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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Dec 13. 2020

풍자로 드러낸 세계의 민낯

채만식, 《태평천하》(문학과지성사, 2005)

식민 통치가 곧 태평천하?

  채만식 장편소설 《태평천하》(1937)에는 후일 그의 단편 〈미스터 방〉, 〈논 이야기〉(1946)에서도 반복될 질문이 담겼다. '풍자의 대상이 되는 우스운 개인을 만든 것은 누구인가?'가 그것이다. 채만식은 안쓰러울 마음이 들 정도로 탁월하게 등장인물의 어리석음을 비꼰다. 그런데 작가의 서술을 따라 등장인물을 조소하다 보면 어느새 심각해진다. 채만식의 풍자가 인물이 아닌 사회를 향하고 있음을, 때문에 사회에 속한 우리 모두가 풍자의 대상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수백 명의 소작인을 부리며 대부업까지 하는 윤직원 영감에겐 아픈 과거가 있다. 그의 아버지 윤용규는 도박으로 번 돈으로 졸부가 된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종종 화적 떼의 표적이 되었다. 문제는 이를 해결해 줘야 할 고을의 수령 역시 사건 해결보다 윤용규의 돈을 뜯는 데 더 관심이 많았다는 점이다. 윤용규에겐 화적 떼나 수령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결국 윤용규는 화적 떼에 비참하게 맞아 죽는다. 헐레벌떡 도망치느라 아버지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한 윤직원은 “오냐, 우리만 빼놓고 어서 망해라!”라고 절규하며 세상을 저주한다. 윤직원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윤직원은 지독하게 돈을 모았다. 하지만 돈만으로는 부족하단 것도 안다. 그의 아버지는 “시대가 차차로 금권(金權)이 유세해감을 막연히 인식”하긴 했지만 금권만으로는 자기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건 몰랐다. 윤직원은 아버지의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족보를 사고, 양반집과 사돈도 맺었다. 증손자 둘을 각각 군수와 경찰서장으로 만들기 위해 아낌없이 투자도 했다.


  그런데 이런 윤직원과 달리 다른 가족들은 죄다 나사 빠진 듯한 모습이다. 그의 자손들은 도박에 빠졌거나, 첩을 만나느라 집에는 들어오지도 않거나, 윤직원이 아등바등 모은 돈을 흥청망청 쓴다. 며느리도 걸핏하면 윤직원에게 시비 걸며 싸우려들기 일쑤다. 윤직원의 입장에서는 모두가 놈팡이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윤직원의 유일한 희망은 둘째 증손자 종학이다. 집안의 위신을 높여 보려는 윤직원의 과감한 투자는 대부분 헛돈쓰기로 귀결되지만, 종학이만은 다르다. 그는 공부도 곧잘 해 일본에 유학 중이다. 윤직원은 종학이 승승장구하여 경찰서장이 될 수 있음을 의심치 않는다. 그런데 날벼락같은 소식이 날아든다. 종학이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경찰서에 잡혀갔다는 전보가 온 것이다. 윤직원은 절규한다.


오죽이나 좋은 세상이여? 오죽이나 (…) 화적패가 있너냐아? 부랑당 같은 수령(守令)들이 있더냐? (…) 자 부아라, 거리거리 순사요, (…) 우리 조선놈 보호히여주니, 오죽이나 고마운 세상이여? 으응? ……제 것 지니고 앉어서 편안허게 살 태평세상, 이걸 태평천하라구 허는 것이여, 태평천하! …… 그런디 이런 태평천하에 태어난 부잣놈의 자식이, 더군다나 왜지가 떵떵거리고 편안허게 살 것이지, 어찌서 지가 세상 망쳐놀 부랑당패에 참섭을 헌담 말이여, 으응? (…) 이 태평천하에! 이 태평천하에……


  윤직원에게 부자의 재산을 평등하게 나누자는 사회주의의 주장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화적 떼와 다를 게 없다. 그래서 일본이 조선인들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태평천하’에 왜 부잣집 도련님이 ‘부랑당패’에 가담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윤직원은 아무도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해 온 자신의 처절한 삶이 정작 안으로부터 내파되는 역설을 견딜 수 없었다.


  채만식은 내내 유쾌한 조롱조로 윤직원과 그 주변 인물들을 묘사한다. 그리고 그 조롱은 끝내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 결말은 윤직원의 천박함과 억척스러움을 낮잡아보던 독자에게 질문한다. 무엇이 윤직원을 그런 사람으로 만들었는지에 관한 질문 말이다.


  윤직원에게 식민 통치가 ‘태평천하’인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일본의 경찰만이 그가 억척스레 모은 재산을 화적 떼와 관료들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줬다. 돈을 투자하면 자손 중에서 군수, 경찰서장을 배출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기도 했다. 식민 통치는 제도적 권력이 ‘부재’하던 시대에 우연히 졸부가 된 윤직원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 줬다. 식민 통치가 태평천하라는 윤직원의 주장이 '타당한' 이유다. 아무도 윤직원에게 그 이상의 무언가를 제공해 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윤직원을 그런 꼴로 만든 것은 사회다.


모든 것이 '팔자(환경)'의 결과물

  아래는 어린 소녀를 욕망하는 윤직원의 추잡한 성욕이 어디서 왔는지를 추론하는 대목이다. 칠십을 먹고도 성욕이 여전한 데는 윤직원이 건강한 신체를 타고난 것도 하나의 이유일 수 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그가 자신의 타고난 신체를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다는 데 있다. 작가의 말마따나, 설령 윤직원과 비슷한 신체를 타고난 사람이라도 농사지어 소작료를 바치다 보면 자연히 기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윤직원처럼 물려받은 부를 바탕으로 놀고먹으며 재산 불리는 데만 신경 쓸 수 있는 ‘팔자(환경)’가 갖춰져야만 성욕을 보전할 수 있다는 소리다.


몇백 명이나 되는 윤직원 영감의 소작인 중엔 윤직원 영감만 한 체질을 타고난 사람이 몇은 없을 리가 있다구요.
그렇건만 그 사람네는 온전히 도조를 해다가 바치기에 정력이 죄다 말라 시들고, 보약 한 첩 구경도 못했기 때문에 자연의 섭리 이하로 오히려 떨어지고 만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가령 특별한 예외나 기적으로, 윤직원 영감네 소작인 가운데 윤직원 영감처럼 칠십이로되 능히 계집을 다룰 정력을 지탱하고 있는 자 있다 치더라도, 그가 감히 첩질과 계집질을 할 팔자며, 그럴 생심인들 하겠습니까.
그러니 결국 그것은 늙은이한테는 생물적 필연이라는 관용도 안 될 말이요, 타고난 선천이니 체질이니 하는 것도 다아 여벌이고, 주장은 한갓 팔자(시쳇말로는 환경) 그놈이 모두 농간을 부리는 놈입니다.


  윤직원의 성욕에 대한 작가의 논평은 그의 삶에도 적용된다. 윤직원의 강퍅한 성격도 모두 팔자(환경)의 결과물이다. 필사적으로 재산을 불리고, 권력을 돈으로 사고, 식민 통치를 태평천하로 여기는 것 모두가 그의 삶의 궤적에선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이 지점에서 채만식의 풍자는 개인에서 사회로 도약한다. 윤직원을 통해 돈과 권력이 없으면 살기 힘들다는 것, 일제 이전의 제도적 권력이 엉망으로 작동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풍자는 때때로 ‘진지하지 못한’ 방법론으로 폄하된다. 풍자론은 종종 풍자 이후의 '대안 없음'을 이유로 비판받기도 한다. 하지만 채만식은 풍자를 방법론 삼아 개인의 서사와 사회적 맥락을 촘촘히 교차시킨 후, 세계의 민낯을 드러냈다. 익숙한 세계와 그 세계를 대하는 우리의 안정감을 낯설게 함으로써 말이다. 이는 우리 내면에 부끄러움과 변화를 향한 의지를 촉발시킨다. 나는 여기서 채만식의 현대성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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