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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Jun 05. 2021

이광수의 한계, 남성 엘리트주의의 한계

이광수《흙》(문학과지성사,2005)

이기적 개인 vs 이타적 민족


  1932년에 나온 이광수의 소설 《흙》은 건실한 변호사 허숭이 농민 계몽과 민족 각성을 목표로 농촌 운동에 투신하는 과정을 담은 소설이다. 소설에서 이광수는 개인의 안위‧향락과 민족의 발전을 지속적으로 대비시킨다. 조선의 엘리트와 농민의 괴리가 크다는 데, 조선인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의 생활수준이 처참하다는 데 심각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는 일을 지상 최고의 과제로 여겼던 그가 결국 일본 제국주의에 기댄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그에겐 일본이 민족 후진성을 극복해줄 최상의 파트너였던 셈이다.


  ‘건실한 청년의 공동체 살리기’는 지금까지도 반복되는 테마다. 영화, 소설, 드라마 등에서 이런 이미지는 무수히 반복되어 왔다. 정치인들도 자신의 스토리텔링을 위해 건실한 청년의 이미지를 차용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건 ‘건실한 청년’의 내용이 무엇으로 채워져 있느냐이다. 어떤 인물이 '모범적인 인물'로 형상화되는지를 살펴보면 그를 요구하는 작가, 사회, 시대의 욕망을 읽을 수 있다.


조선의 지도자가 되려거든 그 개인주의 행복설의 도덕관을 버리시오!


  조선 청년들의 멘토인 한선생이 바람둥이 이박사에게 건네는 말이다. 그의 말에서 개인주의에 기반한 행복은 민족의 행복과 대립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개인의 안락만을 추구하는 태도로는 조선 민족이 내몰린 처참한 상황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조선에 필요한 건 엘리트들의 “셈 안 맞는 노릇”이다. 자신이 왜 가난한지를 모르는 조선 농민들을 위해 “이 문제를 설명할 만한 지식”을 헌신적으로 제공하는 엘리트가 필요한 것이다.


  주인공 허숭의 동료인 갑진은 자기 이익만을 좇는 인물의 전형이다. 갑진은 그 어려운 변호사 시험까지 통과하고 농촌으로 가겠다는 허숭을 이해하지 못한다. 갑진은 어찌하면 돈 많은 여성과 결혼하여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지만 고민한다. 두 인물의 극명한 대비는 이기심과 이타심, 개인과 민족을 대립적인 것으로 형상화함으로써 후자를 바람직한 인물상으로 제시하는 효과를 낸다.



여성의 방종한 성을 단속하라


  이기심이 민족 각성을 막는 첫 번째 악덕이라면, 두 번째 악덕은 방종한 성이다. 허숭의 부인 정선은 부잣집 딸로 굉장한 미인이다. 정선은 자기 집안의 인맥과 허숭의 변호사 자격이 만나 큰 이익을 올릴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정선은 ‘인생의 향락’ 역시 매우 소중히 생각한다. 이는 정선에게 일종의 지상명령이다. 하지만 숭은 정선의 두 가지 기대 중 무엇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그는 돈이 되는 큰 사건에는 관심이 없고, 부부 생활의 ‘재미’를 추구하는 정선과 달리 적당한 절제와 점잖음을 중시한다. 이에 정선과 숭은 사사건건 충돌한다.


  허숭은 정선의 재력과 미모에 빠져 그녀와의 혼인을 택한 과거의 자신을 원망한다. “정선의 머리 속에는 도저히 민족이라든지, 인류라든지 하는 생각은 용납할 수가 없는 것 같았다.” 게다가 허숭은 성적으로 보채고 질투하는 정선을 견딜 수 없었다. “원망하는 여자의 얼굴, 질투의 불에 타는 여자의 얼굴은 숭의 눈에는 심히 추하였다.” 정선은 숭고한 숭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방해하는 캐릭터로만 그려진다. 이광수의 한탄을 들어보자.


이를테면 일본말로 이른바 애로, 그로, 넌센스에 사는 종교는 조선의 인텔리겐챠 여성까지도 완전히 정복하고 말았다. 십 년 전 여성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애국이니 이상이니 하는 도덕적 말들은 긴치마, 자주댕기와 같이 영원한 과거의 쓰레기통에 집어던지고 말았다. … 그들이 말하는 연애도 십 년 전의 ‘연애신성’이라던 연애와는 딴판이었다. … 실로 과학적이요 비즈니스적인 연애였다.


  이광수는 조선의 근대를 힘껏 열어젖힌 연애 관념이 정숙성, 진실성을 상실했음을 탄식한다. 연애의 정수는 사라지고 육체적 쾌락만 남은 상황을 개탄한다. 천박한 연애 관념이 엘리트의 이기심과 만나 민족의 각성을 방해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민족중흥이 사명이었던 이광수는 속죄와 단죄를 감행한다. 소설 말미, 방탕한 생활을 일삼던 갑진은 쓰레기 같은 삶을 청산하고 열악한 농촌인 검불랑으로 향해 2년 간 농사를 짓다가 돌아온다. 갑진은 과거를 반성하고 허숭의 대의에 동참하고자 한다.


  문제는 정선이 단죄되는 방식이다. 그녀는 갑진과 바람을 피우다가 아이를 갖게 되었다는 자책과 허숭에게 버림받았다는 좌절, 허숭을 추종하는 여인들을 향한 질투로 인해 철로에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한다. 하지만 자살 시도는 실패하고 정선은 한쪽 다리를 잃는다. 이제 정선은 더 이상 향락을 즐길 수 없다. 그녀에게 남은 선택지는 허숭과 함께 농촌에 내려가 헌신하고 순종하는 ‘정숙한 여인’으로 거듭나는 길 뿐이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정선은 회개를 거쳐 새 사람으로 태어난다.


  정선은 새로운 인생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제 맘대로 아무에게도 의지함이 없이 사는 인생이요, 노동과 피곤에서 오는 세월 가는 줄 모르는 인생이었다. … 정선은 이러한 중에서 새로운 미를 발견하였다.


  갑진과 정선은 모두 유산 계급 출신의 엘리트였다. 하지만 남자인 갑진이 스스로 뉘우쳐 허숭의 뜻에 동참하는 데 반해 정선은 다리를 잃은 후 ‘시골 아낙’처럼 되고 나서야 허숭의 계획에 들어올 수 있었다. 이광수의 말마따나 이기적 향락이 죄였다 하더라도, 같은 죄를 지은 남녀가 너무도 다른 판결을 받아 든 것이다.


  어릴 적부터 허숭과 함께 자라 허숭을 연모했던 유순의 죽음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는 허숭과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다. 허숭은 정선의 재산과 미모에 잠시 눈이 멀어 유순을 버렸지만 그럼에도 유순은 살여울로 돌아온 허숭의 농촌 사업을 헌신적으로 돕는다. 허숭이 짝지어준 남자와 결혼도 한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오해로 남편에게 맞아 죽는다.


  유순의 죽음은 허숭의 농촌사업으로 큰 손해를 본 마을 유지 정근이 꾸민 계략을 폭로하는 시발점 역할을 한다. 마을 사람들이 정근의 꾀로 감옥에 간 허숭에 대한 오해를 풀고 허숭은 마을의 최고 권위자로 등극한다. 정선과 달리 유순은 퇴폐하였다는 ‘죄’도 없었지만, 농민 계몽과 허숭의 지도자 등극을 위한 배경으로 희생되는 것이다.



이광수의 한계, 남성 엘리트주의의 한계


  결국 이광수가 꿈꾸었던 건 정숙하고 진지한 남성 조선인 엘리트가 이끄는 집단으로써의 민족이었다. 개인주의적 가치에 젖은 엘리트, 엘리트 남성을 유혹해 향락에 빠뜨리는 여성은 속죄 혹은 단죄의 대상이 된다. 심지어 아무 ‘잘못’ 없는 여성도 엘리트 남성의 사명을 부각하는 과정에서 죽는다. 이것이 이광수가 꿈꾸던 이상적인 사회였다.


  온 조선 민족이 “서로 한 목표, 한 이상, 한 주의를 위하여 한 팔이 되고 한 다리가 되어 마침내는 한 유기적 큰 조직체”가 되기를 꿈꿨던 그는 조직체 내부의 남성과 여성의 역할과 자격을 엄격히 규정함으로써 민족의 이름에서 여성을 밀어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광수가 ‘밝은 미래’를 꿈꾼 것 자체를 탓할 순 없다. 하지만 그가 이상적 인물로 제시한 허숭이 ‘정숙한 엘리트 남성’이라는 점은 스스로 제 지평을 축소한 행위가 아니었을까 싶다. 《흙》에는 농민, 여성, 장삼이사가 주인공이 되는 서사가 없다.


  허숭은 “마치 늙은 부모가 오직 젊은 자녀들을 믿는 모양으로 그는 어디서 누가 잘살게 해주려니 하고” 기대하는 “조선 맘(마음)”을 위한 구원자였다. 허숭이 아니고 허숭이 될 수 없는 자들, 즉 수동적 기다림에 종속된 자들을 위한 구원자 말이다. 이광수의 유토피아에서는 허숭보다 유능하고 정숙한 엘리트 남성일 수록 더 적합한 구원자가 된다. 그래서 이광수는 끝내 허숭보다 ‘위대한’ 일왕에게서 답을 찾았다. 이광수에게 조선 민족은 스스로 주인 되는 세상이 아닌 누군가 이끌어주는 세상만을 갈구하는 존재다. 이것이 이광수의 한계고, 남성 엘리트주의의 한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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