 정부 주도의 용서에 의구심을 갖고 있던 그녀는 앞서 언급한 용서의 사례를 직접 접하고는 생각을 바꾸었다. 어쩌면 용서는 정말로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물론 4·3은 르완다 대학살과는 다르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직접 사과할 수 있는 르완다와는 달리, 우리는 가해자의 대부분이 죽었다. 심지어 그들은 종종 ‘애국자’라고 상찬되기도 했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좌우 담론의 극한 대립이 참회와 용서를 지연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양경인은 계속 고민한다. 여전히 지속되는 이전 세대의 갈등과 상처를 어떻게 풀어갈지를 말이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을 통해 기자로 초청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는 10월 4일부터 10월 13일까지 진행됩니다. 영화 상영 시간표와 상영작 정보는 아래의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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