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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May 30. 2021

초현실 세계로 도피하거나, 동물 세계로 추락하거나

이상《날개》(문학과지성사,2005)

근대의 부산물, 쓸모없는 인간


  이상의 소설은 허무함만을 야기하는 세상에서 생을 이어간다는 것의 의미를 고민케 한다. 그의 실험적인(혹은 전위적인) 문장을 이해하지 못해 도무지 집중하기 힘든 작품도 많았지만(〈지도의 암실〉(1932), 〈지팡이 역사〉(1934), 〈동해〉(1937), 〈종생기〉(1937)), 적어도 내가 이해한 작품에서는 그랬다. 쓸모없는 신체를 계속 바깥으로 밀어내는 사회에서 이상이 무엇을 느꼈는지, 이를 어떻게 대면해나갔는지 살펴보자.


십유여 년의 기나긴 방랑 생활에서 내가 얻은 것이 무엇인가. 한 분 어머니를 잃었네. 그리고 절뚝발이가 되었네. 글 한 자 못 배웠네. 돈 한 푼 못 벌었네. 사람다운 일 하나 못하여놓았네.


  〈12월 12일〉(1930)은 “모든 것이 모순”인 세계를 살아가는 남자의 이야기다. 어머니를 모시고 일본으로 갔으나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주인공은 ‘나’는 일본인 친구가 죽기 전에 남긴 유산을 들고 조선으로 귀향한다. 그 돈으로 친구와 병원을 열고 어려운 환경의 동생을 돕는다. 하지만 자신이 마음에 둔 간호부가 조카와 어울리는 데 질투를 느끼고 조카에게 모욕을 준다. 충격을 받은 조카는 병들어 죽고, 나는 간호부가 건넨 아이를 넘겨받은 채 삶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고뇌한다. 끝내 답을 내리지 못한 나는 끝내 기찻길로 뛰어든다. ‘나’는 결국 삶의 모순에 굴복하고 만다.


  다른 작품의 분위기도 비슷하다. 〈공포의 기록〉(1937)은 아내, 세상에게 버림받은 화자의 무너지는 내면을 담았고, 〈지주회시〉(1936)는 성매매로 돈을 버는 아내에게 기생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그렸다. 〈봉별기〉(1936)는 서로를 사랑하나 계속 엇갈리며 무너져가는 남녀를, 〈실화〉(1939)는 매일 자살을 생각하나 결심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남자의 무료하고 덧없는 일상과 감정을 다룬다.



삶의 무의미에 대항하여


  그리고 〈날개〉(1936). 이 역시 앞의 작품들과 비슷하다. 매일 집에만 누워 있으면서 아내가 다른 남자와 만난 대가로 번 돈으로 연명하는 나는 무기력한 남자다. 하지만 날개의 주인공은 이 무기력에서 생기를 느낀다는 점에서 다른 작품과 조금 다르다.


나는 가장 게으른 동물처럼 게으른 것이 좋았다. 될 수만 있으면 이 무의미한 인간의 탈을 벗어버리고도 싶었다.


  주인공은 인간일 때는 느끼지 못한 ‘좋음’의 감각을 쓸모없는 인간, 즉 동물에 가까워졌을 때야 느낀다. 그는 인간들이 만든 화려한 거리 풍경에 흥분하지만 금세 피곤해져버려 외출을 후회한다. 그는 인간 세상에서 피로를 느낀다. 때로는 다른 남자들처럼 아내에게 돈을 쥐어주며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이 돈마저도 아내가 준 돈이지만). 하지만 쓸모없고 무능력한 남자는 스스로 돈을 벌 수 없다. 즉 돈을 쓰는 데서 오는 쾌락을 스스로 생산할 수 없다. 그에게는 인간 세상에서 탈락한 동물의 쾌락이 더 적합하다. 그는 끝내 동물적 세계에서 모든 무의미를 증발시키고 한 차원 높은 세계로 승화하여 올라간다.


이때 뚜우 하고 정오 사이렌이 울었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나는 불현 듯이 겨드랑이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인간’답게 살지 못하고, 아내와 여성에게 기생해오며 존재의 비참함을 보여줬던 이상 작품의 주인공들은 〈날개〉의 현기증에서 최후의 구원 혹은 영구적 낙인을 선사받는다. 남성성을 상실한 쓸모없는 신체는 모든 인간 세상의 의미에 종속되길 멈추거나 아예 인간이길 포기할 때야 소멸하지 않을 수 있다. 초현실이든, 현실이든 이 세상에 그들의 자리는 없기 때문이다. 근대라는 변화에 동참하지 못한 존재가 마주한 현실은 이토록 가혹했다.



유예된 행복의 약속


  한편, 〈황소와 도깨비〉(1937)는 〈날개〉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대답을 내놓는다. 〈황소와 도깨비〉는 이상의 다른 작품과는 달리 굉장히 쉽게 읽히는 우화다. 한 농부가 소를 끌고 가다가 다친 새끼 도깨비를 만난다. 도깨비는 건강을 회복할 때까지 소의 뱃속에서 살게 해주면 소의 힘을 훨씬 더 세게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한다. 도깨비의 약속은 여러 위기를 거치며 실현될 듯 말 듯 농부의 마음을 애태우다가 마지막에야 실현된다. 농부가 “도깨비 아니라 귀신이라두 불쌍하거든 살려주어야 하는 법이야”라고 생각하며 콧노래를 부르며 작품은 마무리된다.


  농부는 행복의 약속이 언제 실현될지 모른다. 그저 도깨비의 말만 믿고 계속 기다린다. 중간에 소가 아파하자 후회도 하지만 이미 소 뱃속으로 들어간 도깨비에게 다시 나오라고 할 수도 없다. 도깨비가 약속을 지키길 애타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할 뿐이다.


  도깨비에게 행복을 약속 받은 농부는 근대적 행복이라는 사회적 약속 앞에 놓인 식민지 조선인과 닮았다. 도깨비가 소의 힘을 세게 만들어주었듯, 근대가 정말 조선인들을 풍족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쨌든 확실한 건 누군가 그 약속의 실현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탈락하고 뒤처져 죽어가는 존재(이상 소설의 주인공들)가 있다는 것이다.


  조선인들이 과연 〈황소와 도깨비〉의 농부처럼 행복한 결말을 맞이했는지는 여전히 대답할 수 없다. 근대의 사명은 여전히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여전히 누군가가 초현실의 세계에서 유희하거나 동물의 세계로 떨어지고 있다는 소리다. ‘도깨비의 약속’은 여전히 우리의 기대와 에너지를 잠식하며 우리를 놓아주지 않고 있다.



덧. 이상의 작품은 여성들의 내면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는다. 남자들이 삶의 의미 운운하며 고뇌하는 동안 몸을 팔아 그들이 먹을 밥을 벌어오는 여자들은 어떤 삶을 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상의 작품에서 근대를 살아가는 모든 인물은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 세기의 천재라 불렸던 이상은 여성과 근대의 관계에 관해서는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던 무능한 천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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