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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Feb 10. 2021

세계의 확장을 거부하고 자기 위치를 완고히 고집할 때

김동리, 《등신불》(문학과지성사, 2005)

김동리가 마주한 혼란


  전쟁 전의 김동리는 전통, 토착의 세계가 근대의 도래와 함께 사그라져가는 안타까움을 젠더화된 비극의 형식으로 형상화했다. 그는 이를 통해 높은 수준의 서정성을 성취해냈다.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한 건 〈광풍 속에서〉(1949)와 같은 작품부터다. 이 작품은 전쟁 전 터질 듯 부풀어 올랐던 이념 대립을 소재로 한다. 그의 작품에서 사라져 가는 전근대성이 자아내는 아릿함이 아닌 혼란과 불안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수십 년간, 혼란 속에서 답을 찾기 위해 김동리는 무던히 애썼던 것 같다.


  〈흥남철수〉(1955)는 전쟁 중 북에서 계몽사업을 하던 철이의 이야기다. 자유를 전한다는 사명을 지닌 그는 열심히 노력해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다. 그러던 중 흥남철수 작전이 시행된다. 철이와 친하게 지낸 주민들은 불안에 떤다. 철이와 가깝게 지냈단 이유로 해코지를 당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특히 철이에게 거처를 내준 윤 노인 가족이 문제다. 철이는 군부대의 연줄을 동원해 어떻게든 윤 노인 가족과 함께 피난을 떠나려 하지만 신속히 퇴각해야 하는 군대는 민간인을 위한 자리를 거의 남겨두지 않았다. 이제 남은 것은 다른 수많은 피난민과 함께 배에 타는 방법밖에 없다. 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윤 노인과 그녀의 딸 시정은 차가운 바다에 빠져버린다. 결국 간질을 앓는 윤 노인의 또 다른 딸 수정만 철이와 함께 배를 탄다. ‘온전한’ 사람은 다 죽어 나가고 남은 건 ‘벵재(병자)’뿐이다. 김동리에게 전쟁은 그런 것이었다.



답을 찾을 수 없었던 김동리가 결국 도달한 곳


  혼란을 마주한 김동리는 문인들 간의 공동체(〈밀다원에서〉(1955)), 젊은 여제자와의 사랑을 통한 시의 세계로의 도약(〈송추에서〉(1966)) 등을 통해 돌파구를 찾으려 애쓰지만 시원치 않다. 문인들이 모여 서로를 북돋워 주는 찻집 ‘밀다원’은 어려운 처지에 몰린 문인들이 임시 거처로 삼은 공간에 불과하다. 전쟁 전 작품인 〈인간동의〉(1950)에서부터 암시되기 시작해 〈송추에서〉로 이어지는 젊은 여제자와의 사랑은 시적 세계로 도약하고자 하는 수단이라기보단 늙은 남자의 엉큼하고 궁상맞은 욕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김동리가 돌연 고대 세계로 눈을 돌리는 이유다. 이념 대립의 결과로 인해 ‘벵재’가 되어버린 그는 현실 세계에서 혼란을 극복할 방법을 마련하는 데 실패했다. 〈용〉(1955)은 진득하게 하늘의 때릴 기다린 주나라 강태공의 이야기고, 〈목공 요셉〉(1957)은 예수의 인간 아버지였던 요셉의 고뇌를 다룬 이야기다. 〈등신불〉(1961)은 전쟁에서 도망친 한 청년이 사연 많은 기묘한 불상을 마주하는 과정에서 느낀 동질감을 그렸다. 이 세 작품은 모두 속세를 초월한 것으로 여겨지는 자들이 겪었던 인간적 고뇌에 초점을 맞춘다. 빼어난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혼란을 어떻게 걷어낼 수 있을지 고민하던 소설가가 다다른 곳이 결국 신화적 인물이라는 점에 조금은 맥이 빠지기도 한다. 김동리는 이번에도 답을 찾지 못했다.


  결국 김동리는 자신이 제일 잘하는 것으로 돌아온다. '시대와 불화하는 비극적 개인'이라는 전쟁 이전에 그가 천착했던 주제 말이다. 〈까치 소리〉(1966)는 이 계열에서 해석할 수 있는 작품이다. 사랑하는 정순을 위해 스스로 손가락을 잘라내는 속임수로 명예제대한 봉수는 정순이 다른 남자에게 시집갔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 봉수는 정순에게 도피를 제안하지만 정순은 머뭇거린다. 이에 봉수는 삶을 배반당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정순과의 결혼을 위해 모든 자존심을 내팽개치고 지킨 목숨이 덧없게 느껴진다. 좌절하던 봉수의 분노는 엉뚱한 데로 튄다. 그는 평소 자신을 좋아하던 정숙의 시누이를 강간한다. 쓸모없어진 삶을 스스로 더럽힘으로써 정숙의 배신을 되갚아주는 것이다. 〈저승새〉(1977)는 다소 순하고 서정적인 분위기이긴 하지만, 역시 금지된 사랑이 야기한 비극을 전설의 형태를 빌어 서술한다.



세계의 확장이 소설의 기준이라면


  자신이 마주한 혼란을 극복하고자 끙끙댄 김동리는 끝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답을 구하려는 한 문인의 처절한 시도가 실패했음에도 안타까움이 아닌 냉소가 드는 것은 왜일까? 그의 소설에는 세계의 확장이 없다. 그의 작품의 초점은 늘 시대의 흐름이 맞추지 못해 길을 잃은 남성들(작가 자신)에게 맞춰져 있다.


  여자들은 늘 남성 주인공의 비극을 배가시키는 장치로만 쓰인다. 김동리의 작품에서 여자들은 늙은 남자를 북돋워 주거나(〈인간동의〉, 〈송추에서〉), 짐이 되는 병자이거나(〈흥남철수〉), 바가지를 긁거나 남편에 무심하며(〈용〉, 〈목공 요셉〉, 〈저승새〉), 부정한 짓을 저지르고(〈등신불〉), 사랑에 배신당한 남자의 분풀이 대상이 된다(〈까치소리〉).


  요컨대 김동리의 작품에는 자기 삶을 사는 여성은 없고 남성의 타자로만 이름 불리는 여자가 있다. 집요하게 삶의 해답을 찾았던 그는, ‘중견 남성 문인’의 위치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았다. 소설은 세계의 확장이라는 명제를 기준 삼는다면, 김동리는 게으른 작가다. 여태껏 들리지 않았던 존재들의 목소리가 소설로 쏟아져 나오는 요즘, 김동리의 자기 고집은 반면교사의 사례로 꼽힐 만하다. 나는 여기서 김동리의 현대성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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