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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Jul 10. 2024

[BIFAN] 성性을 착취한 영화가 나아간 몇 가지 길

제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아래 영화는 모두 제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셀룰라이드 에로티카: 섹스플로이테이션 영화의 해부’ 섹션에 소개된 영화다. 위키 백과의 소개를 따르면, 섹스플로이테이션 영화는 엑스플로이테이션 영화(“금전적 이익을 위해 동시대의 사회 문제 등을 영화의 소재로 이용하거나 비교적 외설적인 면에 국한하는 등 감각적인 측면을 가진 영화”) 중 성적 소재에 초점을 맞춘 영화를 일컫는다. 이들 영화는 영화가 제작된 시대의 성 관념을 살펴볼 기회를 흥미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맘 앤 대드

Mom and Dad(‘셀룰로이드 에로티카: 섹스플로이테이션 영화의 해부’ 섹션)

윌리엄 보딘/USA/1945/97min/15+     



  중산층 가정의 주인공이 겪는 일들을 바탕으로 성 도덕, 성 위생 관련 주제를 다루는 ‘성 위생 영화’의 원형과 같은, 엄청난 흥행을 거둔 작품이라 한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영화는 성 규범이 타락한 데 분노하는 보수적인 어머니와 상대적으로 무관심하고 리버럴한 아버지로 이뤄진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조앤이 임신하며 겪는 일을 다룬다. 영화에서 가장 분명한 악역은 어머니다. 어머니는 학교에서 성교육을 하는 블랙번 선생을 쫓아내는데, 정작 조앤이 임신하자 앞장서서 문제를 해결하는 건 수치스러워할 뿐 무능한 어머니가 아닌 블랙번이다. 영화는 ‘구식 여자들’을 개혁적인 남선생과 대비시켜 메시지 전파의 효과를 극대화한다.     


  영화 시작과 중간, 끝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자막도 흥미롭다. ‘진정한 미국인(True Americans)’에게 호소한다는 자막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성에 관한 이야기를 무조건 덮어두고 침묵하기보다는 정보를 정확히 전달해야 미혼모, 성병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계몽이 목적임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다. 리마스터링 복원본에 들어간 자막을 보면, 인터미션 때 관련 정보를 담은 책자를 판매하기까지 했다고 하니 이 영화가 표방한 가치를 더욱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영화적 형식과도 연계되어 있다. 영화의 후반부에는 학생들을 교육하기 위해 보건 위생 영화를 상영하는 장면(즉 영화 안에 또 다른 영화를 상영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서 관객은 학생의 입장에서 그 영화들을 관람하게 된다. 임신과 출산, 성병 등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영화 속 영화는 ‘깨끗하고 도덕적인 삶(Clean and moral life)’을 위해서는 적확한 정보가 꼭 필요하다고 반복하여 강조한다. 교육, 도덕, 극영화의 경계를 거침없이 넘나들며, 〈맘 앤 대드〉는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선명하게 전달하기 위해 직진한다.          


블레이즈 스타 누드촌에 가다

Blaze Starr Goes Nudist(‘셀룰로이드 에로티카: 섹스플로이테이션 영화의 해부’ 섹션)

도리스 위시먼/USA/1962/75min/19+     



  약혼자이자 매니저의 통제로 답답함과 권태를 느끼는 인기 배우 블레이즈는 어느 날 나체주의자들이 모이는 장소가 있다는 영상을 접한다. 화면 속 사람들은 숨 쉴 틈 없이 일만 하는 자신과 달리 여유롭고 행복해 보인다. 블레이즈는 이내 그곳을 찾아 자유와 해방으로서의 누드를 누리고 재계약에만 애가 탄 약혼자/매니저를 뒤로하고 누드촌에서 만난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심지어 재계약을 해야 하는 소속사의 수장 역시 나체주의자의 일원이었기에 재계약 문제까지 수월하게 해결된다.     


  나체주의에 대한 막연한 판타지에 기대 다소 뻔한 구도로 전개되는 이 영화에서 정작 흥미로운 부분은 영화가 나체주의자를 담아내는 방식이다. 당대 미국 영화의 도덕적 검열 기제였던 헤이즈 규범(Hays Code) 때문인지 벌거벗은 인물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성기를 노출해 보이지 않는다. 배우들은 다리를 꼬거나 부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하는 등 어떻게든 성기를 보여주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다. 이런 장면에서 관객은 필연적으로 세심한 카메라 앵글과 감독의 인위적 포즈 지시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렇게 ‘자연스러움’의 공간인 누드촌에서 역설적으로 인공적인 무언가가 형상화된다. 여기에 따라오는 또 하나의 아이러니가 있다. 감독이 결코 의도하지 않았을 방식으로 누드촌에서 피어나는 ‘인공미’는 헤이즈 규범의 실재적으로 작동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다리를 꼬아 성기를 가리는 것으로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헤이즈 규범이 무용해졌음을 보여주는 뜻밖의 효과 역시 자아낸다.          


뼈와 살이 타는 42번가

Fleshpot on 42nd Street(‘셀룰로이드 에로티카: 섹스플로이테이션 영화의 해부’ 섹션)

앤디 밀리건/USA/1972/78min/X+    


 

  더스티는 성노동자로서 자기 노동의 가치를 분명히 알고 있는 여성이다. 영화는 그녀를 집으로 들인 한 남성의 불만으로 시작한다. 왜 청소를 하지 않느냐, 왜 직업을 구해 생활비를 보태지 않느냐는 남자의 불만에 더스티는 자신이 이곳에 머무는 비용보다 그에게 섹스를 제공해주는 대가가 더 크다고 응수하며 그날로 남자의 물건을 훔쳐 집을 나온다. 심지어는 훔친 물건을 팔기 위해 만난, 더스티에게 섹스를 요구하며 물건 값을 협상하는 장물아비의 돈마저 훔친다. 성노동자라는 직업에 이어, 더스티는 남성 권력이 깃든 규범과 도덕을 능숙하게 비껴 가고 조롱할 줄 안다.     


  다시 길거리로 나온 더스티는 트랜스 성노동자 동료 체리의 집에서 머물며 일을 이어간다. 더스티와 체리가 자신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몇몇 장면에서는 그들의 삶에서 자연스레 우러난 경찰 국가, 성병, 값비싼 집값, 연대, 호모, 퀴어 등에 대한 정치적 통찰이 이어진다.     


  그러던 어느 날 밥이 나타난다. 성노동자들이 모인 클럽에 나타난 중산층 출신의 정숙한 남자 밥은 더스티에게 사랑에 빠지고 더스티는 체리(성노동)와 밥(정숙한 중산층 가정), 즉 두 세계 사이에서 고민에 빠진다. 자기혐오에 빠진 트랜스 여성 체리는 ‘백마 탄 왕자’를 만난 더스티를 질투하는데, 이를 알게 된 더스티는 미련 없이 밥에게로 향한다. 그러나 밥은 사고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고 더스티는 다시 길거리로 돌아온다.    

 

  이 영화가 섹스플로이테이션 장르에 딱 맞는지는 의문이다. 성노동자와 중산층, 트랜스 여성과 시스젠더 여성 사이의 도덕적·존재론적 위계를 다루는 〈뼈와 살이 타는 42번가〉는 소재주의에 빠진 자극적인 영화라기보다는 여성/퀴어/노동/빈곤/규범의 정치학에 관한 생산적인 질문을 던지는 영화로 보이기 때문이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데이비 스트리트의 창녀들〉과 함께 보면 좋을 영화다.


하드코어: 스크린 성 해방

Sexual Liberty Now(‘셀룰로이드 에로티카: 섹스플로이테이션 영화의 해부’ 섹션)

존 램/USA/1971/79min/X+     



  이 영화가 제작되던 시기, 미국은 중대한 질문에 마주한 상태였다. 적나라하고 ‘수준 낮은’ 포르노 영화에 대한 검열과 법적 제재의 문제가 부상한 것이다. 미국은 대통령 명령으로 위원회를 꾸려 이 문제를 다룬다. 영화는 위원회 소속 찬반론자의 의견을 교차로 소개한다. 그러나 사실 위원회의 일은 난센스다. 위원회는 미래의 위협이 아닌 당면한 현재에 관해 논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미 셀 수 없이 많은 포르노 영화가 미국 전역에서 상영되고 있는 상태다. 반대는 부질없고 공허하다.     


  영화는 여러 포르노 영화 장면을 잘라 붙여 끝도 없이 이어 간다. 서로 다른 영화에 등장한 남성기와 여성기, 삽입, 사정, 애무 장면(심지어 수간까지도)이 내내 이어진다. 위원회는 몇몇 성적 보수주의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런 영화를 볼지는 개인이 판단할 문제라고 결정 짓는다. 검열은 국가가 아닌 개인이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더불어 미국보다 먼저 포르노 영화를 합법화한 덴마크의 사례를 들어 포르노 허용의 긍정적 사회 효과를 강조하고 반대자의 근거가 허약한 토대에 기대고 있음을 폭로한다.     


  물론 이를 오늘날의 관점에서 ‘해방’이라 보기는 어렵다. 성기 삽입 중심의 백인 이성애 남녀의 섹스를 질리도록 보는 일 따위가 결코 해방일 수는 없어서다. 다만 그럼에도 이 영화는 당시 미국에서 성적 자유주의가 성적 보수주의에 완전한 승리를 거뒀다는 점은 분명하게 보여준다. 영화의 ‘교훈’이 최신의 급진적 성 해방 담론을 주창하는 사람들과 수십 년 전과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엄숙주의자가 공존하는 우리나라에서 여전히 유효하다는 데서 우리는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자유주의적 성 해방이라도 두 손 들어 환영해야 할 판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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