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야간 근무〉, 〈봉인된 땅〉
로비나 로즈/United Kingdom/1981/69min/DCP/Color/Experimental/12세 이상 관람가/Korean Premiere/‘시네필전주’ 섹션
시놉시스
밤, 작은 호텔의 로비에서 무표정한 안내 직원이 느긋하게 일을 하고 있다. 유령처럼 창백한 그녀의 얼굴에는 좀처럼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다.
▶냉기 깃든 무던함과 도시의 윤리
어느 작은 호텔 프런트에서 야간 근무를 하는 여성이 있다. 그녀는 차가운 혹은 멍한 표정이며 행동은 느릿하지만 정확하다. 허옇게 뜬 짙은 화장을 한 그녀는 흡사 유령처럼 보이기도 한다. 밤사이 호텔에는 여러 군상의 손님들이 들락거린다. 모두 제각기 호텔 직원만큼이나 이상한 구석이 있어 보이는 사람들이다. 아침이 밝는다. 프런트 직원은 호텔의 창문을 닦고 화장을 지운다. 그리고 희미한 웃음을 짓고 퇴근한다. 자신의 냉기 깃든 무던한 태도야말로 무수한 인간 군상이 오가는 대도시 호텔의 질서와 공존을 위한 것이라는 듯이. 어딘가 기괴하면서도 다정한 매력을 풍기는 매력의 영화다. 최근 복원되어 뉴욕영화제에서 상영되기 전까지는 불법적인 방식으로도 보기가 어려운 영화였다 한다. 로비나 로즈의 1981년 작.
마르바 나빌리/Iran/1977/90min/DCP/Color/Fiction/전체관람가/Asian Premiere/‘시네필전주’ 섹션
시놉시스
마을의 고요한 리듬 속에 깊은 저항이 숨겨져있다. 정부 사업으로 주민들이 이주하게 된 마을에서 한 젊은 여성이 결혼을 거부하고 자신의 내면 세계로 도피하려 하자 악령에 사로잡혔다는 오해를 받는다. 마르바 나빌리의 이 역사적인 데뷔작은 현재까지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이란 여성 감독의 작품이다.
▶〈잔느 딜망〉을 잇는 또 다른 여성영화의 고전, 걸작
이란의 한 시골 마을. 어느 평범한 가정의 일상적 삶과 그 가정에 속한 젊은 여성의 내적 혼란은 밀접하게 엮여 있다. 집안의 첫째 딸인 그녀는 동생들이 학교 간 사이 가사 노동을 하고, 남몰래 글공부를 한다. 학교 선생님은 그녀를 동생의 어머니로 오인하고, 동생은 비누로 머리를 감으라는 언니의 말에 머리는 샴푸로 감는 거라 배웠다며 말대답한다. 부모님은 왜 자꾸 청혼하는 남자들을 거절하냐며 그녀를 다그치고, 마을 사람들은 18살로 혼기가 꽉 찼는데도 계속 결혼하지 않는 그녀에게 ‘악령’이 씌었다고 확신한다. 이제 이 여성의 결혼은 온 마을의 관심사, 즉 ‘공적인 일’이 된다. 결국 퇴마사가 악령을 내쫓는 의식을 거행하고 그녀의 불만은 ‘사라진다’. 그녀는 마침내 결혼을 ‘수락’한다.
그녀가 결혼을 거부하는 이유는 ‘어머니의 삶’으로 진입하기 싫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보다는 ‘동생의 삶’을 살고 싶다. 신식 교육을 받고 인습과 전통에 구속되지 않는 삶 말이다. 그녀가 특히 동생들의 선생님에게 적개심을 보이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녀와 비슷한 세대의 여성인 선생님은 교육을 받고 전문적인 일을 수행한다. 하지만 자신은 그녀에게 ‘어머님’이라 불린다. 신도시 건설이 한창이고 마을 사람들은 이주를 앞두었지만, 전통에 유폐된 그녀는 자신이 속박된 현재도, 별로 달라질 게 없는 도시에서의 미래에도 모두 비관적이다. 그래서 ‘미친’ 듯 소리를 지르고 폭주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 내면의 혼란에 관심이 없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소금을 뿌리고, 마을의 여성 어른들은 악령에 씌인 게 확실하다고 말한다. 결말부의 결혼 ‘수락’은 체념의 다른 이름이다.
여성의 일상이라는 소재, 극적인 결말, 영화의 리듬 등 여러 측면에서 샹탈 아커만의 1975년 작 〈잔느 딜망〉이 연상되는 작품이다. 〈봉인된 땅〉을 연출한 마르바 나빌리는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했으나 영화 일이 없어 TV 시리즈 〈Ancient Fairy Tales〉를 제작하던 중 6일간 몰래 이 영화를 촬영한 후 미국으로 필름을 챙겨 떠났다고 한다. 검열당할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이란 혁명 2년 전에 제작된 이 영화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이란 여성 감독의 작품이다. 하지만 이란에서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상영된 적이 없는 작품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장소에서 영화를 만든 두 감독이 놀랍도록 비슷한 질감으로 같은 문제의식을 펼쳐 보였다는 점, 심지어 두 영화 모두 걸작 수준의 높은 완성도를 갖추었다는 점이 굉장히 놀랍고 흥미롭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을 통해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에 기자로 초청받아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