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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Jul 16. 2024

[BIFAN] 다종다양한 디스토피아를 돌파하는 상상력

제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스키르코아: 거짓의 삶

Schirkoa: In Lies We Trust(‘메탈 누아르’ 섹션)

이샨 수클라/India, France, Germany/2024/103min/Korean Premiere/15+



  이름 대신 숫자와 알파벳으로(‘197A’, ‘242B’) 불리고, 얼굴을 전부 가리는 봉투를 쓰고 다니지 않으면 체포되는(성인인 주인공은 한 번도 자기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전체주의 사회. 공무원에 정치인 선출까지 앞둔 번듯한 남자인 197A는 홍등가에서 거주하는 애인 242B와 종종 콘타카로의 탈출을 논의한다. 두 사람이 사는 곳에서는 공포의 대상인 외국인과 기형인이 가득한 이웃 나라 콘타카는 이 둘에게 자유를 가진 매혹적인 곳으로 표상된다.


  그러나 먼저 떠난 242B가 체포되고, 또 다른 체제 위반자 여성을 만난 후 극적으로 콘타카로 향한 197A는 콘타카 역시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기보다는 신격화된 존재 O에 의탁한 거짓 자유만이 횡행한 곳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어떤 나라에서도 초월적 존재로 여겨지는 ‘O’는 그 사회에 맞는 모습으로 변형된 채 추앙받으며 다양한 형태의 억압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다. 마침내 꾸며지지 않은 진짜 O를 대면한 197A는 묻는다. 도대체 왜 세상을 구하지 않고 이대로 방치하느냐고. O는 답한다. 사람들은 적당한 억압이 있어야만 자유를 꿈꾼다고. 이 혼란스러운 진실을 마주한 197A는 봉투를 벗고 홍등가의 242B에게로 향한다. 감당할 수 없는 자유의 진실에 넋이 나간 표정이다.


  숫자와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이름, 얼굴을 가리는 봉투 등은 얼굴과 이름이 고유한 인간성을 대변한다는 점을 분명하고 직선적으로 환기하며 호기심과 몰입감을 높인다. 자유는 통제가 있을 때만 존재한다는 결말부의 메시지도 인상적이다. 그러나 처음과 끝을 잇는 서사의 힘과 매력도는 이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은 아쉽다. 너무 많은 세부적인 이야기를 풀어내기보다는 조금 더 심플하게 접근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붉은 주둥이

Crimson Snout(‘아드레날린 라이드’ 섹션)

루우 탄 루안/Vietnam/2023/99min/Korean Premiere/15+



  종족, 부족의 전통에서 공포 요소를 끌어오는 포크 호러(Folk Horror) 장르의 영화다. 베트남 영화 중 최고 흥행 기록을 가졌다고 하는데 가끔 몰입을 방해하는 조악한 CG를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몰입감이 높다.


  ‘남’은 약혼자 ‘슈안’과 함께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마을로 돌아온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은 이유와 사체의 모습이 어딘가 석연치 않다. 아버지뿐만 아니라 다른 가족들도 하나둘씩 죽어 나가며 극의 긴장감은 고조된다. 그리고 그 핵심에 개고기가 있다. 남의 집안은 개고기 정육점을 운영하는데 영화는 지속적으로 개고기 식문화가 ‘야만’의 표지임을 강조한다. 개고기를 손질하는 잔인한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며 관객의 거부감을 자연스레 높이고, 개고기를 먹는 사람과 안 먹는 사람, 개 농장을 계속 운영하고 싶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계속 구분한다. 그러고는 전자를 ‘야만’에, 후자를 ‘현대’에 배치한다. 전근대적이고 권위적인 시골 마을의 가부장제를 개고기 식문화와 강하게 연동하는 플롯은 이런 인식을 더욱 강화한다. 개별 인물이 마주한 운명 역시 이러한 구도와 관련이 있다. 영화는 남의 가문에 닥친 잇따른 죽음의 이유로 개, 사람이 지은 업보를 제시한다. 개에게(물리적 폭력으로 인한), 사람에게(가부장적 악습으로 인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죽고 그렇지 않고 전통을 끊어내는 사람은 산다.


  요컨대 이 영화는 가부장제, 개고기 식문화를 현대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발목을 잡는 과거 악습의 자리에 놓는다. 여기서 탈출하려는 남과 슈안은 과거의 흔적이 자신들에게 달라붙는 일을 누구보다 두려워하며 끝내 이 모든 것들을 정리한 후 마을을 떠난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같은 장르의 영화 〈파묘〉가 과거를 파헤쳐 다시 마주하자고 말하는 반면, 〈붉은 주둥이〉는 과거와 현재의 연결을 완전히 끊어내자고 말하는 셈이다. 〈파묘〉가 역사를 마주하자고 호소하는 고루한 방식만큼이나 부정으로 얼룩진 과거를 현재와 완전히 절단하자는 〈붉은 주둥이〉의 방식 역시 문제적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다. 어떠한 문화적·역사적 요인이 두 나라의 포크 호러 영화에 역사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을 만들어냈는지는 궁금해진다.


바디 오디세이

Body Odyssey(‘메탈 누아르’ 섹션)

그라치아 트리카리코/Italy, Switzerland/2023/103min/Korean Premiere/19+



〈블랙스완〉의 여성 보디빌딩 편이라고 말할 만한 영화다. 다만 더 기괴하고 음울하다. 아주 작은 흠결도 없는 철저한 운동으로 몸을 ‘통제’하는 여성 보디빌더 모나. 모나는 “네 몸은 네가 통제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무자비한 코치와 함께 마지막 대회를 준비 중이다. 그런데 경쟁자의 위세가 만만치 않고 코치는 자꾸만 더 효과가 좋다는 새로운 스테로이드를 권한다. 안 그래도 호르몬 불균형과 과도한 스테로이드로 클리토리스가 부풀어 오를 정도의 부작용을 겪는 중인 모나는 내키지 않지만 결국 ‘완벽한 통제’의 일환으로 약을 바꾸고 대회에 몰입한다.


  엄청난 근육질의 모나는 늘 드레스에 하이힐을 신고 다닌다. 둘 다 전형적으로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여성 신체의 매력을 부각하기 위한 수단이다. 당연히 근육질의 모나에게는 이들이 어울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앞에서는 모나를 경외하면서도 뒤에서는 그녀의 기괴한 외모를 비하한다. 그때, 여성성과 보디빌더로서의 정체성을 온전히 통합하지 못한 모나에게 닉이 나타난다. 젊고 잘생긴 닉은 그녀를 조롱하는 동시에 성적 대상으로 삼는 다른 남자들과는 달리, 모나를 순전히 성적 대상으로‘만’ 삼는 듯 보인다. 모나는 닉에게 완전히 매혹되고 자신이 닉의 파트너이자 약혼자라 확신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는 자기 여성성에 대한 불안(남자처럼 수염이 나 깜짝 놀라 면도하는 환상 혹은 실제 장면)이 낳은 망상일 뿐이었다. 닉은 모나와의 ‘사랑’을 부정하는 것을 넘어 그녀의 여성성까지도 부정한다. 모나를 뿌리치며 “I’m not a faggot”이라고 말하는 닉은 그가 모나를 ‘여성’으로 여기지 않음을, 다른 남자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기괴함’에 매료되었음을 보인다.


  모나는 자신에게 성적으로 추근대는 남자를 대체로 허용한다. 그들의 추근댐이 자신의 여성성을 담보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닉은 사랑을 배반했고 남자들은 그녀를 탐하면서도 뒤에서는 시시덕거리기만 한다. 모나는 어찌해야 할까? 영화의 마지막, 모나는 완벽에 가까운 보디빌딩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그 위풍당당한 퍼포먼스를 통해 모나는 말하는 듯하다. 전형적인 여성과 성적 호기심의 대상일 뿐인 기괴한 여성 사이에서, 나만의 여성성과 몸의 아름다움을 개척해 친밀성·사랑을 추구하기를 멈추지 않겠다고. 신체와 여성성의 디스토피아에서 자기 살 곳을 스스로 열어젖히겠다고.


비지터

The Visitor(‘매드 맥스’ 섹션)

브루스 라부르스/UK/2024/101min/X+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고 노란색과 빨간색의 원색 화면이 이어진다. 그러고는 식민주의자 쓰레기의 반인종주의적 내레이션이 시작된다. 증오가 부글부글 끓는 내레이션을 배경으로 캐리어 하나가 물결에 실려 온다. 캐리어에서는 내레이션이 저주를 퍼부은, 검은 피부의 이주자가 나온다. 흑인 남자는 몸을 꿈틀거리며 자신이 캐리어에 실리는 ‘물건’, ‘짐짝’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인간’임을 호소하는 듯하다.     


  남자는 한 부르주아 집안에 거처를 마련한다. 한껏 성애화된 존재로 재현되는 남자(이는 흑인 몸을 타자화하는 가장 뻔한 방식이다)는 바로 여기서부터(즉 기존 위계를 뒤틀어) ‘범성애자 혁명가’의 일을 시작한다. 남성 가정부, 쇼핑 중독 어머니, 트랜스젠더 딸, 게이 아들, 부르주아 아버지에게 삽입하며 계급과 성, 식민주의를 뒤집는다. 핵심은 체액이다. 남자의 오줌과 똥으로 만든 요리를 백인 부르주아 가족이 먹는 장면부터, 모든 삽입 섹스에서 분출되는 정액까지. 체액은 경계를 넘는다. 그래서 ‘(돈을) 소유한 자를 (섹스로) 소유’하고 식민 개척자를 역으로 식민화하는 도구일 수 있다. 온갖 ‘변태적인’ 섹스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그러니까, 체액이 뒤섞인다.     


  트랜스젠더 딸은 거칠게 삽입당하는 아버지를 보며 자위하고, 아들과 아버지와 흑인 남자가 한데 어울려 섹스한다. 더없이 완벽하고 달콤한 파괴의 연속이다. 피식민자의 체액에 역으로 ‘점령’당한 부르주아 백인 가족은 이로 인해 ‘해방’의 순간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이민자를 ‘선한 시민’으로 재현하는 데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이 영화는 그들에게 덧씌워진 모든 부정적 이미지를 흑인 남자의 몸에 가득 채운 후, 이를 체액으로 변환해 흩뿌려 수많은 위계를 뒤엎는다. 파괴적이고 적나라한, 때로는 경악할 만한 이미지의 연속 역시 영화가 ‘선량한 이민자’ 모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음을 보여준다. 내내 낄낄거리며 흑인 범성애자 혁명가 혹은 예수가 행한 기적을 목격했다. 나는 이런 영화를 보러 부천에 온다.          


스트레인지 달링

Strange Darling(‘부천 초이스: 장편’ 섹션)

JT 몰너/USA/2023/96min/19+     



  남자와 여자가 차 안에서 달콤한 말을 주고받는다. 여자는 안전한 원나잇 상대를 고르는 일의 어려움을 솔직하게 토로하고 남자는 그런 그녀에게 공감한다. 그런데 남자의 한쪽 다리, 바지 안쪽에는 총이 꽂혀 있다. 뒷좌석 아래에도 장총이 있다. 또 다른 장면에서는 여자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채 남자에게서 도망친다.     


  여기서 우리는 강간범/살인범 남자와 피해자 여성 그 이상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아니다. 여섯 개의 챕터로 나뉜 영화는 사건이 발생한 시간을 뒤섞는 것만으로도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는 점을 보인다. 뒤바뀐 시간을 제대로 배열하면 이렇다. 여자는 ‘Electric Lady’라 불리는 연쇄 살인마다. 다음 살인 대상으로 한 남자를 골랐는데 하필 그가 총을 가진 경찰이었을 뿐이다. 이렇게 피 튀기는 추격전의 서사가 완전히 새로 쓰인다. 경악스러울 정도로 영악한 여성 살인마와 속수무책으로 그에 놀아나면서도 종종 반격을 가하는 남성 경찰의 추격전은 만족스러운 몰입감을 선사한다. ‘시간’이라는 장치를 영리하게 활용한 스릴러다. ‘시간’과 ‘이야기’의 관계뿐 아니라 ‘진실’과 ‘재현’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사의 찬미

Death Song(‘스트레인지 오마쥬’ 섹션)

김호선/Korea/1991/161min/15+     



  SBS 드라마 〈사의 찬미〉를 보고 실망한 기억이 있다. TV 드라마 장르의 특성 때문인지 몰라도 식민지 조선 최초의 성악가이자 당대 최고의 가수 윤심덕, 뜻을 펴지 못해 좌절한 지식인 김우진의 정사情死를 너무 매끄러운 감정의 연쇄로만 다룬다는 아쉬움이었다. 두 사람이 겪은 고뇌의 크기와 혼란을 더 섬세하게 살펴보려면 드라마보다는 이 영화가 더 낫다. 윤심덕은 기존의 여성성을 체현하지 않은 ‘신여성’이었고 우진은 리더십과 재능을 가진 극작가였다. 즉 두 사람은 시대를 앞섰고, 그래서 시대와 불화했다. 그들이 사랑의 과정에서 자연스레 싹틔운 관계성은 하나하나가 당대 규범과는 어긋났고, 그들의 재능은 끊임없이 대중과 ‘타협’할 것을 종용받았다. 그리하여 좌절하고 낙담한 두 사람은 배에서 함께 뛰어내려 사랑(혹은 혁명)을 완수하기로 한다.

      

  영화에는 심덕과 우진 말고도 다른 정사 장면이 있다. 먼저 심덕을 짝사랑한 한 유학생 화가의 자살이다. 그는 심덕이 자신의 마음을 거절하자 자살했다. 또 한 번은 잠적한 우진을 찾으러 일본에 간 심덕이 한 마을에서 마주한 정사 사건이다. 간노 사토미의 《근대 일본의 연애론》에는 일본에서 정사가 하나의 사회 현상이었을 정도로 많은 연인이 함께 죽기를 택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근대의 질곡이 극심하던 시절, 정사는 최고의 저항이자 혁명이었을 것이다. 사랑이 이토록 정치적이었던 때가 또 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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