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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Jan 11. 2021

여성혐오를 넘지 못한 허무주의

손창섭 《비 오는 날》(문학과지성사, 2005)

손창섭, 전후 최고의 문제작가  


  전후 최고의 문제작가라 알려진 손창섭의 일관된 주제는 무기력한 남자들이다. 그들에겐 삶의 의미가 없고(〈비 오는 날〉),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노력도 없다(〈미해결의 장〉). ‘인간적인 것’에 거부감과 회의를 느끼며(〈공휴일〉) 모든 책임으로부터 도망(〈사연기〉, 〈유실몽〉)친다. 삶 대신 죽음에 사랑을 느끼고(〈생활적〉) 그 어떤 생산성 있는 일도 하지 못한다(〈혈서〉, 〈피해자〉). 손창섭의 남자들은 결코 해결되지 않을 신체적·정신적 장애를 가진 채 버둥대지조차 못하고/않고 가라앉는 중이다.


  무기력의 시대적 배경은 전쟁이다. 전쟁 이전의 소설은 근대, 계급, 개인, 민족, 민중, 윤리, 운명, 도시, 모더니즘 등의 주제에 천착했다. 하지만 전쟁은 모든 의미를 증발시켰다.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은 손창섭의 남자들은 세상을 향해 뻗어 나가던 관심사를 자기 내면으로 돌렸다. 극도의 허무와 무기력, 무의미가 거창하고 추상적인 주제들을 대체하며 그들의 일상을 잠식해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전쟁 때문만은 아니다. 손창섭에게 전쟁은 기폭제였을 뿐이다. 그에겐 삶 그 자체가 무의미다. 작가 최고 문제작으로 꼽히는 〈신의 희작〉에는 그가 어떤 과정을 거쳐 삶을 거부하게 되었는지가 나온다. ‘S(손창섭)’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 작품이 자전적 소설인지 아닌지에 관한 논란이 있다. 하지만 〈신의 희작〉이 실제든 허구든, 중요한 건 그가 도달한 결론이다. 〈신의 희작〉의 줄거리를 자세히 살펴보자.



자기혐오에서 여성혐오로


  주인공 S가 처음 커다란 충격을 받은 것은 어머니가 모르는 남자와 동침하는 것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어머니가 S의 유년기에 남긴 흔적은 절대적이었다. 어머니는 밤중에 S의 사타구니를 주무르기도 했다. S의 사타구니는 부풀어 올랐지만 어머니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이는 S에게 깊은 수치심을 남겼다. 얼마 후, S는 동침하던 젊은 남녀가 함께 목을 맨 것을 목격하는데, 자신과 어머니 중 한 명이 그와 같은 꼴이 될 거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S의 유년시절에 깊이 새겨진 수치와 공포는 만성적인 야뇨증으로 이어졌다. 그의 야뇨증은 어찌나 고약했는지 나이를 먹어도 나아지지 않았다. 야뇨증은 성기를 향한 S의 혐오를 증폭시켰다. “S는 자주 아무도 없는 곳에서 고간의 돌출부를 내놓고 학대했다. 실없이 잠자리에서 찔찔 갈겨서 소유주의 체면을 여지없이 손상시키는 이 맹랑한 돌출부가 그에게는 참을 수 없이 미웠던 것이다.”


  S가 성기와 자신을 구분하지 못하기에 그의 성기 혐오는 자기혐오로 이어진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자기혐오가 S를 지키는 힘이 된다. S는 싸움이 날 때마다 “야이, 이 새끼 내 눈깔 좀 똑똑히 봐. 난 부모도 형제두 집두 없는, 전도가 암담한 오줌싸개다”라고 지껄였다. S의 상대 중에 S보다 덜 가진 사람은 없었다. 즉, 지켜야 할 것이 있는 그들은 S의 처절한 무소유에 서늘함을 느껴 기가 눌리고 마는 것이었다.


  불행히도, S의 기묘한 깡다구는 성욕과 야합했다. 친절히 대해주는 여성의 호의를 오인해 접근했다가 거절당한 S는 “여자에 대한 그의 어처구니없는 복수 행위”를 시작한다. S는 자신에게 모욕감을 준 영어 교사의 딸 지즈코에게 욕망과 결합된 복수를 자행했다. “지즈코는 원망스럽게 S를 바라보고는 각오했다는 듯이 살그머니 곁에 와서 무릎을 모으고 앉았다.” 지즈코는 S의 부인이 되었다.


  그러던 중 조국이 해방을 맞았다. 해방은 근원적 회의론자 S에게조차 희망을 가져다줄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해방이 자신을 “위대한 일꾼을 만들어줄지도 모른다는 터무니없는 착각에 빠졌던 것이다.” 하지만 해방의 환상은 금세 깨졌고 S는 도둑질로 근근이 끼니를 이어간다. 훔친 음식은 기가 막히게 맛있었고, 도둑질당한 사람들이 당황하는 꼴을 상상하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에게는 몰락의 가능성이 숙명적으로 전신에 배어 있었는지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는 그러한 희비극을 연출하기 위한 의미로만 존재하는 것일까. 신은 이 세상 만물 중 어느 것 하나 의미 없이 만든 것이 없다고 하니 말이다. 여기서 S는 너무나 저주스럽고 짓궂은 신의 의도와 미소를 발견하고, 새로운 도전을 결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내면적 욕구와 생활을 위해서” 문학 활동에 뛰어든 S는 신을 향해 마지막 원망을 쏟아내고, 도전을 선언한다.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의미인 무의미를 소설을 통해 써 내려가는 것이 S(손창섭)에게 남은 도전이다.


  그리고 그는 성공했다. 그의 소설에는 삶의 허무를 탁월하게 감각하는 문장이 가득하다. 무의미의 의미를 증명해내겠다는, 신을 향한 그의 도전장은 빼어난 문학적 성취로 이어졌다. 삶이, 전쟁이, 사회가 인간을 어떻게 소외시키는지, 그 소외는 인간의 내면에 어떠한 상처를 남기는지, 그 상처가 우리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손창섭의 작품에서 무한히 증폭된 허무함이 자아내는 무기력한 우울의 극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종종 허무로부터의 탈출을 모색하기도 한다. 그는 아버지와의 관계 복원 및 새로운 세계로의 도피(〈광야〉), 상식에 의한 구원(〈설중행〉, 〈희생〉), 완벽한 캐릭터(〈잉여인간〉) 등으로 허무와 무의미가 극복될 수 있는지를 실험했다. 하지만 그의 실험은 본질적 무의미를 넘어서지 못한 채 실패했다. 이러한 실패는 무의미가 삶의 근본 조건임을 다시금 그에게 각인시킨다.



젠더를 넘어서지 못한 손창섭


  모든 의미를 걷어내고 무의미에 탐닉한 손창섭도 버리지 못한 것이 있다. 그것은 젠더다. 그가 〈신의 희작〉에서 적었듯이, 여성에게 거부당했다는 S의 분노는 그들을 향한 복수적 성욕으로 발현된다. 문제적 젠더 재현은 그가 쓴 모든 작품의 공통 요소다. 그의 작품에서 여성은 남성 삶의 허무를 부각시키는 장치로 소모되거나(〈공휴일〉, 〈생활적〉) 수동적으로 남자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리다 버려지기 일쑤다(〈사연기〉, 〈비 오는 날〉, 〈혈서〉, 〈유실몽〉). 남자의 삶을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악독한 역할을 떠맡기도 한다(〈피해자〉).


  〈미해결의 장〉에서는 여성이 생명력을 지닌 존재로 등장해 남성의 부러움을 산다. 하지만 여성의 생명력은 여자가 몸이라도 팔 수 있다는 데서 나온다. 여성의 생산성이 남성 신체의 비생산성을 강조하는 수단으로써 활용되는 것이다.


  〈인간동물원초〉는 조금 독특하다. 감옥에 갇힌 남성들의 이야기인 이 작품은 남성 젠더 내부의 위계를 다룬다. 두 명의 권력자 방장과 주사장은 예쁘장한 죄수가 새로 들어올 때마다 누가 그를 차지할지를 두고 신경전을 벌인다. 이들에게 동성 간 성행위는 여자와 하는 섹스의 대체재일 뿐이지만, 적당한 쾌락을 제공함과 동시께 감옥 내 권력을 확인시켜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들이 살인까지 불사하면서 새 죄수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이유다. 요컨대, 〈인간동물원초〉에서 남성 간 성행위는 퀴어적이라기보다는 무의미의 세계에서 허우적거리는 남성들의 사소한 위계 다툼에 불과하다. 남성과 여성의 위계적 이분법으로 확립되었던 삶의 허무는 여성이 부재할 경우 남성 젠더를 세분화함으로써 의미를 연장한다. 어찌 됐든 손창섭은 젠더 없인 허무를 말하지 못한다. 


  삶의 근원적 허무함을 치열하게 탐구한 그조차 젠더만은 버리지 못했다는 것은 우리 삶에서 젠더가 얼마나 근본적인 조건으로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나는 여기서 손창섭의 현대성을 찾았다. 모든 의미를 걷어낸 근본적 무의미도 젠더가 없으면 홀로 설 수 없다. 우리는 아직 삶의 근본적 허무에 도달하지 못했다.


  손창섭의 문제의식이 여성혐오를 비롯한 위계적 젠더의 고착화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은 그가 천착한 주제보다 더 큰 비극이다. 손창섭이 마주한 진짜 비극이 여기에 있다. 그는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가고자 했지만, 자신이 발 디디고 있는 땅의 존재는 자각하지 못했다.


  1972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2010년에 사망할 때까지, 그가 철저히 은거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지 않은 것은 아쉽다. 이 책을 읽으며 그가 계속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면 자기모순을 발견할 수 있었을지가 궁금했다. 그 모순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그에게 축복이었을까 저주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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