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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LT Jul 10. 2020

선양, 고구려와 발해 & 국밥집

■ 그 주재원의 서글픈 기억들 (5편 중국 여타 도시-12)

해외 주재 근무 14년간의 기억을 적은 이야기

Hong Kong, Macau

그리고 다른 도시들에서의 기억......



중국 여타 도시


12. 선양, 고구려와 발해 & 국밥집


만주(滿洲)라고도 불리는 중국의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등 동북삼성(東北三省) 이제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중국 영토다.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이 영토는 중국 한족의 영토였다기 보다는 우리 한민족이나 여진, 선비, 만주, 거란, 말갈, 몽고 등 시기별로 바뀌기는 했지만 다양한 북방민족들의 영토였고 그들 삶의 터전이었다.


바로 그러한 역사적 사실 때문에 마오쩌둥도 요동은 원래는 조선의 영토였다는 놀랄만한 언급을 하기도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일제 계략에 의해 청나라와 간도협약이 체결되어 영토가 중국으로 넘어가게 되기 전에는 남만주 일대 거대한 영토에 대해 조선은 오랜 기간 그 영유권을 주장해 왔고 또 실제 정부 관리를 파견하기도 했었다.


(마오쩌둥, 요동은 원래 조선의 영토)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626249.html

(간도협약으로 잃어버린 땅)

https://blog.naver.com/nsgogo3/221753205228


만주가 원래 중국 한족의 땅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원전 진(秦) 나라 때부터 중국의 한족은 원래 중국 영토와 만주 사이에 만리장성이라 불리는 거대한 성벽을 베이징 인근의 산하이관에서 시작해서 중국의 서북쪽 지역으로 축성했던 것이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토목공사'라고 불리는 거대한 장성을 축조하면서까지 만주 일대에 거주하던 북방민족의 남침을 막으려고 했으니 과거 한족들이 북방민족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만리장성을 경계로 중국 한족들은 북방민족과 분리되어 살아왔으니 결국  만리장성 위치가 중국 한족과 북방민족 간 과거 국경선어디였는지를 스스로 증명해 주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역사가 흐르면서 이제는 만주 일대가 모두 중국 영토가 되어버렸고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 입장에서는 현재 자신들이 점유하고 있는 만주가 과거 역사적으로도 중국의 영토였다는 논리를 만들어야만 할 필요성이 생겼. 그리고  필요성에서 동북공정(東北工程)이란 역사 왜곡 작업이 시작 것이다.


중국이 축조한 만리장성의 동쪽 시작점이 베이징과 선양의 중간쯤에 있는 산하이관(山海關)이라는 사실 과거에는 중국에서도 널리 인정되었던 사실이다. 다만 동북공정이란 이 역사 왜곡 작업이 진행되면서, 이제 만리장성 시작점이 산하이관이 아니라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였던 만주 깊숙한 지역으로 수정되었고 그러면서 동북삼성도 만리장성 내부 지역으로 포함되었다. 결국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도 이제는 만리장성 내의 중국 역사가 되어버린 셈이다.


(중국, 고구려·발해 땅까지 ‘만리장성’에 포함)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6062147015&code=970204




과거의 역사 왜곡뿐 아니라, 현재의 동북 삼성 현실도 매우 안타까운 실정이다. 원래 그 땅 주인이었던 우리 민족 포함 만주족, 몽고족, 거란족 등 북방민족 인구 비중은 지속해서 줄어들어 이제 동북삼성에 거주하는 인구 중에 소수민족의 비중은 10% 수준밖에 안된다. 이미 한족의 비중이 압도적 다수인 90%에 달하고 있는 것이다.


북방민족은 동북삼성이 자신과 조상들의 고향이었음에도 그 땅을 한족들에게 모두 넘겨주고 자신의 고향에서조차도 이제는 '소수'민족이라 불리며 사는 서글픈 처지로 전락한 셈이다. 게다가 나마 아직은 고유 언어를 유지하고 있는 조선족을 제외하면 여타 북방 민족들언어와 문화적으로 이미 한족에 상당 부분 동화되어 민족의 정체성조차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만주어 소멸 위기)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793904


우리 동포 조선족도 과거에는 중국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는 조선족이 많았다는데, 요즘은 반대로 한국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는 청소년층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라고 한다. 그만큼 중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는 조선족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고  그만큼 한족화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몇 세대만 더 흘러가한때는 중국 한족을 통치하고 지배했었던 만주족의 언어와 문자가 이미 거의  사라진 것처럼, 우리 동포 중국 조선족의 고유 언어, 문자도 모두 사라지는 신세가 될지도 모르겠다.




북방 민족에게는 이처럼 아픈 역사가 남아 있는 동북삼성의 가장 큰 도시가 랴오닝성의 성도이며 과거 청나라 시절에는 펑티엔(奉天, 봉천)이라 불렸던 선양(瀋陽, 심양)이다. 이 선양은 우리 민족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개모성(蓋牟城)이라 불렸던 고구려 성이 오랜 기간 존재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라 다. 또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는 역시 또 다른 우리 민족 국가인 발해가 선양 일대를 지배하기도 했었다.


(랴오닝성에서 고구려 유물 대량 발견)

1.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11346445?sid=104

2. https://mnews.joins.com/article/3675436

(선양 주변 고구려 성들의 위치)

http://m.khan.co.kr/amp/view.html?art_id=201206062156525

(발해의 당 나라 침공)

https://m.blog.naver.com/jungyoupkim/221630651089


하지만 발해가 멸망하고 우리 민족의 영토가 한반도 안으로 크게 줄어든 이후에는 선양은 만주족들의 중심 도시가 되어 만주족의 청나라가 베이징으로 수도를 천도하전까지는 청나라의 수도였다. 이후 베이징으로 수도가 이전된 뒤에도 선양은 여전히 청나라 제2의 도시로 관리되었다.


만주어로는 이 도시의 이름이 '번성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Mukden'이었다 하는데, 그런 사유로 이 도시에서 발생한 일본의 만주침략 시발점이 된 '남만주철도 폭발 사건' 같은 역사적 사건도 영어로 검색하면 'Shenyang Incident'가 아니라 'Mukden Incident'라는 만주어 지명이 남아있는 사건으로 불리고 있다.


이제는 중국 한족들이 명명한 지명으로 바뀐 곳들많지만 이처럼 만주족은 자신들의 터전이었던 만주 일대 도시들에 대해 만주어로 된 독자적인 지명들고 있었다. 齊齊哈爾(치치하얼), 哈爾濱(하얼빈)등 중국 한자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동북지방 도시명들이 바로 그런 실제 사례인데 원래는 만주어 등 북방민족 언어의 지명이 한자로 음차 된 것들이다. 중국이 미국의 수도 Washington이라는 도시를 한자로 음차 하여 '華盛頓(화싱둔)'이라 표기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북방민족 언어로 해석하면 치치하얼은 '천연 목장', 하얼빈은 '그물 말리는 곳'이라는 뜻이라 한다.


그뿐 아니다 만주족은 또 이제는 거의 사어(死語)처럼 되어 버렸지만 몽고 문자에서 유래된 고유 문자도 갖고 있었다. 즉, 민족, 언어, 문자 모두가 한족과는 크게 다른 만주족이 우리 민족 국가인 고구려와 발해에 이어 오랜 기간 선양과 동북삼성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만주족 문자)

https://en.m.wikipedia.org/wiki/Manchu_alphabet

(만주어로 부르는 노래 고향의 봄, 2:02)

https://www.youtube.com/watch?v=DDR5seDGtKw


만주는 2차 대전 기간 한동안은 일본군의 지원을 등에 업고 중국에서 독립하여 만주국이라는 독립국으로 유지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일본의 패전으로 만주 지역의 독립은 결국 무산되었고 만주는 다시 중국 영토흡수되는 역사를 맞게 다.


이후 한족 인구의 만주 유입은 본격적으로 늘어나게 되었고 결국  만주어와 만주 문자가 한때는 그 공간을 가득 채웠을 만주족의 도시 'Mukden' 또는 '봉천'전술했던 것처럼 이제는 거주 인구  한족 비중이 무려 90% 이상이나 되는 선양이라는 이름의 한족 도시로 바뀌어 버렸다. 


일본인이나 중국인의 유입이 꾸준히 늘어 서울 인구 비중의 90% 이상이 된다면 서울의 문화나 모습은 엄청난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로 그런 변화가 중국 만주 땅에 있는 선양과 같은 도시에서는 실제 이미 발생했던 셈이다.


(만주국 황제 푸이(溥儀)와 만주국 열병식, 00:36)

https://www.youtube.com/watch?v=h5d2ypQo3tA

(만주국 국기)




2006년 10월, 처음으로 양에 출장을 갈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양에 도착해 보니 선양이 베이징보다 위도가 별로 높지 않았음에도 대륙성 기후가 뚜렷한 만주 벌판 한복판에 도시가 위치하고 있어서인지 날씨는 이미 가을을 한참 지나 확연한 초겨울에 접어든 느낌이었다. 그곳 주재원에 의하면 한겨울에는 영하 30도까지 기온이 떨어지는 경우도 적지가 않다고 했다.


한편 이미 초겨울 날씨인 양의 주택가에서는 베이징에서 보지 못하던 특이한 장면을 보기도 했다. 집집마다 집 앞에 배추를 가득 쌓아 놓은 것이 보였던 것이다. 요즘이야 물론 한국에서도 김치를 사서 먹는 경우가 많아서 이제는 좀처럼 보기가 어려운 장면이지만 예전에는 겨울이 오기 전에는 항상 집집마다 김장을 담그기 위해 집에 배추를 쌓아 놓곤 했었는데 서울의 과거 정겨운 모습을 의외로 중국 영토 선양에서 그대로 다시 보는 것 같았다.


나중에 조선족 직원에게 그 배추에 대해서 물어보중국의 동북 지방에는 쑤안차이(酸菜) 불리는 배추 절인 음식이 있는데, 겨울이 오기 전에 만들어 놓고 겨울 내내 먹는다고 했다.  쑤안차이는 중국 타 지역에도 일부 존재하지만 동북지방이 가장 유명하즐겨 먹는다고 했다.


결국 우리 김치와 유사한 음식이 이 쑤안차이 셈인, 우리가 속한 같은 북방 문화권 민족의 공통된 음식 습관이 한국을 포함한 동북지역 전체에 남아있는 흔적이 바로 이 쑤안차이 아닐지 모르겠다.


(쑤안차이 소개 블로그)

1. https://jinzaiheng.blogspot.com/2014/06/blog-post_29.html

2. http://m.blog.yes24.com/amirfirdaus/post/2965253




사진) 양법인이 있던 '총통 다샤' 건물 (2006. 10월)


당시 선양법인 사무실은 시내의 '총통 다샤(總統大厦)'라는 고층 건물에 있었다. 한편  건물 1층에는 법인의 한국인 주재원들이 거의 매일 마치 구내식당처럼 이용한다는 일본 식당이 하나 있었는데 업무 협의한 후 점심은  식당에서 주재원들과 함께 했다. 다만 저녁은 선양 시내 구경도 할 겸 과거 본사에 근무할 때 같은 부서에서 근무해 가까이 알고 지내던 주재원과 둘이 선양의 한인타운 '시타(西塔)'에서 식사를 했다.


(시타 거리 모습)

https://blog.naver.com/luperbbk/220767035513


시타 거리에 베이징의 왕징처럼 역시 한인촌답게 꽤 많은 한국 식당들이 있었다. 그런데 같이 갔던 선양법인 주재원 에 의하면, 시타 거리의 한국 식당 역사는 매우 오래돼서 일제 강점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했다.


바로 시절에 만주 일대에서 활약하던 독립지사 부인들이 시타에서 생계를 위해 국밥집을 운영하면서 그 국밥집에서 번 돈으로 일부는 생활비에 충당하고 일부는 독립군에 대한 지원 자금으로 제공하기도 했다는 것이었. 베이징은 물론 상하이 등 중국 내 여러 도시에 존재하는 한인타운과거 일제 강점기 한국의 역사와는 별 관계가 없던 것과 다르게 선양의 한인촌은 우리의 아픈 과거 역사와 너무나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시타 국밥집 유래 소개 블로그)

https://m.blog.naver.com/jcm1823/221587673288


그런데 세월이 지나 한국은 마침내 독립을 했고, 과거에는 허름한 국밥집들이 모여 있던 시타 거리에는 이제는  크고 화려한 한국 식당들이 들어와서 영업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독립된 한국에서 과거와는 전혀 다른 목적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수많은 한국인들이 찾아와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거리에서 만나는 한국인들의 모습은 그 한국인들이 서있는 거리에 깊이 스며있는 한국의 아픈 과거 역사와는 너무도 큰 리가 있어 보였다.


엄연히 우리 동포이고, 또 어쩌면 과거 그곳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독립활동가 후손일 수도 있는 조선족 원들에게 막말이나 반말을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도대체 한국에 있을 때 무슨 일을 했던 사람들인지 옆에 앉아 식사하기가 부담스러울 정도의 심한 욕을 스스럼없이 쩌렁쩌렁하게 큰 목소리로 내뱉는 한국인들도 너무 많았다. 언론에서 종종 접하는 내용이지만 한국에서 죄를 고 동남아나 중국으로 도피한 조폭이나 범죄인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을 정도였다.


한국의 독립은 단순히 2차 대전 전승국가져다준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물론 우리들이 일본과 직접 전쟁을 해서 우리 힘으로만 일본을 굴복시키고 얻어낸 독립은 아니니 이 말을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일본과는 역사적으로 다른 국가이며, 한국은 독립해야만 한다는 것을 일제 36년간 지속적으로 표현하지 않았고 또 그것을 위해 투쟁하지 않았다면 과연 2차 대전의 전승국들이 한국의 독립에 표를 던졌을지 의문이다. 실제로 해방 직후 미국과 소련이 한국을 통치하는 신탁통치 계획이 있었던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국 주변의 유구(琉球), 티베트, 만주, 내몽고 등 여러 지역도 과거 한때는 독립국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일본이나 중국 영토의 일부일 뿐이다. 한국이 일본에 합병된 시점이 1910년이고, 이제는 오키나와라고 불리는 유구가 일본에 합병된 시점그보다 불과 31년 전 1879년이다. 따지고 보면 크게 차이가 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일본의 2차 대전 패전과 함께 한국은 독립했지만 유구에게는 독립이 주어지지 않았다. 2차 대전 전승국들에 의해 유구도 한국처럼 일본으로부터 분리 독립시키는 안이 한때 검토된 바는 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에는 실현되지 않았다. 티베트, 만주, 내몽고도 마찬가지다. 종전과 함께 모두 중국 영토로 흡수되어버렸다.


중국의 시진핑이 미국의 트럼프에게 한국은 과거에 중국의 일부분이었다고 말했다 하는데, 2차 대전 종전 이후 한국이 중국의 자치주나 아니면 러시아의 일개 공화국 또는 유구와 같이 일본령으로 여전히 남아 있지 않게 된 것은 결코 거저 주어진 것만은 아닐 것이다. 분명히 선양과 같은 해외의 각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의 부단한 투쟁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분들의 숨결이 아직 남아 있을 선양의 시타 거리에서 어쩌면 그분들과도 관련이 있을 수도 있는 우리의 동포 조선족들에게 이제 독립된 한국이 경제적으로 조금  우월하단 이유만으로 그렇게 군림하듯이 안하무인식으로 막말하고 하는 한국인들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착잡하고 무거웠다.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홍범도 장군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후 그곳에서 극장 경비원으로 일하는 삶을 살다 돌아가셨다 한다. 결국 홍범도 장군 역시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우리의 또 다른 동포 고려인으로서 삶을 살았던 것이었다. 홍범도 장군의 외손녀도 현재 러시아 연해주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그녀 역시 여전히 고려인이라 불리는 인생을 살고 있는 셈이다. 선양에 있는 조선족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곳의 식당이나 또는 술집 젊은 종업원들 중에는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군들의 후손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홍범도 장군의 외손녀 인터뷰)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889473.html




사진) 선양에서 투숙했던 호텔 창밖 모습. (2006. 10월)


선양 출장을 마치고 떠나는 날, 호텔 창밖으로 내려다보니 호텔 근처의 낮은 아파트들과 운동장이 있는 학교가 보였다 그 아파트에 거주하는 사람과 운동장의 학생들은 이제 선양 인구의 90%에 달한다는 한족이 대부분일 것이다. 아울러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 및 거리의 간판들까지도 당연히 모두 중국어일 것이다.


하지만 700년 이상 왕조를 유지해고구려, 220년 이상 버텨온 발해가 사진 속 저 땅의 주인이던 시절에는 바로 저 공간에서도 현대 한국어와 어느 정도 비슷한 고대 한국어가 사용되었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만주까지 와서 독립운동을 하던 분들과 힘들게 국밥집 운영하면서 그분들을 지원하던 어머님들의 한국어가 선양의 거리 어딘가에서는 들리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고구려, 발해, 독립투사, 허름한 국밥집 흔적은 모두 다 사라져 버렸고, 선양의 거리는 한족, 한족 중국어, 한족의 문화가 가득한 그런 공간으로 변해 버렸다. 시타 거리 한 구석에서 너무도 자주 들리는 술 취한 한국인들의 듣기 민망한 한국어 욕들을 제외하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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