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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Aug 04. 2021

이준석은 로버트 드 니로가 될 수 있을까?

영화 〈택시 드라이버〉(1976)로 보는 이준석 현상

  영화 〈택시 드라이버〉는 빛 번짐으로 흐릿해진 뉴욕의 밤거리를 비추며 시작된다. 이는 베트남전쟁 참전 후 미국에 돌아온 트래비스의 혼란을 대변한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트래비스는 뉴욕의 밤거리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길거리가 '쓰레기'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한다. 트래비스는 호모, 창녀, 마약상, 남창들을 쓰레기라 부른다. 그는 세상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불면증에 시달린다. 어차피 밤에 잠을 못 자니 돈이라도 벌자고 시작한 심야 택시 운전을 마치고는 뒷좌석에 엉겨 붙은 정액과 피를 닦는 게 일상이다.


  이 극한의 혼란 속에서, 트래비스는 외로움을 느낀다. 그는 사람들이 온기를 잃고 냉담해진 것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던 중 벳시를 만난다. 베트남 전쟁을 비판하고 소수를 위한 정치를 종식하자는 대선후보 팰런타인의 캠프에서 일하는 그녀는 백인이고, 미인이며, 상냥함을 잃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모두가 진실된 무언가를 상실한 뉴욕에서, 트래비스는 벳시가 인간다움을 잃지 않은 마지막 존재임을 확신하고 그녀에게 다가간다.


데이트하는 트래비스와 벳시. 〈택시 드라이버〉 스틸컷.


  시작은 좋았으나 결과는 형편없었다. 벳시는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트래비스에게 마음을 열지만, 그가 첫 데이트에 포르노 극장을 데려가자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트래비스는 당황스럽다. 포르노 극장은 그에게 위안과 위로를 주는 뉴욕의 유일한 공간이었다. 그는 자신이 느꼈던 것을 벳시와 함께 느끼고 싶었기 때문에 포르노 극장을 데이트 장소로 골랐다. 따뜻한 무언가가 둘을 감싸주어 고양시켜줄 것을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트래비스의 기대는 빗나간다. 당연한 일이다. 길거리의 존재들을 쓰레기 취급하는 그릇된 현실인식을 토대로 한 트래비스의 기대가 현실에 적중할 리가 없다. 벳시에게 버림받은 후, 트래비스는 다시 우울하고 음울한 세계로 돌아와 벳시에게서 되돌아온 꽃을 모두 태워 버린다.


  트래비스는  벳시의 빈자리를 기괴한 사명감으로 채운다. 그는 '정의'를 구현할 힘을 갈구한다. 병들고 더러운 도시를 치유하고 정돈하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위해 매일 운동을 하고 총과 칼을 몸에 달고 다닌다.


  과대망상에 빠져 자경단이 된 트래비스의 눈에 어린 성매매 여성 아이리스가 들어온다. 그는 아이리스를 착취하는 남성 포주들에게 총과 칼을 난사하여 아이리스를 구출한다(총과 칼이 남성 성기의 가장 오랜 은유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사건은 언론의 관심을 받고 트래비스는 영웅이 된다. 영화의 마지막, 벳시는 자신이 트레비스를 오해했음을 후회하며 그에게 돌아온다. 〈택시 드라이버〉는 도덕적 공황에 시달리는 남자가 사이비 영웅으로 등극하는 과정과 남성 영웅을 위한 보상물로 취급되는 여성의 문제를 설득력 있게 결합하여 풍자한 수작이다.


편집증적 망상에 사로잡힌 트래비스. 〈택시 드라이버〉 스틸컷.


  영화를 보며 울적했던 건,〈택시 드라이버〉의 트래비스를 역사 속 인물 취급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로버트 드 니로가 완벽하게 연기해 낸 트래비스는 2021년 한국에서 부활했다. 능력주의를 표방하는 한국 보수 야당의 당대표 이준석과 그의 추종자들에게서 사이비 남성 영웅이었던 트래비스의 서사가 겹쳐 보였다.


  국민의힘 당대표 이준석의 화려한 스펙·'능력'과는 별개로, 그가 대변하는 건 신자유주의 경쟁사회에서 도태되고 탈락한 '이대남(20대 남성)'의 분노다. 이준석은 '국민'을 대변한다는 '정치의 본령'을 충실히 이행한다는 명목으로 젠더 갈등을 조장하고 젠더 폭력을 묵인하는 말과 행동을 일삼아왔다. 그에게 가장 적극적으로 말을 거는 건 이대남이고, 이준석은 이대남의 목소리를 확대 재생산한다.


  정치인 이준석을 가능케 한 그의 추종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들은 트래비스처럼 전쟁을 겪지 않았다. 하지만 남성 가부장에게 자연히 따라오던 경제력과 사회적 권위가 보장되지 않을 것임을, 아버지들이 누렸던 것들을 획득하려면 무한히 경쟁해야 함을 깨닫고 불안에 휩싸였다. 이는 도덕적 공황으로 이어졌다. 


  트래비스가 공연히 '쓰레기' 탓을 하듯, 트래비스의 후예인 한국의 이대남은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가 자신의 파이를 빼앗았다는 피해망상에 휩싸였다. 파이를 키우는 어려운 방법을 고민하기보다는,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는 약자를 손가락질하는 쉬운 대안을 선택했다. 가장 위태로운 삶의 조건 속에서 별다른 안전망 없이 근근이 생존을 이어오고 있던 자들이 되레 이대남이 마땅히 누렸어야 할 특권을 도둑질했다고 욕먹고 있는 것이다.


이준석은 트래비스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이준석은 아무런 윤리적 당위가 없는 이대남들의 싸움에 총대를 매고 뛰어들었다. 트래비스가 아이리스를 구한 것처럼 '영웅적' 행위가 동반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동시대의 아이리스에게 '공정한 경쟁'을 하라고 요구한다. 그것이 모든 문제를 치유해줄 거라는 듯이. 


  이준석이 트래비스처럼 영웅이 될 수 있을까? 답은 영화와 현실의 경계 그 어딘가에 있다. 트래비스의 편집증적 광기와 과잉 자의식은 우연한 계기를 만나 영웅의 조건이 되었다. 영웅 되기의 결정적 계기가 우연한 촌극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즉 트래비스가 영웅이 된 건 '영화적 사건'에 불과하다. 그로 인해 초래된 아이러니한 결과는 풍자의 조건이 된다.


  하지만 이준석과 이대남들은 영화 주인공이 아니다. 그들에겐 자의식 과잉이 영웅됨으로 이어지는 행운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망상적 자의식으로 우연히 영웅이 되어 벳시라는 보상을 획득한 〈택시 드라이버〉의 영화 장르가 블랙 코미디라면, 사이비 영웅 행세조차 없이 거들먹거리는 이준석과 이대남들이 마주할 현실의 결과는 파국이다.


  모든 문제에 남 탓으로 일관하는 자의식 과잉인 남자가 주인공일 수 있는 건 영화뿐이다. 이준석과 그 추종자들이 마주한 현실은 영화가 트래비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들에게 벳시를 안겨주지 않을 것이다. 이미 많은 통계에서 그들에게 돌아올 벳시가 없음이 드러나고 있다. 이준석 현상은 한국 정치의 비극이자 남성성의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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