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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wr Oct 05. 2021

여성운동과 아카이브

다큐멘터리 〈짐승〉(2021)

  60만 시간. KBS에 아카이브로 보관된 영상의 총 길이다. 60만 시간 중 어떤 장면을 끌어와 어떻게 조합할지는 연출자의 몫이다. 〈짐승〉*의 정재은 감독은 1994년 4월 1일 시행된 성폭력특별법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담기로 했다. 그런데 몇 가지 난관에 부딪혔다. 첫 번째는 자료가 너무 많아서였다. 60만 시간을 50분의 다큐멘터리로 추리는 일의 설렘 혹은 막막함. 그러나 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정재은 감독은 한 강연에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아카이브 사용이 익숙해져 이 어려움이 줄었다고도 했다.     


  진짜 문제는 ‘말하는 여자’의 부재였다. TV에는 말하는 여자가 ‘없었다.’ 여성들의 목소리를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 정재은 감독은 고민 끝에 드라마에 주목했다. 적어도 드라마에서는 여성이 ‘말할 수 있는’ 존재였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터무니없는 여성 캐릭터 묘사도 많지만, 이 또한 시대를 기록하는 아카이브의 관점에서는 의미 있는 일이었기에 드라마 장면을 다큐멘터리에 포함하기로 한 것이다.     


다큐멘터리 〈짐승〉 스틸컷


  다큐멘터리 〈짐승〉은 그렇게 탄생했다. 〈짐승〉은 김혜수 배우가 새아버지가 될 남자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1986년의 드라마 〈젊은 느티나무〉의 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로부터 성폭력특별법이 제정되기까지 한국사회가 어떤 일을 겪어왔는지를 뉴스, 토론회, 드라마 속 여성의 말과 행동을 교차시키며 조명해 나간다. 〈짐승〉은 아카이브가 역사의 단순한 나열에 그친다는 피로감, 규범적 질서 구축의 도구로 작동할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한 완벽한 반례다. 한국사회가, 한국의 여성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를 생생히 증언하는 〈짐승〉을 보며 ‘다른 관점’의 아카이브가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절감했다.     


  〈짐승〉의 의미는 이중적이다. “저는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 짐승을 죽였습니다.” 1991년, 김부남이 21년 전에 자신을 성폭행한 남자를 죽인 후 한 말이다. “더 이상 짐승 같은 생활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1992년, 13년간 자신을 강간한 의붓아버지를 남자 친구인 김진관과 함께 살해한 김보은의 말이다. 가해자의 야만성과 피해자의 상처를 동시에 표상하는 ‘짐승’이라는 발화는 단죄해야 할 범죄와 보듬어야 할 상처를 같은 단어로 포괄하는 우리사회의 빈약한 언어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우리의 언어는 더 치밀해져야 한다.     


  정치한 언어를 획득하려면 싸워야 한다. 법은 김부남, 김보은이 피해자일 땐 외면하더니, ‘가해자’가 되자 심판하겠다고 나섰다. 사람들은 오랜 시간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다가 사건이 발생하자 피해자의 이름으로 사건을 부르며 호들갑을 떨었다. 앞의 두 사건과 더불어 ‘서울대 신 교수 성희롱 사건’ 등을 계기로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법‧사회‧언어의 무게추를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옮겨오기 위해 부단히 싸웠다.** 이 싸움은 1994년 제정된 성폭력특별법이라는 성과로 이어졌다.     


  황보명륜의 인터뷰가 특히 인상 깊었다. 재판받는 김보은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의 손이 나아가 그의 등에 손을 대는 느낌이 들었다는 그녀의 말은 앞의 세 사건이 사건의 당사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여성의 일이었음을, 드라마는 문제적 재현으로나마 이 공감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역할을 수행했음을 환기한다.   


다큐멘터리 〈짐승〉 스틸컷


  더불어 〈짐승〉을 보며 여성학자들이 수십 년 전에도 수준 낮은 남성 패널의 어처구니없는 성희롱에 맞서 품위를 지키며 싸워왔음 또한 알게 되었다. “여자에게는 아이를 먹일 젖이 달렸다. 때문에 아이를 키우기 위해 집에 있어야 한다.” “여자는 남편을 잘 만나면 된다.” “여자가 취업하면 남자가 놀게 된다.” “여성이 너무 떠들썩하다. 흥분했고, 전투적이며, 드세다.” “안 예쁜 사람한테 성희롱하는 게 무슨 재미가 있느냐.” “남녀 관계는 우주적 동반자 관계인데 고발 관계로 갔을 경우 적대감이 생긴다.” 이런 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공중파 방송에서 언급되던 시절이었다. 코웃음이 나오기도 하지만, 이 중 일부는 싸우는 여자들이 지금도 듣는 말이라는 점에서 아찔해지기도 한다. 역사는 어떤 측면에서는 ‘진보’했지만 또 다른 영역에서는 1987년 이후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 이 통쾌한 승리와 씁쓸한 퇴보를 기록하고 전달하는 게 아카이브의 역할이다.


  한국에서 근대적 여성운동이 시작된 게 벌써 한 세기 전이다. 더 이상 ‘처음’은 없다. 모든 게 ‘조금 다른 반복’이다. '우리가 처음이다'라는 젊은 세대 페미니스트들의 발언은 수정되어야 한다. 가려지고 지워졌지만, 우리에게도 계보는 있다. 〈짐승〉이 나이 든 이들의 싸움과 젊은이들의 싸움이 포개지는 하나의 계기이길 바란다. 〈짐승〉은 아래 링크에서 볼 수 있다.


https://vod.kbs.co.kr/index.html?source=episode&sname=vod&stype=vod&program_code=T2019-0296&program_id=PS-2020155570-01-000&broadcast_complete_yn=&local_station_code=00&section_code=05#more    



*‘KBS 아카이브 프로젝트 모던코리아’는 KBS의 영상 아카이브를 토대로 한국사회의 ‘모던’을 되돌아보고자 기획된 다큐멘터리 시리즈다. 〈짐승〉은 시즌 2의 3회 다큐멘터리다.    


**세 사건이 모두 제도적 민주화가 달성된 1987년 이후의 일이라는 게 흥미롭다. 이는 여성들이 제도적 민주화 이후 일상의 민주화로 민주주의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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