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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Apr 19. 2021

왜 여성들은 ‘소설가의 사명’을 품지 못했나

박태원《소설가구보씨의일일》(문학과지성사,2005)

근대적 내면의 탄생 


 근대 이전에도 인간에게는 내면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면의 중요성은 지금보다 덜했을 것이다. 견고한 신분제는 ‘내면을 가진 인간’의 존재를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분제에는 개인이 없고 집단의 일원만 있다.


  근대는 제한된 내면의 가능성을 극적으로 확장했다. 개인에게 내면이 허락된다는 건, 그가 동질적 집단의 일부가 아닌 개별적 존재로 세상과 대면할 수 있다는 소리다. 개인은 내면을 통해 세상을 느끼는 방식과 살아가는 태도를 주체적으로 조율해낼 수 있다. 강요된 집단윤리가 폐기된 자리를 채우는 것이 바로 내면인 것이다.


  한 남자의 우습고도 진지한 고민을 다룬 단편 〈수염〉(1930)을 보자. 수염을 기르기로 한 젊은 남자가 있다. 그는 남들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비웃어도 개의치 않는다. 멋들어지게 자라지 않는 수염을 거울에 비춰보면서는 흔들리기도 하지만 결심을 꺾지 않는다. 그리고 끝내 친구들에게 자랑할 만한 근사한 수염을 기르는 데 성공한다.


  남자가 수염이 얼마나 길었나 확인하려 바라보는 거울은 근대적 내면의 은유다. 사람들은 그의 나이가 어리다고, 네 얼굴에는 수염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네 수염은 멋지게 길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고 관찰함으로써’ 남들의 반대를 의연히 넘긴다. 그에게는 주변의 목소리보다 내면의 목소리가 더 중요하다. 거울을 보고 수염을 기르기로 한 남자는 내면의 가치를 깨달은 근대적 인간의 표본이다.


  

내면이 낳은 역설: 괴로워하는 소설가


  하지만 마냥 행복한 것은 아니다. 무한한 자율성은 길 잃음, 허무함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낙조〉(1933)의 최주사는 “담배를 빨 것도 잊고 한참을 망연히 서 있”을 수밖에 없다. 꽤나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의 끝에는 뿌듯함이 아닌 허무함이 자리한다. 치열했던 고민과 선택의 결과는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스스로 결정해온 삶은 도대체 무슨 의미였던가. 삶의 황혼기, 최주사는 기쁨보다 헛헛함을 느낀다. 내면의 역설인 셈이다.


  내면을 가진 근대적 개인의 역설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는 자들이 있다. 바로 소설가다. 그들은 조금 더 예민하고 조금 더 섬세하기에 내면에 남들보다 조금 더 큰 가치를 부여한다. ‘보통 사람’보다 더 적극적으로 내면을 활용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길 잃음에 대한 허무함은 커진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 〈애욕〉(1934), 〈거리〉(1936), 〈방란장 주인〉(1936), 〈비량〉(1936), 〈음우〉(1939), 〈재운〉(1941)은 모두 내면을 가진 소설가, 예술가가 주인공이다. 이들은 늘 양가적 감정으로 고뇌한다.


  소설가는 특유의 감수성으로 부조리하고 삭막한 세상을 감각한다. 왜 인간이 스스로 만든 사회 체제와 질서로부터 소외감을 느끼는지 고민한다. 그리고 이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풀어낸다. 문제는 세상이 그들의 작업에 별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근대는 내면이 시작된 시대이기도 했지만, 전례 없는 속도로 변화하는 시대이기도 했다. 사람들의 관심은 근대의 빠른 속도에서 탈주하지 않는 데, 즉 탈락하지 않는 데 쏠려 있었다. 사람들에게는 근대적 속도의 필연적 부산물인 인간 소외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다.


  소설가는 자신의 관찰이 ‘쓸모없음’으로 독해되는 걸 견디기 어렵다. 세상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진다. 그들의 작업에 경제적 보상을 하려 하려는 사람도 적기에 삶은 더 가난해진다. 고상한 정신과 궁핍한 생활의 괴리는 자괴감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들은 세속적인 세상을 경멸하면서도 세상의 인정을 갈구한다. 이 양가감정과 인지 부조화는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가 되어 소설가를 가둔다.


  소설가는 절망적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무언가에 몰두한다. 소설 창작, 여자(사랑), 돈, 친구 등이 그 대상이다. 하지만 모두 다 시원찮다. 〈진통〉(1936)의 주인공은 위층에 사는 여자에게 남몰래 호감을 품다가 어느새 그녀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확신한 남자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위층 여자가 자신의 도움을 구한 이유가 다른 데 있음을 알게 된다.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기에 그의 도움을 필요로 했을 뿐이다. 이처럼 구원을 갈구하는 소설가의 욕망은 종종 헛된 과녁을 향하다 고꾸라진다.


  〈길은 어둡고〉(1935), 〈성탄제〉(1937)의 주인공들도 마찬가지다. 〈길은 어둡고〉의 향이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다. 〈성탄제〉의 순이는 카페 여급으로 일하는 언니 영이를 경멸하지만, 결국 자신도 그 길로 갈 수밖에 없다. 이들이 꿈꿨던 아름다운 미래는 애초에 배반당할 운명이었다. 〈골목 안〉(1939)의 주인공이 남의 집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인 양 떠벌리는 장면은 결국 남의 삶을 훔쳐올 때에만 남들 앞에서 떳떳해질 수 있는 소설가의 괴로운 현실을 자조적으로 보여준다.


  많은 후배 소설가들이 ‘구보씨’를 자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자신을 구보씨의 후예라 자처함으로써 소설가의 고독한 사명을 이어갈 것임을 선포한다. 궁핍하고 초라한 삶이라도, 휩쓸리지 않고 타락한 세상을 비추어 부끄러움을 촉구하는 ‘거울’로 살아갈 것을 다짐한다.



젠더화된 '소설가의 사명' 그리고 '여성 소설'


  흥미로운 건 '구보씨'가 상징하는 소설가의 성별이다. 고독한 사명으로 낑낑대는 사람들은 전부 남자다(〈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애욕〉, 〈거리〉, 〈방란장 주인〉, 〈비량〉, 〈음우〉, 〈재운〉). 반면, 현실에 타협하여 일상으로 복귀하는 자들은 전부 여자다(〈길은 어둡고〉, 〈성탄제〉).


  남자 소설가가 주인공인 작품에서 여성들은 남성 소설가의 경제적 무능력을 조롱하거나, 헌신적으로 내조하거나, 빛을 보지 못하는 남자의 재능을 안타까워하기만 한다. 즉 여성 인물들의 내면은 ‘소설가의 사명’이라는 거창한 위치로 승격된 남자들의 내면에 종속되는 역할만 맡는다.


  〈길은 어둡고〉, 〈성탄제〉에서처럼 여성 인물의 내면이 전면에 나서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주인공 여성들은 사명을 갖고 앞으로 나아가는 남자들과 달리 슬픔을 품고 일상으로 되돌아온다. 남자들은 생활 문제로 고민하면서도 여성의 돌봄으로 소설가이기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여성들은 꿈을 지지해주는 타자가 없기에 현실에 굴복하고 만다.


  누군가 구보씨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나설 때 그의 소설적 사명과 동시에 젠더에도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더 정확히 말하면 누군가 예술가의 거창한 사명감을 자신감 넘치게 선언할 때, 우리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인식론적 타자의 존재도 살펴야 한다. 추상적이고 거대한 명제에 자신을 투사할 수 있는 자들은 이름 없는 타자의 헌신과 돌봄에 기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더불어 좌절한 채 일상으로 돌아간 자들(내면을 가진 여성)의 내면이 그리는 궤적도 좇아야 한다. 거창한 사명을 선포하지 못한 채 일상으로 돌아간 여성들이 무엇을 했는지, 그 과정에서 무엇을 느꼈는지에 주목하는 일 말이다. 아마 이 지점이야말로 ‘여성 소설’의 출발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소설은 거창한 사명을 품은 남자들이 독점할 수 없다. 내면을 가진 건 그들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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