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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Feb 27. 2021

예나 지금이나 가난한 사람들은 한탕을 노린다

김유정, 《동백꽃》(문학과지성사, 2005)

  향토적 정서가 묻어나는 시골을 배경으로 하는 소년과 소녀의 풋사랑을 그린 〈동백꽃〉은 김유정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김유정의 단편 23편이 담긴 이 책을 읽고 나면 조금 갸우뚱해진다. 김유정 단편의 핵심은 향토적 서정성이 아닌 힘이 쫙 빠지며 허무해지거나 문제의 기묘한 해결을 이루는 반전에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는 지금은 사라져버린 우리말 단어와 사투리가 수없이 등장한다. 한두 단어면 굳이 뜻을 찾지 않고 추측해가며 읽을 수 있겠지만, 김유정의 작품엔 그 단어의 수가 너무 많다. 매번 책 뒤의 미주를 찾아가 단어 뜻을 살펴보고 오지 않으면 소설의 전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정도다. 그의 작품이 지역과 시대를 보여주는 단어를 많이 품고 있다는 점, 대부분 서민의 생활을 소재로 한다는 점이 〈동백꽃〉을 그의 대표작으로 만들었을 거다.


  하지만 다른 대부분의 작품에서 향토적 서정성은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오히려 비극적이고 풍자적이며 다소 맥이 빠지는 반전이 더 중요하다. 김유정 단편의 반전은 대개 먹고 살기 힘든 서민들의 한탕주의가 우스꽝스럽게 좌절되는 과정에 관한 블랙코미디의 성격을 띤다. 이것이 모든 작품의 특성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가장 강렬한 작품의 특징이라고는 할 수 있다.


  농사지은 곡식을 수확해봤자 지주에게 뺏길 뿐이라 자기 논을 자기가 훔치는 농군의 이야기를 담은 〈만무방〉, 궁핍한 삶을 반전시키고자 금을 캐려 하지만 그것이 헛된 희망에 불과함을 폭로하는 〈노다지〉·〈금〉·〈금 따는 총각〉, 부잣집에서 배가 터질만큼 떡을 얻어먹은 후 죽을 만큼 아픈 딸을 걱정하는 대신 그 많은 떡을 혼자 다 먹었다고 원망하는 못난 아버지를 그린 〈떡〉, 결혼을 간절히 꿈꿨으나 한심하고 허무한 방식으로 바람맞은 남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산골 나그네〉·〈총각과 맹꽁이〉·〈솥〉·〈봄·봄〉, 노름하기 위해 아내의 몸을 파는 못난 남자의 모습을 그린 〈소낙비〉, 아내를 팔아넘기고는 며칠 뒤 그 아내와 몰래 도망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가을〉, 물질로 사랑과 결혼을 쟁취할 수 있을 거라 믿으나 배신당하는 〈두꺼비〉· 〈옥토끼〉, 우연히 행랑어멈과 잠자리를 가진 주인집 남자가 뻗대는 행랑어멈에게 쩔쩔맨다는 줄거리의 〈정조〉, 죽기 직전의 아내로 돈벌이를 할 수 있을까 궁리하는 〈땡볕〉 등등.


  김유정의 작품은 난관에 부딪힌 주인공이 극적인 반전을 노리다가 실패해버리고 마는 우습고도 슬픈 서민들의 삶을 그린다. 서민들이 한탕주의에 빠진 건 삶이 퍽퍽해서다. “농군의 살림이란 제 목 매기라지!”라고 투덜대는 〈만무방〉의 주인공 응오의 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내가 농사지은 걸로 내가 먹고 살기도 힘든 세상에선 성실한 노동과 착실한 저축은 다른 세계의 도덕이다. 삶의 반전을 꾀하려면 위험을 감수하고 모험을 해야 한다. 그래서 자기 논을 자기가 도둑질하고, 생업을 내팽개치고 금을 찾는다. 


  하지만 반전은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는다. 큰돈을 벌고 신세를 고쳤다는 사람들 소식은 여기저기 떠돌지만 정작 소설의 주인공들은 팔자를 고치지 못한다. 어딘가 기시감이 느껴지는 이야기다. 2020년대에도 많은 사람이 한탕으로 삶을 반전시키려 한다. 월급으로는 그저 생존할 수 있을 뿐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주식과 부동산, 가상화폐로 돈을 벌었다는 사람도 많지만 큰 손해를 봤다는 사람은 더 많다. 부자들은 '투자'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탕진'한다.김유정이 작품 활동을 한 1930년대로부터 거의 백 년의 흐른 지금, 많은 것이 변했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가난한 자들의 블랙코미디 같은 삶은 백 년의 시간을 거슬러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나는 여기서 김유정의 현대성을 읽었다. 향토적인 서정성은 두 번째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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