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회 국제전주영화제
전주시네마프로젝트
‘영끌’로 작은 아파트를 장만한 9년 차 레즈비언 커플 선우와 희서. 이제 행복한 일만 가득할 줄 알았다. 그런데 잘 나가던 희서는 회사의 남성 동성 친밀성 사회에서 배제당해 성과를 온전히 인정받지 못하고, 희서의 가족은 그녀에게 이성애 결혼을 계속 압박한다. 희서가 아파트 마련 비용을 대부분 마련한 데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는 선우는 배달 일을 하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하지만 일하다 다리를 다쳐 오히려 걱정만 끼친다. 집을 마련하기 위한 대가는 두 사람의 생각보다 거대했다.
문제는 이 모든 문제를 감내할 감정적 토대의 근원이 되어주어야 할 아파트에조차 이상한 일이 생긴다는 점. 선우와 희서는 아랫집에서 올라오는 악취로 괴로워하다 그 냄새가 혼자 살던 할머니가 고독사한 후 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희서가 회사와 원가족 일로 지친 사이 선우는 홀로 그 할머니에 대한 조사를 이어간다. 고약하든 향기롭든 냄새는 경계를 넘는다. 둘은 그 지독한 냄새에서 레즈비언 친밀성의 계보를 발견하고, 그 계보를 통해 위기를 넘기고 다시금 단단해진다. 어느 ‘무연고자’가 남긴 삶의 조각들을 차근히 채워나가는 집요함으로 그려낸 이 계보는 기록‧기억되지 않고 스러진 소수자의 삶을 복원하고 상기하는 일의 중요성을 설득력 있게 펼쳐내 보인다.
한국경쟁
자신이 화목한 가정에서 부족할 것 없이 자랐다고 생각하는 주연은 어느 날 술 취한 아빠와의 통화에서 뜻밖의 이야기를 듣는다. “고모처럼 되지 말아라.” 1953년생으로, 이십 대 초반에 자살한 고모 이야기였다. 이미 장성한 성인인 주연은 혼란을 느낀다. 왜 지금껏 고모의 존재조차 몰랐던 걸까? 왜 이제껏 가족 중 누구도 고모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걸까? 주로 여성의 삶을 카메라에 담아온 주연은 이제야 이름을 알게 된 고모 양지영의 삶을 추적해보기로 한다.
감독의 탐구는 ‘화목한 가정’이라는 자기 믿음을 처음부터 재검토하는 데서 시작한다. 남아 선호 사상이 당연하던 시절에 장녀로 태어난 고모는 공부를 잘했으나 서울로 대학 가는 일을 허락받지 못했다. 취재를 이어나가면서는 고모가 오늘날의 교제 살인을 당했으리라는 분명한 정황이 발견되기도 한다. 쉬쉬하던 어른들이 수수께끼처럼 던진 말은 고모의 죽음이 ‘개인적 비극’이라는 느낌을 줬지만, 감독이 취재한 고모의 죽음은 ‘사회적 죽음’에 더 가까웠다. 고모는 남자친구 집에서 죽었다는 이유로 가족조차 이 일을 쉬쉬했기에 이제껏 온당한 추모를 받지 못했다. 이 뒤늦은 추모는 죽은 지 50여 년 후에 당시에는 태어나지도 않았던 조카에 의해 이뤄진다. ‘조카’이자 ‘후배 여성’인 양주연이 양지영의 삶을 복권하는 과정을 담은 이 다큐멘터리는 개인적 비극을 사회적 비극으로 재해석하여 가족의 서사를 전체 여성의 서사로 확장한다.
프론트라인
이 영화의 모든 장면은 칠레의 감옥에 갇힌 여성들이 핸드폰으로 몰래 촬영한 저화질 영상으로 구성되었다. 대체로 가난하고, 아마도 그러한 이유로 자주 감옥에 들락거릴 수밖에 없는 이들의 카메라가 주로 찍는 건 아이들이다. 이 여성들은 아이가 2살이 될 때까지만 직접 돌볼 수 있다. 그 이후에는 아이를 밖으로 보내야만 한다. 그러나 가난한 엄마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이 엄마와 떨어졌을 때 엄마와의 연결성이 극적으로 취약해지리라는 점은 자명하다. 엄마들은 애틋하고 간절하게 아이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렇게 하면 아이를 조금이라도 더 자신의 곁에 둘 수 있다는 듯이. 이 엄마들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 이들의 범죄가 얼마나 심각한지 우리는 모른다. 그럼에도 영화는 진심을 담아 촬영한 조악한 영상으로 이 강제된 이별에 어떤 방식의 인도적 개입이 필요하다는 점을 쉬이 설득해낸다. 진심을 다해 돌봐줄 엄마가 사라졌을 때 아이들이 또 다른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여성 수감자들끼리의 사랑과 그들이 만들어낸 촘촘하고 따뜻한 네트워크, 열악한 감옥에서의 삶 등을 두루 망라해 보여주는 이 영화는 긴급한 호소로 읽힌다. 어머니들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영화보다 낯선
베를린 외곽. 트레일러들이 수풀 속에 불규칙적으로 늘어져 있다. 퀴어 페미니스트 그룹 ‘몰리스’가 거주하는 곳이다. 영화는 공동체의 소박하고 평화로운 삶을, 그 작은 세계의 분위기와 리듬을 관객이 직접 감각할 수 있도록 차근히 전한다. 꽃, 고양이와 강아지, 독서, 클럽 음악, 피어싱, 타투 등등. 서로 그리 어울려 보이지는 않는 대상들이 나름의 관계성으로 얽혀 독특하면서도 편안한 경관을 펼쳐낸다.
그러나 이 공간은 그리 단단하지 못하다. 한 비정규직 구성원의 사회적 취약성과 마찬가지로 그 토대가 연약하다. 꽃 안으로 극단적으로 파고들어 오랫동안 머무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마치 그 안으로 들어가면 트레일러 주변에서 들려오는 공사 소리를 막을 수 있다는 듯 집요하다. 하지만 공사 소리가 가까워지는 일을 중단시키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소수의 사람이나마 기대고 쉴 수 있었던 이곳은 “있었지만, 이제 없다”. 영화가 기록한 이들 정원의 운율은 계속 울려 퍼질 수 있을까?
한국경쟁
망해버린, 26에 은퇴한 아이돌 멤버 셋이 제주도로 뒤늦은 수학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이들은 더는 아이돌이 아님에도 여전히 아이돌로서 훈련받은 것들을 몸에서 떨쳐내지 못한다. 지난 시간 생존하기 위해 혹독히 견뎌냈던 것들이 끈적하게 달라붙어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으려는 이들을 자꾸만 붙잡는다. 그러나 K-POP 아이돌 ‘산업’에서 ‘상품’이 되지 못한 이들이 겪는 문제들을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세세히 짚어내는 이 영화의 주요 정서는 역설적이게도 희망이다. 내내 이들을 실패한 과거에 붙들어 매는 것들이 불쑥불쑥 소환되지만 그 이면에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겠다는 결심, 즉 힘을 낼 시간이라는 깨달음이 있다.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은 내내 절망적인데 영화가 내내 희망의 질감을 보인다는 역설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다. 절망과 희망의 기묘한 공존과 끝내 희망의 손을 들어주는 여정은 매우 흡인력 있다.
그리고 예라가 있다. 자살한 아이돌 멤버 예라는 이 셋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세 친구는 예라를 추모하고 자신들의 상처를 보듬으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힘을 낼 시간〉은 캐릭터의 앙상블과 아이돌 산업에 대한 구체적인 취재 내용이 청년을 위로하는 서사와 깊이 어우러지는 따뜻한 영화다. 당신이 나처럼 K-POP 아티스트를 사랑한다면, 그들에게 위로받을 때마다 이 영화를 함께 떠올리며 그 자리에 서지 못한 다른 얼굴을 함께 생각해보면 좋겠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을 통해 제25회 국제전주영화제에 기자로 초청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위 영화의 상영 시간은 영화제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