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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LT Jul 13. 2020

선전, 덩샤오핑의 꿈이 만든 도시

■ 그 주재원의 서글픈 기억들 (5편 중국 여타 도시-13)

해외 주재 근무 14년간의 기억을 적은 이야기

Paris, Toronto, Beijing, Guangzhou, Taipei,

Hong Kong, Macau

그리고 다른 도시들에서의 기억......



중국 여타 도시



13. 선전, 덩샤오핑의 꿈이 만든 도시


2005~6년 당시 중국 광둥성에서는 농촌은 말할 것도 없고 도시에서도 토박이 광둥인 간에는 서로 광둥 지방의 언어인 광둥어를 사용했다. 그런데 광둥성의 최대 도시 중 하나인 선전(深圳)에서만은 그렇지 않고 중국 표준어인 보통화만 통용되었다. 왜 그랬을까?




중국 대도시 중에서 인당 GDP가 가장 높은 도시는 상하이 또는 베이징이 아니라 의외로 중국의 남부에 있는 바로 이 선전이라는 도시다. 2018년 선전의 인당 GDP는 2만 7천 달러로 그해 한국의 인당 GDP 3만 1천 달러와 별로 차이가 없었다. 총경제 규모도 2019년 기준으로 이미 인근 홍콩의 경제규모를 추월했으며 인구도 홍콩의 약 2배로 1천300만 명이 넘는다.


(선전 경제규모 관련 기사)

https://www.mk.co.kr/news/world/view/2019/02/120360/


또 수많은 외국계 IT 기업의 진출로 선전이 중국 하이테크 산업의 성지와 같은 도시로 인식되면서, Huawei, Konka, Tencent, BYD, Skyworth, ZTE 등과 같은 중국의 글로벌 대기업들도 베이징이나 상하이가 아닌 선전에 본사를 두고 있다. 선전의 거리도 미국의 여느 대도시와 비교해도 결코 지지 않을 만큼 초고층 빌딩가득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변모했다.


(선전 도심 모습)

https://blog.naver.com/lhkny96/220450021229


선전이 이처럼 여러 가지 면에서 현재는 중국 최고 도시가 되어있지만, 중국이 덩샤오핑 주도하 개혁개방 정책을 본격 추진하기 시작하면서 선전을 '경제 특구'로 지정할 1980당시만 해도 선전은 인구 불과 30만 명의 해안가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실제로 선전(深圳)이란 지명을 봐도, '圳'이란 한자는 농사를 짓는 '논 도랑'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앞에 깊다는 뜻을 가진 '深'이란 한자가 있으니, 결국 선전이라는 지명은 원래 '깊은 논의 도랑'이라는 의미인 셈이다.  


홍콩을 능가하는 초고층 건물이 즐비한 현재 선전의 화려한 모습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이름인데, 그만큼 과거에는 선전이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전과 가까운 인근 광저우의 인구는 1천5백만으로 선전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하지만 1980년 선전의 인구가 불과 30  수준이었을 당시 광저우 인구는 이미 약 600만 명 수준에 달하고 있었다는 사실 봐도 선전이 개혁개방 경제특구로 지정된 이후 얼마나 급속하게 성장했는지를  수 있다.


(1980년 경제특구 지정 이전의 선전 모습)

https://m.sohu.com/a/378424319_120073393/?pvid=000115_3w_a


결국 선전은 경제특구로 지정되면서 새로 탄생한 도시라고 도 과언이 아니다. 즉 원래 그곳에 살던 토박이들은 거의 없고, 경제특구가 되면서 공장을 가동하기 위해서 들어왔던 외국인들그렇게 들어선 공장의 일자리를 찾아 중국 전국 방방곡곡에서 급속하게 몰려 들어온 중국 외지인들이 선전 인구의 대부분으로 90%에 달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도시 인구의 구성원 대부분이 토착 광둥인이 아니라 광둥어를 전혀 모르는 중국 타 지역 출신 외지인이다 보니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선전 사람들은 광둥어가 통용되는 광둥성 안에 있으면서도 당연히 광둥어를 구사하지 못하 중국 표준어만을 사용했던 것이다.


(표준어가 통용되는 선전 관련 기사)

https://www.hankyung.com/international/article/2018012398751




선전은 광저주 법인 관할이고 또 광저우에서 멀지도 않지만 정작 광저우 법인 근무 시절에는 두 번 정도밖에 가본 적이 없다. 반면 나중에 중국 본토를 떠나 홍콩 법인에서 근무할 때는 홍콩과 선전이 붙어있어서 워낙에 가깝다 보니 오히려 훨씬 더 자주 방문해 한두 달에 한번 정도는 꼭 방문했었던 것 같다.


선전과 홍콩은 같은 중국이지만 홍콩이 자치권을 가진 특별 행정구이기 때문에 외국인이 접경을 통과할 때는 여권 심사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하지만 홍콩섬의 내가 살던 아파트 근처에서 버스를 타도 불과 40분이면 선전에 도착할 만큼 가까워 휴일에는 종종 선전에 있는 옛 직장 동료 등 친구를 만나러 다녀오곤 했었다. 만일에 홍콩에서 거주했던 지역선전과 바로 붙어 있는 홍콩의 북부 지역이었다면 홍콩에서 선전까지는 10여 분도 안돼 도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홍콩에서 선전 이동 절차)

https://blog.naver.com/sekchi/220062833035


홍콩에서 근무하면서 그렇게 선전에 자주 가다 보니 선전의 입국 심사를 거치면서 매우 특이한 경험을 한 적도 있었다.


하루는 입국 심사대 직원이 너무도 이상 표정으로 유심히 내 얼굴을 한참 바라보더니,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상사를 불렀다. 그리고 뭔가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속삭이더이제는 그 상사 또한 그 직원처럼 나를 한동안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갑자기 따라오라고 했다.


통관하면서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은 처음이고 게다가 법대로 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한 나라가 중국인지라 순간 겁이 덜컥 났다. 하지만 그들이 지시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고 나는 그를 따라갔다. 그는 정밀 사진 촬영 장비 같은 기계가 있는 방으로 나를 데려가더니 그 기계통해서 사진과  얼굴을 한참 비교해 보기도 하고, 또 정말 뽀뽀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내 얼굴 가까이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대고는 내 피부를 뚫어져라 살펴보기도 했다.


내게는 몇 시간처럼 느껴진 몇 분간의 그런 이상한 검사를 끝내더니, 중국인 특유의 반말 비슷한 퉁명스러운 말로 '니 조우바(你走吧)'라고 했다. 물론 중국어는 한국어와 달리 반말과 존칭이 확실히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니 조우바'는 한국말로는 '너 가 봐' 뭐 이 정도로 번역되는 중국말인데, 생면부지의 사람이 반말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도 모르는 뭔가가 문제가 돼서 중국 감옥에 투옥되는 것 아닐지까지도 걱정했던 상황이라 그저 가라고 놓아준 것만도 너무도 고맙고 감사했다.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마 여권의 사진이 오래돼서 내 실물과 좀 다르다고 판단한 심사관이 실제 얼굴과 여권 사진이 일치하는지 여부를 상급자에게 재확인 요청했고, 그 상급자는 내가 얼굴 피부가 실제 피부인지 여부를 면밀하게 다시 검사한 후 이상이 없다고 판단되어 그대로 입국시켰던 것 같다.

 

살제 그즈음 어떤 젊은 중국인이 얼굴에  정교한 실리콘 가면을 쓰고 캐나다에 입국을 시도다 입국심사 과정에서 발각된 사건이 있었다. 아마 그러사건 때문에 그날 입국 심사 시 여권상의 오래된 내 사진과 실물이  달라 보이자 그렇게까지 까다롭게 심사했던 것 같았다.


(실리콘 가면 쓰고 캐나다 입국 시도한 중국인)

https://m.chosun.com/svc/article.html?sname=news&contid=2010110800108




요즘은 좀 달라졌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홍콩을 마지막으로 떠나던 2014년까지도 홍콩에서 물건들구매해 선전으로 들여와서 판매하는 보따리 장사꾼들이 많았다. 그들은 주로 아이폰과 같은 운반하기 편한 소형이면서도 고가인 제품을 밀수했지만, 기타 전자부품이나 식료품, 심지어 분유 같은 것도 인기 밀수 품목 중 하나였다.


(홍콩에서 선전으로 아이폰 밀수하다 발각된 사례)

https://blog.naver.com/dasolsys01/20193728695


특히 보따리상들이 사가는 분유는 홍콩에서 매우 큰 사회적 이슈가 될 만큼 문제가 되기도 했었다. 중국에서 생산하 분유의 품질에 대한 불신 때문에 중국인들이 홍콩에 넘어와 홍콩 식품점의 분유를 사 가지고 중국으로 가져가는데, 그 양이 적지 않아서 정작 홍콩 사람들은 분유를 제대로 살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이로 인한 홍콩인 불만이 급증했던 것이었다.  


결국 홍콩 정부는 중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1인당 분유 구매 물량을 제한하는 전례 없는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홍콩 인구는 고작 730만뿐인데, 인구 14억의 중국에서 홍콩을 방문하는 중국인이 연간 4~5천만 명으로 홍콩 인구 5~6배가 넘다 보니 그들이 분유 한통씩만 사가더라홍콩 분유는 씨가 마를 수밖에 없었다.  


(보따리상들의 홍콩 분유 싹쓸이)

https://blog.naver.com/sn00005/150181884938


홍콩에서 선전의 친구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 선전행 전철을 타면 전철 안에서 보따리 장사꾼들이 홍콩에서 산 아이폰, 전자부품, 분유 등을 여러 명이 나누어서 몸 안 여기저기에 감추거나 숨기는 장면을 공공연히 볼 수 있었다. 전철 안에 타고 있는 나 같은 일반인도 너무도 흔하게 자주 목격하는 장면이라 중국 세관에서도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충분히 알 수 있는 그런 밀수였다.


그런데 결과를 보면 항상 그들은 아무런 문제 없이 선전의 세관검사를 마치고 건물 밖으로 그런 물건들을 들고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는 세관이 있는 그 건물 앞에 있는 선전역 광장에서 여러 사람에게 나누었던 그 물건들을 이번에는 모두 다시 모아 한 사람에게 전달하는 장면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진행는 밀수 행위를 세관 또 경찰모르기가 오히려 어려울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당시는 그런 밀수 장면을 백주 대낮에 너무흔하게 볼 수 있었다.


결국 밀수 세력과 세관 또는 경찰이 서로 결탁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들이 공공연하게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었는데, 세월이 흘러 이제는 그런 상황이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보따리상들이 밀수품을 다시 모으던 세관 바로 앞 광장)

https://blog.naver.com/jiniccc/110124216494

(세관 앞 광장 거리뷰)

https://j.map.baidu.com/a7/ACB

(로후 역 경유 홍콩에서 심천역 이동 절차)

https://blog.naver.com/llzzinll/220445927644




선전에는 같이 회사를 다니다가 먼저 그만두고 자기 사업을 하던 친구도 있었고, 공군 학사장교 동기도 있었으며, 또한 몇몇 지인으로부터 소개받았던 중국 여인도 있었다. 결과는 비록 오랜 인연으로 이어지지 못했지만 3명의 선전 여인을 소개받기도 했었던 것이다. 물론 대다수의 선전 사람들처럼  여인들 역시 원래 고향이 선전은 아니고 내륙 다른 지역 출신이었고 일자리를 찾아서 선전으로 온 사람들이었다.  


(선전 시내 2010년 모습)

https://blog.naver.com/godjinho/10094914888


그들을 만날 겸, 또 그들과 술도 한잔할 겸, 선전은 참 자주 다녔고 그들과 함께 한국 식당, 배드민턴 경기장, 영화관, 시장, 쇼핑몰, 카페, 술집, 안마소 등등 선전 시내 이곳저곳 구석구석 돌아다녔던 것 같다. 베이징 또 광저우처럼 직접 거주했던 도시를 제외하면, 중국 본토 도시 중에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곳이 선전이었던 셈이다.


그만큼 선전에 대해서는 나름 각별한 기억과 추억이 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서 이제는 마지막으로 선전을 가 본지도 벌써 6년이 다 돼가는 것 같다. 워낙 급속히 변해온 도시가 선전인지라, 그 6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또 다른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 같다.


(선전의 외곽 한적한 지역의 거리 모습)

사진)  ‘쉬에푸루'라는 거리 모습인데 이 근처에서 일하는 중국 여인을 만나러 갔을 때 찍은 사진. (2010. 10월)

 



중국을 공산 국가로 만들었고, 이후 사망 시점까지 자신이 그토록 비난했던 청나라의 황제만큼 절대적 권력을 누리며 집권했던 마오쩌둥도 신이 인간에 부여한 생로병사 한계는 역시 넘지 못했다. 마오쩌둥은 1976년에 사망했다. 그리고 그에 이어 최고 권좌에 올라서 중국을 통치했던 덩샤오핑은 그로부터 21년 뒤 1997년에 사망했다.

 

생전에도 그들이 추구하는 바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었지만 사후에도 그들의 상황은 역시  다르다. 베이징 중심에는 마오쩌둥의 시신이 안치된 거대한 기념관이 있다. 그렇지만 가난하기만 했던 중국인들훨씬 더 풍요로운 삶을 살  있도록 선전과 같은 경제특구를 만드는 등 개혁개방 정책을 도입해 중국인들의 삶의 수준이 실질적으로 크게 향상될 수 있게 만들어준 사람인 또 다른 중국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 무덤은 중국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덩샤오핑은 "각막은 기증하고, 장기는 의대 실험용으로 사용해라. 장례를 위한 조문소 만들지 말라. 시신은 화장 후 홍콩 앞바다에 뿌려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 그의 유해는 그의 유언처럼 화장된 후 홍콩 앞바다에 뿌려졌기 때문이다. 죽으면서도 자신의 몸뚱이마저 중국을 위해 바친 셈이다.

 

(마오 주석 기념관)

https://blog.naver.com/asdkgy97/221184038739

(덩샤오핑의 유해 화장 후 바다에......)

http://news.imaeil.com/NewestAll/2013112607324497797


하지만 사후 20년이 지난 최근에도 수많은 중국인들로부터 칭송받는 위대한 덩샤오핑도 결코 완전한 인간은 아니었다. 중국의 민주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1989년 천안문(天安門) 사태를 강경하게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려 수천 명이나 되는 시위대가 군경에 의해 무참히 살상된 책임에 대해서는 결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1989년 천안문 사태)

https://namu.wiki/w/%EC%B2%9C%EC%95%88%EB%AC%B8%206.4%20%ED%95%AD%EC%9F%81


덩샤오핑은 당시 그렇게 강경 진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한 그의 판단은 그것이 중국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을 것이다. 실제 그 사건이 진압된 이후에 중국은 급성장을 거듭해서 드디어 오늘날과 같은 미국에 버금가는 국가로 우뚝 서게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사건 이후 민주화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공산당 독재체제는 오히려 더욱 심화되고 있다. 민주화와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덩샤오핑의 강경진압과 그로 인한 수천 명의 살상이 과연 용납될 수 있었던 것인지는 결국에는 신과 역사가 판단할 것이다.   




요즘은 한국에서 뿐 아니라, 전 세계 어느 곳을 가도 중국인 관광객들이 도처에 넘쳐난다. 하지만 불과 20~30년 전만 해도 해외에서 중국인 관광객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당시 중국은 해외여행은 고사하고 당장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에도 급급하던 전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중국인이 그렇게 바뀐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은 중국 경제에 자본주의적인 요소를 대폭 접목시킨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의 결과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마오쩌둥이 이념적으로만 중국을 바꾸는데 그쳤다면, 덩샤오핑은 실제 중국인의 삶을 바꾸어 주었다. 교조주의자들의 반발로 목숨 위협까지 받으면서도 그는 끝까지 개혁개방을 밀어붙여서 결국 결과를 만들어 냈다.


덩샤오핑의 키는 150cm로 알려져 있다, 동양인 중에서도 꽤 작은 편이다. 서 있어도 다른 사람들의 앉은키와 비슷해 투표에서 반대 의사 표명하기 위해 일어섰는데도 진행자가 앉아 있는 것으로만 오해했을 정도였다는 우스개 소리 같은 얘기도 있을 정도였다.


미중(美中) 수교 및 영국의 식민지였던 홍콩의 중국으로의 반환 등, 굵직굵직한 세기적 협상들의 상대방이었던 미국의 닉슨(Nixon) 대통령이나, 영국의 대처(Thatcher) 수상과 찍은 사진을 보면, 덩샤오핑의 키가 그들의 어깨 근처까지 밖에 미치지 못해 마치 어린아이가 어른을 바라보듯이 항상 상대방을 올려다보는 모습의 사진만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한다.


하지만 비록 신체적으로는 그렇게 작았어도, 그는 가난에만 허덕여 먹고 살기에도 급급했던 중국인들을 전 세계로 관광 다닐 수 있는 사람들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런 모든 중국의 변화가 바로 무에서 유가 창조된, 즉 아무것도 없었던 인구 30만의 작은 바닷가 시골 마을이 중국에서 가장 부자 도시로 거듭나게 되선전이란 도시에 상징적으로 압축되어 있는 셈이다.


선전에 최초 적용된 개혁개방 정책이 실패했다면, 오늘날의 중국은 없고 요즘도 중국인들은 마오쩌둥 시대와 변함없이 아프리카나 북한과 같은 나라의 국민들처럼 빈곤, 굶주림에 허덕이는 삶을 여전히 살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덩샤오핑은 중국인도 반드시 잘 살 수 있다는 꿈이 있었고 그 꿈을 끊임없이 밀어붙여서 '선전의 기적'과 같은 현실로 만들어낸 것이다.


마오쩌둥처럼 그렇게 크고 화려한 기념관은 말할 것도 없고 무덤조차 없지만, 선전 시내 롄화산에 남아 있는 덩샤오핑 동상은 바로 그러한 그의 꿈으로 만들어진 도시인 '선전' 조용히 내려다보며 옅은 미소를 고 있는 것 같다.


(선전에 있는 덩샤오핑의 동상)

 https://m.kr.ajunews.com/view/20201015091153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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