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저우에서 선전으로 가려면 그 중간에 둥관(東莞)이라는 도시를 거쳐야 한다. 둥관은 한국에는 그다지 많이 알려진 도시는 아닌 것 같은데, 둥관도 인구 약 850만의 결코 작지 않은 도시로 인구수에서는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난징(南京)이나 선양(瀋陽)과 유사하다.
둥관도 인근 선전, 후이저우처럼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 도입 직후에 수많은 외국계 제조업체들이 일찍부터 들어선 중국 남부의 산업 도시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 도시는 산업 도시라는 특징 외에도 또 다른 한 가지로 중국 내에서 매우유명했는데 바로 술집과 밤문화다.
중국 대도시의 술집을 한 번이라도 가본 한국인은 술집들의 스케일과 규모에 한 번은 놀라게 된다. 4~5층짜리의대형 건물을 통째로 사용하는 곳도 있을 만큼 매장 규모도 크고,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수십 명의 종업원들이 입구 양쪽에 도열해서 인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규모나 인원면에서 한국에서는 결코 보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그런데 둥관에는 다른 도시들에 비해 그런 술집들이 유난히많았다. 또 둥관의 술집들은다른 중국 도시에서는 좀처럼 경험하기 어려운독특하고 매우다양한서비스를제공하는 것으로도유명했다. 그리고 둥관 술집이 그렇게 특이하기로소문이 나있다보니, 혹 둥관에 가게 되는 사람들은 단순한 호기심에서라도 둥관 술집은 꼭 한번 방문해 보려는 사람이 많았다. 그 결과 공장들이 가득한 산업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둥관시는전체 GDP의 적어도 10% 이상이 술집과 성매매 산업에서 발생한다는 통계도 있었을 정도다.
한편 중국 남부의 산업도시들 중 왜유독 둥관에만 이처럼 향락산업이 발달했고, 또 이색적인 둥관만의 술집 문화까지 형성되었는지는 나름 이유가있다고 한다.
우선 공급 측면에서 보면 공장들이 밀집되어 있어서내륙의 오지 시골에서 돈을 벌기 위해서동관으로까지 와서 공장에 취직했으나결국에는적응하지 못하고 환락가로 빠지게 된 젊은 여인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러한 공급 측면의 상황은 중국 남부 선전, 후이저우, 주하이 등 여타 공업도시도 역시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수요 측면에서 보면 둥관은 타 도시들과는 다른한 가지가있었다. 바로 개혁개방 초창기부터 대만, 일본,홍콩등의 제조업체들이 유난히 둥관에 많이 밀집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성산업이나 성문화로 보면 대만, 일본, 홍콩 등은 당시 중국보다 훨씬 더 선진국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성 선진국의문화와 시스템이 둥관에 유입되었기 때문에 유독 둥관의 성관련 산업이 발달하게 되었다는해석이다.
최근에는 많이 철수했지만 한때 둥관에는 대만의 기업체가 운영하는 공장들이 6천여 개가 넘었다고 할 만큼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라지만, 일본이나 대만 기업의 해외 주재원들은 가족을 동반하지 않고서 단신으로 부임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다 보니, 갑자기 객지에서 외롭게 독신으로 사는 처지가 된 그 많은 대만 그리고 일본 주재원들이 술집에 좀 더 자주 가게 되었다는것이다.
아울러 유흥업소도이처럼 주 고객이 대만인과 일본인이다 보니 그들의 취향에 맞게 운영 스타일이 바꾸어서 일반적인 중국의 술집과는 다른 대만이나 일본식 술집 문화가 다분히 혼합된 소위 '둥관식서비스'라고 하는 독특한 술집 문화'가 만들어지게되었던것이었다.
한편대만인들이야 중국인들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니의사소통에는아무런 문제가 없었을것이고 그러다 보니 둥관에 있던 대만 사람들 중에는 술집에서 자주 만나던 여종업원과 아예 살림을 차려 동거하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한다.
대만과 중국 간 직항노선 도입이 처음 검토되던 2005년경 베이징이나 상하이 같은 대도시외에대만 기업체들이다수 밀집해 있던둥관까지도 대만직항 노선 개설이 협의되기도 했다 한다. 하지만대만에서 항공기로는불과 3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너무 가까운 둥관에대만의 부인이 불시에 찾아올 것이두려워서당시 이처럼 둥관에 주재하면서동거 생활을 하던 대만 남자들이 암암리에 적극적으로반대해서 직항노선 도입이 결국 무산되었다는 농담 같은 얘기까지도 있었을 정도였다.
나중에 대만 주재 근무할 때도 직접 목격했었지만, 법인의 공식적인 행사에도 본처가 아닌 다른 젊은 여인을동반하고나오는 대만 거래선도 있었다. 또, 지금은 사라졌지만 과거 한때 한국에서도 유행했던 퇴폐 이발소도 그 원조는 대만의 이발청(理髮廳)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대만인들의 부부에 대한 개념이나 또 성 개념은 한국인들의 그것보다는 좀 더 자유스러웠고 그 결과로써 성 관련 산업에 있어서도 대만이 한국보다는선진국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영원히 화려하게 존재할 것만 같았던 둥관 밤문화도 노동집약적 제조업에 의존하던 대만 기업들이 중국의 임금 상승을 견디지 못해 서서히 철수하기 시작하고, 게다가 또 시진핑(習近平) 이후의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 중 하나라는 광둥성(廣東省) 서기 후춘화(胡春華)가 둥관 매춘사업을 청(淸) 나라를 망하게 한 '아편'에까지 비유하면서 2014년 초 '매춘과의 전쟁'을 선포한 이후 크게 위축되었다 한다.
나는 둥관을 두 번 방문했었다. 베이징에 근무할 때 둥관에 있는 계열사 공장에 출장을 갔던 일이 한번 있었고, 광저우 법인에 근무할 때 직원들과 함께 판매 현장 방문차 출장 간 적이 있었다. 첫 번째 경우는 너무도 바쁜 일정으로 둥관의 술집을 구경할 기회가 없었지만 두 번째 경우에는 동료들과 함께 드디어 말로만 들어왔던 둥관의 술집을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실제로 가보니 역시 익히 들어왔던 그대로둥관술집의 규모나 서비스, 독특함 등은 한국과는 비교가안 되는 것 같았고 또 중국 내 다른 도시의 술집과도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북창동에 가보고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것을 절감한 적이 있다. 90년대는 내가근무하던 회사 사무실이 시청 근처에 있었는데, 그 당시에 북창동은 온통 술집들로 가득 차 있던 서울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유명한 술집 골목이었다. 그런데 오랜 해외 생활을 마치고 2015년경 그곳에 다시 가보니 이제는 술집흔적은 찾기도어려울정도로 북창동 골목이 완전히 변해 있었다.
90년대 신입사원 시절, 저녁 10시 또 11시에 퇴근을 해도 일주일에 2~3번은 퇴근과 동시에 반 강제적으로 선배들이 북창동의 룸살롱으로 우리들을 끌고 다녔다. 그리고그렇게 끌려가면 보통 새벽 1~2시까지 선배들에게 잡혀 있어야만했다. 그리고 그렇게 늦게까지 잠 못 자는 날들이 반복되다 보니 수면 부족이 누적돼정말 만화 같은 얘기지만 다음날 출근해서 회사 화장실 대변기에 앉아 몰래 잠시나마 부족한 잠을 보충하기도 했었다.
나도 술을 좋아하고잘 마신다.하지만 그때나 또 지금이나어느 정도 마시면 급격히 졸음이 와서 다른 사람처럼 오래 마시지는 못하는데, 선배들이 함께하는 술자리에 끌려가면 선배들의 강요로 먼저 자리를 뜨지는 못하고 항상 술자리에 잡혀 있어야만 했었다. 그러다 한 번은 역시 선배들이 여느 때처럼 보내주지를않아서 너무 졸린 나머지 그냥 룸살롱의 소파 위에서 약 1시간 정도 졸도한 듯이 잠을 자다가 너무도 시끄러운 가라오케 노랫소리에 잠이 깬 적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는 술집에서 양주를 주문하면 거의 대부분 가짜 양주를 주던 시절이라, 가짜 양주를 마셔서 머리는 깨질 듯 아픈데 소파에 벋어 누워 있는 상태로 어렵게 눈을 떠보니 어떤 여성이 반라의 상태로 벽에 붙어 있는 기둥을 잡고서천장을 향해 기를 쓰고 올라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술도 덜 깬 비몽사몽간에 여기가 어딘지, 도대체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한순간 헷갈렸는데 정신이 좀 들고 보니 술집에서 일하는 여성 종업원이 팁을 받기 위해서 손님들에게 그러한기괴한 행동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순간 그런 상황을 즐기는 나 포함 우리 일행들이 너무나도 잔인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런데 잠시 후 다시 생각해 보니 우리 같이 술 취한 사람들이 그런 특이한 행동을 보고 팁을 주는 덕분에 그녀가 생계를 유지할 돈을 벌고 있다는 것 또한 어찌 보면 서글픈 사실이 아닌가 하는생각이들기도 해서 좀 혼란스러웠다.
미모가 떨어지거나 아니면 나이가 들어 외모로는 손님들을 끌기가 어려운 여인들이 그러한 특이한 행동으로라도 팁을 받아야 했던 것 같은데, 우리가 웃고 즐기며 때론 동정하는 그런 모든 것들이 그녀에게는 그저 유일한 생계수단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하게 되니 가짜 양주로 아픈 머리가 더 아파지는 것 같았다.
서울에서는 이제 이러한 모습들이 없어졌겠지만, 그로부터 약 10년 이상의 시간이 더 흐르고, 장소도 서울 북창동에서 중국의 둥관으로 바뀌었지만, 둥관에서도 역시 유사한 술 잔치가 난무하고 비슷한 구경거리를 보며 즐거워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이러한 모습을 돌이켜 보면 인간이 사는 사회는 시간과 공간의 괴리와 관계없이결국은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는 것 같기도했다.
수천 년 전에 신의 심판을 받아서 도시 전체가 불로 완전히 파괴됐다는 소돔과 고모라(Sodom and Gomorrah)라는 도시에는 북창동이나 둥관의 밤문화와는 비교조차도 할 수 없는 너무도 추악한 성적 문란이 만연했다 한다. 그 결과로 미리 대피한 롯(Lot)의 가족을 제외하고는 단 한 명도 살아 남지 못하고 모두 몰살되는 천벌을 받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도시 전체가 통째로 사라지고 도시 거주민들 전원이 몰살되었음에도, 당시 소돔과 고모라에 퍼져 있었던 인간의특이하고 독특한 DNA는 몸속에 살아남아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수천 년간의 인류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은 사업 중 하나가 매춘사업이라는 말도 있지만 과연 후춘화의 강력한 조치로 뿌리 깊은 둥관의 밤문화가 자취를 감추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