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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의 삶과 감정에 구체적 질감을 부여하는 두 영화

26회 전주국제영화제 〈누가 울새를 죽였나?〉, 〈에디 앨리스: 리버스〉

by re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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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울새를 죽였나?/Who Killed Cock Robin?

트래비스 윌커슨/United States/2005/70min/DCP/Color/Fiction/15세 이상 관람가/‘특별전: 가능한 영화를 향하여’ 섹션


시놉시스

트래비스 윌커슨의 첫 장편 <누가 울새를 죽였나?>는 몬태나주 뷰트 지역을 다룬 그의 다큐멘터리 <노동 운동가, 그를 살해한 이유>(2002)가 가진 서정적인 선동의 힘을 이어받는다. 영화는 미래가 없는 같은 마을에서 정처 없이 떠도는 한 10대의 삶을 그린다. 그의 삶은 소매치기, 버려진 광산에서 시간 보내기, 그리고 어두운 고용 전망과 노동 운동의 쇠퇴로 인한 고군분투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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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소되지 못한 노동계급의 울분에 관한 영화적 이미지


영화를 보며 브루노 뒤몽의 영화 〈예수의 삶〉(1977)과 제니퍼 M. 실바의 책 《사라질 수 없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예수의 삶〉은 일자리가 없는 프랑스 시골 마을에서 남성 청년들이 겪는 박탈감과 혼란의 문제를 마을의 황량한 경관 위에 인상적으로 펼쳐낸 영화다. 《사라질 수 없는 사람들》은 황폐해진 미국 동부의 탄광촌 콜브룩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마약, 범죄, 가난에 시달리며 생의 가능성을 빼앗기고 있는지를 사회학적으로 탐구한 책이다.


〈누가 울새를 죽였나?〉 역시 같은 문제의식을 가졌다. 몬태나주 뷰트는 망한 도시, 자본이 떠난 도시다. 광산은 문을 닫았고 마을에서는 잡일을 구하기조차 어렵다. 뷰트에 사는 주인공 청년 배럿에게는 두 명의 친구가 있다. 한 명은 병원에서 사무원으로 일하는 트로츠키주의자 딜런이고, 다른 한 명은 광산 일을 그만둔 후 임대업을 하는 찰리다. 세 사람은 종종 모여 맥주를 마시며 마을이 이 모양 이 꼴이 되도록 방치한 자본에 대한 성토, 노조의 무력함에 대한 토로, 척박한 현실에서의 변혁 가능성 등에 대한 푸념 및 논의를 이어간다.


그러나 우정에 금이 간다. 배럿이 맥주 한 캔을 훔쳤다가 구금되고 나온 이후다. 찰리는 배럿이 임대료를 내지 못하자 자신도 먹고살아야 한다며 그를 쫓아낸다. 배럿은 상대적으로 형편 좋은 딜런이 자신과 함께 찰리를 비난해주지 않자 배신감에 휩싸인다. 황폐화된 마을에 남은 노동계급의 마지막 연대가 깨진다. 배럿의 마음속에는 점차 울분이 쌓인다. 배럿에게 상상 가능한 삶의 지평이 극도로 협소해졌기에, 그는 또다시 범죄에 휘말린다.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배럿의 항의에 문을 걸어 잠근 찰리가 말한다. 도둑질은 너의 선택이었다고. 이렇게 배럿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반복하며 점차 망가진다. 영화는 배럿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굉장히 섬세하고 감각적으로 포착하며 그의 고통에 구체적 현실의 질감을 부여한다. 배럿의 해소되지 못한 울분은 불과 10여 년 후 등장할 트럼피즘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지도 고민하게 된다.


〈누가 울새를 죽였나?〉는 연대하지 못하고 저항하지 못하는 노동계급의 울분을 놀라운 방식으로 포착했을 뿐 아니라, 의도치 않았으나 시간이 흘러 울분이 어디로 향할지에 대한 질문까지 던지는 무척 인상적인 영화다. 비평가이자 프로그래머인 데니스 림은 선댄스영화제 역사상 가장 간과된 영화 10편 중 하나로 이 영화를 꼽았다.




에디 앨리스: 리버스/Edhi Alice: REVERSE

김일란/Korea/2024/130min/DCP/Color/B&W/Documentary/12세 이상 관람가/Asian Premiere/‘코리안시네마’ 섹션


시놉시스

에디는 1987년에 태어나 서울에서 LGBTQIA 청소년들을 위한 상담사로 일하고 있다. 2022년에 그녀는 태국으로 가서 성별 수술을 받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자신의 신체가 여성으로서의 정체성과 일치하면 자신이 평화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대신 계속해서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했다. 앨리스는 영화의 조명 감독으로 자신의 몸과 불화를 겪고 있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춤을 통해 자신의 몸으로 더 많이 표현하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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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뚱그려지지 않은, 본질로 환원되지 않는 트랜스 여성 서사


두 MTF 트랜스젠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 영화는 ‘논쟁적’인 장면으로 시작한다. 트랜스 여성 에디가 대중목욕탕을 이용하는 장면 말이다. 여대 학생들이 트랜스 여성과 같은 학교조차 다니지 못하겠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트랜스 혐오의 시대에, 이 장면은 ‘트랜스 여성은 여성인가’라는 쓸데없는 질문에 자신의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겠다고 분명하게 선언하는 듯하다.


영화는 먼저 청소년 퀴어 상담가 에디의 이야기를 펼쳐낸다. 트랜스 여성으로의 정체화, 변희수 하사 사건이 남긴 상흔, 가족들과의 관계, 외부 성기 수술 및 법적 성별 정정까지. 트랜스 여성으로 정체화하고 그녀가 통과해온 시간을 차근히 짚는 것이다.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성별 정정 수술 이후 인공 질이 그녀에게 가져다 준 신체 감각의 변화에 관한 장면이었다. 수술 시, 당사자는 인공 질의 깊이를 선택할 수 있다. 수술 후, 당사자는 인공 질이 달라붙지 않도록 딜레이션(dilation)을 해야 한다. 딜도를 삽입해 질을 확장‧유지하는 작업이다. 에디는 외부 성기 수술을 마친 다른 트랜스 여성과 달리 딜레이션이 유독 고통스럽다. 새로 얻은 질은 그녀에게 쾌락과 고통의 감각을 새롭게 정립할 것을 요구하고, 이 변화하는 몸의 감각으로 에디의 젠더 정체성은 고유성을 획득한다. 한편 에디가 샤워할 때 상처 난 질에서 흘러내리는 피는 시스젠더 여성의 생리를 연상시켜 외부 성기 수술로 더한층 확고해진 그녀의 젠더 정체성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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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다른 MTF 트랜스 여성이 지나온 시간이 있다. 이 영화의 조명감독인 앨리스의 시간이다. 에디가 외부 성기 수술을 가장 마지막에 한 것과 달리, 자신의 남성 성기를 견디기 어려웠던 앨리스는 외부 성기 수술부터 시작해 젠더 정체성을 재정립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춤을 통해 자신을 더 깊이 탐구해보고 싶다는 오랜 욕구가 있다. 트랜스 여성으로서 앨리스의 개인사가 전해진 후, 영화는 그녀가 춤을 배우고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을 담는다. 일종의 퍼포먼스 기획, 연출의 과정이다.


앨리스가 노동하는 장면, 춤을 연습하고 공연을 준비하는 몇몇 장면은 관객을 영화의 첫 장면으로 다시금 이끈다. 에디가 대중목욕탕을 이용하는 장면은 장소 및 배우 섭외로 연출된 장면이었음이 드러난다. 영화에는 앨리스가 영화 현장에서 조명감독으로 노동하는 장면이 몇 번 더 나온다. 에디가 딜레이션을 하는 과정 역시 정교하게 카메라의 각도를 조절해 연출한 장면이었다. 그녀는 ‘카메라에 찍힌 건 다 구라’라고 말한다. 여기서 ‘구라’는 모든 만들어진 것을 가리킨다. 어쩌면 ‘구라’는 춤 퍼포먼스를 기획하는 앨리스의 여정, 두 트랜스 여성의 삶을 담아내는 〈에디 앨리스: 리버스〉의 여정, 무엇보다 수행적(performative)으로 구성되는 젠더 정체성의 여정에 관한 가장 적확한 설명일지도 모르겠다. ‘연출된 현실’과 ‘자연스러운 현실’의 경계를 허물고 포개며 젠더 정체성이 본질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힌다는 점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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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 앨리스: 리버스〉는 두 트랜스 여성이 지나온 서로 다른 시간의 궤적을 보여줌으로써 획일화되지 않은 소수자 정체성 서사를 제시한다. 동시에 젠더란 기획되고 구성되는 것이라는 퀴어 페미니즘의 주요 명제를 ‘영화적 연출’의 방법론과 연계해 제시하기도 한다. 트랜스젠더의 서사를 폭력적인 방식으로 뭉뚱그려 혐오하는 경향이 만연한 지금, 우리에게 맞춤한 영리하면서도 진중한 영화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을 통해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에 기자로 초청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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