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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May 03. 2024

낙인 찍힌 삶을 강력하게 옹호하는 다큐 두 편

〈거리의 소년 사니〉, 〈데이비 스트리트의 창녀들〉


*〈거리의 소년 사니〉

국제경쟁/다큐멘터리


  〈거리의 소년 사니〉는 노동계급 남성성이 어떤 길을 걷는지에 관한 놀랍도록 흥미롭고 흡인력 강한 다큐멘터리다. 두 감독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한 소년을 12년 동안 카메라에 담았다. 8살 소년 사니는 거침이 없다. 그와 친구들은 “언젠가 경찰에 체포될 거예요”라는 말을 일상적 농담으로 주고받는다. 머저리, 밑바닥 인생, 부랑자, 쓸모없는 거리의 아이들……. 사니와 그 친구들을 부르는 말은 여럿이지만 이들이 내포하는 의미는 한결같다. 지독히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결국 사회에 해만 끼치는 위험한 존재로 성장하리라는 것. 영화는 이 자기 충족적 예언의 시작점으로 돌아가 그 허구적 빈약함을 폭로한다.


  사니는 늘 ‘강함’을 열망한다. 영화에는 그가 강해지고 싶다고 말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영화가 보여주는 사니의 일상을 보면 그에게 ‘강함’은 ‘거칢’의 다른 이름인 듯하다. 스케이트를 타고 다니며 위험천만한 주행을 일삼고, 도무지 ‘장난’으로 보기 힘든 장난을 일삼으며, 학교 교육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어 보이는 사니와 친구들. 그러나 청소년이 된 사니 무리가 털어놓듯 그들을 강해 보이게 해주는 ‘나쁜 짓’의 의미는 ‘어린아이의 환상’, ‘어른이 되기 싫다’는 불안의 투영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거칠고 투박한 남성성을 과잉 수행하는 데서밖에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강함’을 갈망한다. 이들의 ‘강함’은 실은 사회적 존재로 존중받을 수 없다는 ‘불안’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불행한 것은, 사니가 자신이 뽐내는 거친 남성성의 허약한 이면을 깨달을 때쯤에는 이미 현실의 무게가 그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는 점이다. 불장난을 종종 벌이던 사니 무리는 기숙사에 화재를 일으키고, 이 사건은 사망 사고로 이어진다. 그들에게 허락된 거의 유일한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증명하고 싶었을 뿐인 ‘비행 청소년’은 이렇게 순식간에 ‘범죄자’가 되어버린다. 사니는 육체노동으로 돈을 벌기 시작하고 여자 친구와 결혼을 꿈꾸지만 재판 결과에 따라 순식간에 닥쳐버린 비극적 운명에 꼼짝없이 갇혀버릴 판이다. 그에게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정말 이 모든 게 사니 개인만의 책임인지를 묻고 싶을 뿐이다. 놀랍도록 생생한 방식으로 노동계급 출신 남자아이들이 마주하는 남성성의 비극적 구조를 조망케 해주는 영화다.          




*〈데이비 스트리트의 창녀들〉

게스트 시네필/다큐멘터리


〈데이비 스트리트의 창녀들〉은 ‘게스트 시네필: 아르벨로스 필름 데이비드 메리엇’ 섹션 상영작이다. 이 세션은 저명한 영화 복원, 아카이브 활동가가 직접 선정한 영화를 선보이는 섹션으로, 이번에는 캐나다의 영화를 발굴하고 복원하는 캐나다 인터내셔널 픽쳐스의 데이비드 메리엇이 영화를 선정했다. 메리엇은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 전통이 강한 캐나다에서도 최고 다큐멘터리 중 하나로 꼽힌다고 소개했다.


  ‘캐나다 매춘의 성지’로 꼽히는 밴쿠버의 데이비 스트리트 성노동자의 삶과 노동을 촘촘하고 긴급하게 정치화하는 이 영화의 제작기가 흥미롭다. 애초에 두 감독은 제작사에게서 ‘도덕적 창녀’, 즉 생계 등의 문제로 어쩔 수 없이 성노동에 뛰어든 사람들을 다루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감독은 이를 거부하고 독립영화로 제작해 성노동자들의 날 것 그대로의 삶과 노동을 담아냈다. 영화에는 성 구매자들의 얼굴과 흥정 등 어떻게 촬영했을지 궁금한 장면이 많은데, 성노동자들이 몰래 마이크를 달고 카메라로 촬영하는 등의 기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영화는 당시 데이비 스트리트의 성노동자를 비추며, 경쾌하고 발랄하게 시작한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이 영화에는 성노동자들의 삶에 관해 영화가 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 담겼다. 호객과 흥정 장면, 가족 인터뷰, 일하며 겪은 폭력, 그들 사이의 갈등, 일상적인 불인과 미래의 압박, 마약 문제 등등. 영화가 성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제멋대로 재단하지 않는다는 점이 유독 인상 깊다. 서로 다른 성노동자들은 왜 자신이 이 일을 시작했는지 말하는 부분이 대표적이다. 누군가는 그저 돈이 필요해서 이 일을 시작했고, 누군가는 순전히 아빠에게 복수하고 싶어서 이 일을 시작했다. 즉 영화는 ‘동정할 만한’, ‘도덕’을 중시하는 사람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사연을 맨 앞으로 내놓지 않는다. 물론 이들의 ‘자발적 선택’에 구조적 맥락이 있다는 점도 깊이 있게 다룬다. 성매매/성노동에 대한 기존 통념을 계속 비껴가면서도 그들이 일터와 삶에서 만들어내는 생기와 활력을 자연스레 담아낸다.



  몇몇 인상적인 장면을 살펴보자. 데이비 스트리트에는 크로스드레스, 트랜스젠더, 시스젠더 여성, 게이 등등이 구역을 나누어 일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항상 함께였다. 폭력적으로 구는 성구매자가 있으면 함께 나서 동료를 보호해주고 정보를 공유하는 등 연대하며 서로를 지켰다. “있으면 안 될 존재들이 한데 모여 있죠.” 도덕 분류 체계의 맨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이 낙인을 비틀며 자신들의 현재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며 재의미화한 말이다. 사회에 ‘불온하다’ 낙인찍힌 존재들의 모든 연대에 적용할 수 있을 만큼 간결하면서도 강력하다.

영화의 또 다른 감동적인 순간은 캐나다 최초의 성노동자 집회 장면이다. 성노동 비범죄화와 미성년자 성매매 금지, 처우 개선,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대안을 요구하며 당당히 행진하는 성노동자이자 활동가들에게서 ‘절망적으로 낙관’하는 태도가 갖는 힘을 분명하게 감각할 수 있었다. 이 영화를 큐레이션한 메리엇에 따르면, 〈데이비 스트리트의 창녀들〉은 유수의 영화제에서 상을 받아 큰 화제를 모았으나 정작 성노동자들은 86년 엑스포를 계기로 다른 곳으로 쫓기듯 이주했다고 한다.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들이 절망 속에서도 낙관으로 벼려낸 정치적 저항에 접속한 우리가 이를 어떻게 이어받을 수 있을지 고민해볼 일이다.


  만약 당신이 영화에 나오는 온갖 ‘도착자’, ‘변태’에 끝까지 마음을 열지 못하겠거든 영화에 출연한 성노동자 어머니 인터뷰를 유심히 보면 좋겠다. 그녀는 한때는 아들이었으나 지금은 트랜스 여성이자 크로스드레서로 성노동하는 미셸이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바라면서도, 사람들에게 그들 역시 사람이라는 점을 늘 상기해달라고 당부한다. 성노동자라는 이유로, 규범적 존재론에서 벗어난 자라는 이유로 함부로 대하거나 존중받지 못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를 급진적으로 전복하는 관점이든 포괄적 휴머니즘의 관점이든, 성노동자들이 자기 자신을 위한 정치학을 직접 만들어가는 과정을 좇는 이 영화가 뿜어내는 생기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근본적 보수주의자의 심장마저도 두려움에 떨게 만들 영화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을 통해 제25회 국제전주영화제에 기자로 초청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두 영화의 상영 시간은 영화제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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