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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Jul 18. 2021

모든 것을 버무려 하나의 세계로,
이기영의 리얼리즘

이기영《고향》(문학과지성사,2005)

  1920년대 중반, 충청도의 농촌 마을 원터를 무대로 하는 이기영의 장편소설 《고향》은 농민 계몽, 노동자의 탄생, 전통 혼례와 연애 관습의 대비 등의 이야기로 시대의 전경을 그려낸 작품이다. 더불어 소설의 몇몇 통속적인 설정은 리얼리즘과 구시대적 상상력의 기묘한 공존을 보여주기도 한다. 요컨대, 《고향》에는 식민지 조선이 마주한 근대적 변화와 그 이행이 겪는 질곡의 문제가 종합적으로 응축되어 있다.


  《고향》의 첫 번째 서사는 유학 후 고향으로 돌아와 두레를 꾸리고, 마름과 소작료를 협상하며, 농민과 노동자의 계몽을 촉구하는 희준의 서사다. 그는 고등교육을 받았음에도 입신양명을 꿈꾸지 않고 고향의 발전을 꿈꾼다. 희준의 고민은 심훈의 《상록수》, 이광수의 《흙》에 나오는 지식인의 고민과 닮았다. 낙후된 농촌 마을을 계몽하는 데 민족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인식이 그것이다.


  희준의 사명은 농민 계몽에 그치지 않는다. 이제 막 등장하기 시작한 노동자를 계몽하는 일도 희준의 몫이다. 원터의 노동자들은 노동을 통해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쌓아 가는데, 희준은 이를 계급적 자의식으로 인도해준다. 희준은 삶의 현장에서 노동자, 농민의 각성을 촉구하는 전위적 엘리트의 전형인 셈이다.


  하지만 희준은 모범적이기만 한 인물은 아니다. 집안 어른의 고집 때문에 원치 않는 조혼을 한 희준은 아내를 늘 못마땅하게 여긴다. 아내 때문에 자신이 연애 감정을 느끼는 사람과 사랑할 수 없음에 분노하고, 신식 인물인 자신을 아내가 이해하지 못함에 분노한다. 희준은 아내에게 손찌검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농촌 운동에 뛰어든 지식인 인물을 마냥 모범적으로만 재현했던 《상록수》, 《흙》보다 《고향》이 세상을 더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아내를 대하는 희준의 태도는 작가 이기영의 태도이기도 하다. 서술자로서의 이기영은, 희준의 아내 역시 구습의 피해자일 수 있음을 인지하는 대신 희준과 함께 그의 아내를 내내 비방한다. 편협한 인물 묘사로나마 조혼이 근대적 삶의 양식일 수 없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서사는 젊은 세대와 중장년 세대의 사랑‧연애관 대립이다. 《고향》에는 희준의 조혼 말고도 갑순이와 경호, 인동이와 방개 등 여러 연애 사건이 나온다. 이들이 상대를 선택하는 데 가장 중점을 두는 건 자신의 감정이다. 아무리 좋은 조건의 혼사라도 자신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거부감을 느낀다. 윗세대와는 대조적이다. 윗세대에게 혼인은 경제적 교환, 사회적 평판에 다름 아니다. 때문에 사랑에 죽고 못 사는 자식 세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두 세대의 연인‧결혼관의 분명한 대비는 희준이 악질 마름인 안승학과의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 결정적 소재가 될 정도로 결정적인 사건으로 취급된다. 연애 감정 역시 노동자, 농민의 각성만큼이나 중요한 근대적 사건이었던 것이다.


  마지막은 소설의 주요 갈등을 만들어내는 통속적 설정이다. 소설의 핵심 인물인 경호와 갑순은 각각 중의 아들, 순견을 잃은 처녀라는 ‘결점’을 갖고 있다. 소설의 서사를 전개시키는 핵심적인 갈등은 전부 여기서 나온다. 이 갈등이 봉합되며 소설도 마무리된다. 《고향》은 노동자 농민의 각성, 근대적 연애의 출현(즉 근대를 향한 진보)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정작 소설을 추동하는 힘이 전통적이고 통속적 설정에서 나온다는 건 아이러니하다.


  통속적 설정은 《고향》의 리얼리즘적 성취를 깎아 먹는다. 하지만 이를 정 반대, 즉 이기영이 이룩한 리얼리즘적 성취를 더 강하게 만드는 특징으로 읽을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당시 민중들의 통속적 상상력과 관념을 근대로의 전환을 더디게 하는 시대의 질곡으로 제시하여 근대적 이행기의 모순을 드러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서술이 작가의 의도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기영의 통속성은 작가 역시 근대적 질곡의 혼란에서 글을 썼음을 증명하는 차원으로 이해하는 게 적당할 것이다. 이기영이 넘어서지 못한 통속성은 그 자체로 식민지 조선의 근대가 갖고 있던 한계였던 셈이다.


  어쨌든 우리는 이기영의 《고향》을 통해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총체적 관점에서 조망할 기회를 얻는다. 기존의 소설들이 연애, 계몽, 노동자 계급의 출현, 농민의 각성 등 개별적 주제에 천착했다면, 이기영은 이 모든 것을 종합하여 하나의 세계로 버무려냈다.


  2005년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이기영의 《고향》을 책임 편집한 이상경은 이기영을 “카프의 문예 정책과 창작 방법이 제시될 때마다 누구보다 가장 열심히 그것에 따라 작품을 창작하는 열의를 보였고 또한 그중에서 가장 뛰어난 성과들을 내놓았다.”고 평가한다. 이기영의 소설이 세계를 사실적으로 소설에 담겠다는 그의 의지의 결과물이라는 소리다. 개인의 의지로 창작법을 갱신하며 세계를 충실히 재현하라는 이념적 요구를 충족할 수 있다는 게 경이롭다. 이기영의 《고향》은 리얼리즘적 성취와 더불어 성실한 개인이 발휘할 수 있는 문학적 역량의 한계를 가늠하게 해준다는 점에서도 흥미로운 작품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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