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제51회 서울독립영화제 후기, 첫 번째

〈겨울날들〉〈어느 뻣뻣한 하루〉〈리틀 아멜리〉〈여름의 카메라〉

by rewr
서독제 포스터.png


겨울날들

최승우 | 2025 | Fiction | Color | DCP | 84min

본선 장편경쟁

%EA%B2%A8%EC%9A%B8%EB%82%A0%EB%93%A4_%EC%8A%A4%ED%8B%B8_5.jpg?type=w1


▶삶의 시간성과 공간성, 문법과 리듬


농촌과 도시의 시간성을 대조하고, 전자를 통해 혼란에 빠진 청년에게 구원을 선사한 최승우 감독의 전작 〈지난 여름〉을 기억한다. 두통에 시달리고 헛구역질을 하던 주인공 민우는 직선으로 내달리는 선형적 시간성 대신 농촌의 순환하는 시간성에 접속하며 마침내 평온을 찾는 듯 보인다.


이번 영화 〈겨울날들〉에서, 민우는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주한다. 민우는 번듯한 건물이 서 있고 여러 개의 차선이 가로지르는 화려한 서울역을 지나, 굽이굽이 계단을 올라야 하는 어느 허름한 방으로 들어간다. 이후 민우뿐 아니라 자기 전 약을 먹는 여자, 편의점 도시락을 데워먹는 남자 등 민우 이웃의 일상이 민우의 일상과 함께 불연속적으로 제시되고 포개진다. 여기에 민우가 매일 오르내리는 가파른 계단에서 일하는 택배 노동자, 만원 버스와 지하철 안 풍경이 교차한다.


직접적인 개연성 없는 장면의 서로 다른 반복으로 구성된 이 영화에서, 유독 자주 나오는 장면이 있다. 민우의 집이 있는 가파른 계단, 철거 노동자들이 작업하는 현장과 그들의 노동, 건물과 자동차에서 나오는 불빛으로 밝게 빛나는 서울의 야경. 이들은 민우와 그 이웃의 일상과 어떻게 교차하는가? 가파른 계단과 도시의 야경은 도시의 화려함을 채우는 개개의 불빛이 가진 구체적 일상을 상기시킨다. 서울 곳곳에서 진행 중인 철거는 몇몇 물건들로 조금씩 채워지는 민우의 방과 은근한 대조를 이룬다. 도시라는 공간과 그곳에서 소박한 삶과 노동을 이어가는 노동자들의 서사는 하나가 또 다른 하나의 이유가 되어 서로의 파동을 주고받는다.


대사가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 이 영화를 보며, 농촌의 시간성을 품은 민우가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도시에서의 삶을 이어가는지가 무척 궁금했다. 그러나 말로 듣지 않아도 전해지는 분위기가 있다. 나는 민우의 표정과 일상이 차분하고 단단하다고 느꼈다. 두통과 헛구역질 없이 단단하게 꾸려나가는 소박한 도시 노동자의 일상. 그런 그의 삶이 다른 사연을 가진 이웃의 삶과 포개지고 도시의 일부로 재현되는 이 영화의 ‘불친절한’ 재현은 〈지난 여름〉에 이어 삶의 시간성과 공간성의 문법과 리듬에 관한 인상적인 관찰로 또 한 번 내게 다가왔다.




어느 뻣뻣한 하루

소라 네오 | 2025 | Fiction | Color | DCP |11min

해외초청


%EC%96%B4%EB%8A%90-%EB%BB%A3%EB%BB%A3%ED%95%9C-%ED%95%98%EB%A3%A8_%EC%8A%A4%ED%8B%B8_2.jpg?type=w1


▶상처의 근원에 카메라를 가져다 대면


어느 날 자고 일어난 뒤 목에 엄청난 뻐근함을 느끼는 여자. 그녀는 어린 딸의 도움 없이는 혼자 옷을 갈아입지도 못할 만큼의 통증 때문에 힘겨운 하루를 보낸다. 그런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보지만, 기억과 꿈, 고통이 계속 현실로 틈입해 들어와 끝내 혼절하고 짓눌린 듯한 자세로 길바닥에 널브러진다. 영화의 마지막, 그녀 무릎의 상처에 카메라가 가까이 가고 상처가 클로즈업되는데, 이 카메라 무빙에는 마치 그녀 상처의 근본이 무엇인지 카메라를 가까이 가져다 대면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담긴 것만 같다. 〈해피엔드〉를 연출한 네오 소라의 단편.




리틀 아멜리

메일리스 발라데, 리안 조 한 | 2025 | Animation | Color | DCP | 78min

해외초청


%EB%A6%AC%ED%8B%80-%EC%95%84%EB%A9%9C%EB%A6%AC_%EC%8A%A4%ED%8B%B8_2.jpg?type=w1


▶세 살 아기의 절박하면서도 황홀한 정체성 확립기


시선과 초점이 없는, 즉 생기가 없는 아이였던 아멜리는 세 번째 생일에 새로 태어난 듯 인간 아기가 갖출 법한 모든 것을 단번에 깨닫는다. 그리고 이 각성을 시작으로, 정체성과 성장의 여정을 이어간다. 일본에서 태어난 벨기에 소녀 아멜리는 일본인 유모 니시오에게 큰 애착을 느끼지만 사실 니시오는 서구인을 원망하는 일본인 집주인이 아멜리 가족에게 보낸 일종의 스파이이기도 했다. 아멜리는 이 사실을 알고 혼란에 빠진다. 자신이 일본인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면? 니시오와의 관계가 진실한 것이 아니라면? 세 살의 아멜리는 자살에 가까운 위험을 무릅쓸 정도로 혼란스러운 시간을 통과한다. 그리고 이 혼란 끝에 복잡하게 얽힌 관계를 거스르는 진정한 애정과 가족의 사랑에 기반한 정체성을 확립한다. 화려하고 몽환적이면서도 다정한 느낌의 작화가 돋보이는 애니메이션.




여름의 카메라

성스러운 | 2025 | Fiction | Color | DCP | 83min

페스티벌 초이스 장편 쇼케이스


%EC%97%AC%EB%A6%84%EC%9D%98-%EC%B9%B4%EB%A9%94%EB%9D%BC_%EC%8A%A4%ED%8B%B8_3.jpg?type=w1


▶서로 다른 성별과 세대의 두 퀴어가 맺는 관계성, 조금 더 촘촘하고 눅진했더라면


아빠가 사고로 사망한 후, 여름은 그가 남긴 카메라를 들지 못했다. 축구부 연우를 만나기 전까지. 연우에게 한눈에 반한 여름은 아빠의 카메라를 다시 들고 연우의 모습을 담아낸다. 그런데 아빠의 카메라에는 여름이 알지 못하는 남자의 옛 사진이 있다. 남자의 이름은 마루. 여름은 이내 그가 아빠 또래의 남성이라는 것, 나아가 그가 한때 아빠의 동성 연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름은 혼란스럽지만 동시에 마루에게 괜히 기대고 싶기도 한다. 자신 역시 동성인 연우와 어느새 연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름은 연우와의 관계에서 고민이 생길 때마다 마루를 찾고, 마루도 조금씩 여름에게 마음을 열며 두 사람은 일반적이지 않은 우정의 관계를 조금씩 쌓아간다. 그리고 어쩌면 아빠가 사고가 아닌 자살로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른다는 짐작이 든 어느 날, 연우가 자신을 떠나가던 어느 날, 여름은 한 번의 계절을 넘어 조금은 더 성숙해진다.


이성애 결혼을 한 남성 동성애자, 이른바 ‘유부 게이’ 캐릭터를 들여와 레즈비언 소녀와 우정을 쌓게 하는 서사의 도전은 신선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케미가 그 신선함에 부합하지 못하는 건 아쉽다. 좌절된 사랑의 경험을 가진 서로 다른 세대와 성별의 두 퀴어는 내내 서로 겉도는 느낌이다. 두 사람이 왜 만났는지까지는 납득이 가는데, 왜 계속 만나는지에 대한 이야기 밀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조금 더 근사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을 영화라 그런지 계속 아쉬움이 남는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