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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Jun 17. 2021

'자유연애'를 멈추라는 일갈

심훈《상록수》(문학과지성사,2005)

  심훈의 소설 《상록수》(1935 연재 시작)의 주인공 채영신과 박동혁은 농촌을 계몽하고 교육하는 일이 민족을 위하는 일이라 굳게 믿는다. 그들은 스스로를 “지도분자”라 확신하며 농촌 사업을 사명으로 삼는다. 이들에겐 연애마저 뒷전이다. 부모가 정해주는 사람과 결혼하는 봉건적인 혼인도 싫지만, 농촌 운동에 지장을 주는 연애도 싫다. 심훈의 《상록수》는 민족의 미래를 담지한 청춘 남녀의 ‘바람직한 표본’을 제시한다.


  전국 곳곳으로 농촌 운동을 다녀온 학생들이 모인 자리에서 만난 영신과 동혁은 농촌사업에 대한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고 감동받는다. 각자 청석골과 한곡리라는 시골 농촌 마을에서 원하는 바를 달성한 후 혼인하기로 약속한다. 영신은 교육 사업에, 동혁은 농민 자치회를 꾸리는 일에 매달린다.


  서로를 사랑하는 두 남녀는 모든 에너지를 농촌사업에 쏟는다. 보람된 순간이 많다. 하지만 힘들고 지치는 순간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지 못하는 상황이 괴롭기도 하다. 


“우리의 일이란 관 뚜껑을 덮을 때까지 끝나는 날이 없을 것이니 사업을 다 하고야 결혼을 하려면, 백 살 천 살을 살아도 노총각의 서글픈 신세는 면하지 못하겠군요. … 나 자신이 못나기도 하고 어찌 생각하면 불쌍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제가 그이를 사랑해도 좋습니까? … 하니님, 일과 사랑과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택해주시옵소서. … 지금 두 가지 길을 함께 밟을 수가 없는 처지에 부딪쳤습니다. 오오, 그러나 하나님, 저는 그 두 가지 중에 어느 한 가지를 버릴 수도 없습니다.”

  각각 동혁과 영신의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옆에 두고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는 영신과 동혁의 괴로움은 소설 곳곳에 드러난다. 하지만 이들은 참고 또 참는다. “그네들을 위해서 한몸을 희생해 바치지 않으면, 우리 민족은 영원히 거듭나지 못합니다”라는 동혁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에겐 개인의 행복보다 민족의 안위가 먼저다. 개인의 행복과 민족의 발전은 동시에 추구될 수 없는 것으로 지속적으로 의미화된다.


  영신과 동혁은 자기들이 벌인 농촌 사업이 적당한 궤도에 오르면 혼인하기로 했다. 하지만 영신은 약한 몸으로 과로한 탓에 병에 걸리고 회복하지 못한 채 죽는다. 영신의 죽음 후, 동혁도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농촌 사업에만 헌신하기로 다짐한다.


  민족을 위해 자기 행복을 희생하는 두 남녀를 창조해낸 심훈은 이들을 메시아적 존재로 격상시킨다. 영신의 장례식에는 평소 그녀의 사업을 못마땅해하는 사람들까지 참석한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온 마을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그녀의 숭고한 정신과 헌신적 노동을 기린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을 읽고 쓸 수 있게 해준 영신의 뜻을 잘 이어나갈 것을 굳게 다짐한다.


  동혁은 재치를 발휘해 마을 청년들이 고리대금업자 기천에게 빚진 돈을 모두 청산해준다. 억울한 누명을 써 경찰로부터 수난을 당하면서도 마을 청년들이 봉건적 질곡에서 벗어나 새 출발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준다. 요컨대, 영신과 동혁은 자기희생을 바탕으로 청석골과 한곡리의 주민들을 미개한 상태에서 해방시켜주는 영웅적 존재다.


  심훈은 여류 운동가 백현경과 한곡리의 고리대금업자 기천을 영신‧동혁과 대비시켜 영신과 동혁의 영웅적 면모를 더욱 부각시킨다. 백현경은 말만 번지르르한 운동가다. 그녀는 겉으로는 농촌을 외치지만 농민과 괴리된 화려한 생활을 즐기고, ‘파리도 떨어질 정도로 매끈한 종아리’를 가졌다. 노동의 땀냄새 대신 값비싼 화장품 냄새를 풍긴다. 기천은 감투 욕심은 많지만 봉사하겠다는 마음은 없다. 그저 자신의 명예욕과 부를 쌓는 것만이 중요하다.


  백현경과 기천을 살펴보면, 심훈이 영신과 동혁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지가 한층 분명해진다. 그는 우리 민족에게 농민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사람, 즉 농민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봤다.


오오, 너희들은 기나긴 겨울에 그 눈바람을 맞고도 싱싱하구나! 저렇게 시푸르구나!


  심훈은 희생의 대가가 달콤할 것이라 말한다. 동혁은 영신이 죽은 후 농촌운동에 평생을 헌신하기로 새로이 마음을 다잡은 후 싱싱하고 시푸른 나무, 즉 ‘상록수’를 본다. 동혁의 깨달음은 말한다. 연애, 사랑을 포기하는 과정은 아프고 힘들지만, 그 결과는 달다고.


  심훈은 연애만으로는 온전한 근대가 성립될 수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심훈에게, 온전한 근대는 개별 청년이 내면의 공간을 확장시키는 것만으로는 오지 않는다. 민족이 개화되어야 연애도 온전히 이뤄질 수 있다. 그때까지 연애는 유예될 수 있다. 아니, 유예되어야만 한다. 모든 청년이 사랑에만 열중하면, 민족은 영원히 후진성을 벗지 못할 것이기에.


  하지만 심훈은 ‘연애하지 말고 민족을 위해 봉사하라’는 주장을 두 남녀의 숭고한 러브스토리로 풀어냈다. 자유연애보다 더 ‘고상한’ 연애관을 형상화함으로써 자유연애의 유예를 주장한 것이다. 개인의 행복보다 민족의 행복을 중시했던 심훈도 연애, 사랑이라는 관념 자체를 완전히 배제할 순 없었다. 그저 ‘더 좋은’ 사랑, '더 좋은' 연애가 있다는 걸 보여주었을 뿐이다. 심훈의 《상록수》는 자유연애가 근대의 피할 수 없는 상징임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민족, 농촌이라는 거창한 개념도 연애의 자장 안에서 펼쳐질 수밖에 없을 만큼, 연애는 중요한 근대적 사건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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