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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LT Jul 04. 2020

창사, 마오쩌둥을 만든 도시

■ 그 주재원의 서글픈 기억들 (5편 중국 여타 도시-10)

해외 주재 근무 14년간의 기억을 적은 이야기

Paris, Toronto, Beijing, Guangzhou, Taipei,

Hong Kong, Macau

그리고 다른 도시들에서의 기억......



중국 여타 도시



10. 창사, 마오쩌둥을 만든 도시


후난성(湖南省)의 성도인 창사(長沙)는 장제스(蔣介石) 대만으로 몰아내고 중국을 '중화인민공화국'이란 공산주의 국가로 새롭게 탄생시킨 마오쩌둥(毛澤東)이 학창 시절을 보낸 도시다.


마오쩌둥은 사 인근 샤오산(韶山)이란 곳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중학교부터는 고향인 샤오산에서 약 40km 정도의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후난성 최대 도시 창사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학창 시절은 모두 창사에서 보냈다.


(샤오산의 마오쩌둥 생가)

https://blog.naver.com/nayagun74/130131374967

(마오쩌둥의 젊은 시절 사진)

1. https://m.blog.daum.net/007nis/15866117

2. https://kknews.cc/zh-my/history/rmokzr.html


그는 대학 졸업 후 베이징으로 가서 약 2년간 베이징 대학을 다니기도 했는데 학생으로서가 아니라 도서관의 직원으로 다녔다고 한다. 마오쩌둥은 1920년 다시 창사로 돌아왔고 1921년에는 상하이에서 개최됐던 중국 공산당 창당대회에 후난성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결국 창사는 그가 학창 시절을 보낸 곳일 뿐만 아니라, 그의 공산주의 사상이 싹트고 자라나게끔 한 그런 도시였던 셈이다.




2005~6년  시절 우리 회사는 중국 5개 도시에 법인, 즉 중국어로는 '분공사(分公司, 펀공스)'라고 부르는 조직을 두고 중국 영업을 하고 있었다. 5개 분공사는 각각 그 하부 조직으로 '판사처(辦事處, 빤스추)'라 불리는 또 다른 지역 조직을 두고 있었는데, 1개 법인이 대략 6~8개의 판사처를 운영하고 있었으므로 중국 전역에 약 30~40개의 판사처를 두고 있었던 셈이다. 그중 후난성 지역은 광저우 법인(廣州法人)이 창사에 판사처를 두고 관리하고 있었다. 


이처럼 창사라는 후난성 도시에 우리 회사 판사처가 있었던 덕분에 모택동이 학창 시절을 보냈던 창사란 도시도 직접 가서 보고 또 경험할 수가 있었다.


인구가 약 800만 정도 되는 창사는 후난성의 성도로, 당시 창사 판사처에는 약 20여 명의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약 30~40개나 되는 그 많은 판사처 중에서도 유독 창사 판사처는 회사 내에서는 꽤 유명한 판사처였다. 뭔가 특별히 잘해서가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실적이 항상 가장 부진하고 잊을만하면 번번이 사고까지 터지는 소위 '문제' 판사처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광저우 법인에 근무를 하던 6개월간의 기간에도 창사 판사처장 본인이 개입된 금전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하도 그렇게 사고가 반복되다 보니, 베이징 본사에서는 이런저런 고민 끝에 광저우 법인의 한국인 주재원 5명이 매달 한 명씩 번갈아 창사에서 숙박하면서 창사 판사처 사무실에서 같이 근무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었다.


당시 법인 단위까지는 한국인 주재원이 파견되어 근무하고 있었지만, 법인 하부 조직인 판사처는 한국인 주재원 없이 현지인을 책임자로 해서 현지인만으로 운영하는 형태였다. 그런데 창사 판사처에서는 현지인 책임자가 사고를 막거나 예방하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가 회사 자금을 착복하는 등 사고를 만드는 일에 자진해서 개입하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현지인을 신뢰할 수가 없어서 교대로나마 한국인 주재원을 파견해서 이중 감독하기로 했던 것이었다.


물론 주재원들이 함께 근무하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사고가 예방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사실 한국인 주재원들도 알고 보면 해외 근무하면서 종종 사고를 야기하기도 했었고 문제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어쨌든 일단 주재원을 보내 놓으면 그래도 현재 상황보다는 조금은 더 개선되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에서 그러한 조치를 취했던 것인데, 역시 결과적으로 보면 근본적인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어쨌든 그렇게 주재원을 교대로 파견해 상주시키다 보니 한 가지 좋은 점은 있었는데, 창사에 있는 주재원들이 창사 판사처에서 직접 보고 경험하는 것들을 법인에 수시로 상세하게 전달해줌으로써 적어도 그 판사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좀 더 소상히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창사에 파견된 주재원 보고에 의하면 창사 판사처 영업담당 직원들 중에는 조직 폭력배들도 있어서, 부정을 저지르거나 문제를 만들어도 현지인 책임자인 판사처장 포함 판사처 내 인력 누구도 그들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또 그렇게 계속 묵인하다 보니 결국 판사처장도 어쩔 수 없이 문제같이 연루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제는 판사처주재원들이 와서 상황을 파악하고 있으 심지어 주재원들 때로는 그들로부터 암묵적인 위협을 기까지 다고도 했다.


물론 경찰 조사까지 걸쳐 최종적으로 실제 확인된 내용들은 아니니 일부 오해나 과장된 면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 전에 캐나다 같은 선진지역에 주재 근무하면서도 유사한 경험을 실제 겪어본 기억이 있는 나로서는 그 말이 그렇게 빈말처럼 들리지만은 않았다.


캐나다 법인 근무 시절에도 캐나다 마피아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은근히 암시하며 묘한 협박 같은 말을 하는 이태리계 거래선도 있었고, 백주에 사무실 회의실에서 동료가 자신의 목을 졸랐다고 경찰에 신고한 직원도 있었다. 이후 홍콩에 근무할 때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홍콩의 삼합회라는 조폭과 자신이 연관되어 있다고 의도적으로 자진해서 소문을 내고 다니는 직원도 있었고, 전문적인 밀수조직과 연루된 직원도 있었다.


그러니 캐나다나 홍콩보다 치안이 좋지 않고 사회 시스템도 상대적으로 취약한 중국에서는 얼마든지 실제 그런 일들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저우 법인 근무 시절 두 번 정도 창사에 출장 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내가 둔해서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중국어를 잘 못해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돼서 그랬던 것인지, 번째로 판사처를 방문했을 당시에는 이미 많은 부정이 저질러지고 있던 시절이었는데도 그러한 분위기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판사처장 포함 판사처 직원 모두 너무나도 성실하고 열심히 근무하는데 안타깝게도 아직 실적이 제대로 나오지 않고 있을 뿐이라는 그런 느낌뿐이었다.


그런데, 이미 사고들이 터지고 문제가 모두 다 밝혀지고 난 다음에 창사 판사처를 다시 방문했을 때는 판사처 분위기도 이상하고 창사 판사처에 근무하는 직원들 모두가 문제가 있고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차이를 보면 결국 사람들의 선입견이 판단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를 새삼 느끼게 되는 것 같았다.

 

조폭과 관련이 있어서 주변 직원들을 협박하기도 했다는  직원들 중 한 명은, 그러한 사실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창사 판사처의 가장 열의 있고 또 가장 순박한 직원 중 하나로만 알려지고 있었다. 부정을 방지해야 할 사람이 오히려 적극 부정에 개입했던 판사처장 역시 지금도 그 얼굴이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참 선하게 생긴 인상이었고 또 항상 겸손했으며 예의도 유난히 바른 사람이었다.


창사 판사처 실적이 너무도 부진하니 그런 창사 판사처장의 사기도 올려줄 겸 그를 식사에도 여러  초대했고, 또 개인 사비까지도 털어가며 광저우 시내의 고급 안마소에서 함께 안마를 받기도 했었다. 그런데 나중 알고 보니 나 포함해 주재원들과 그렇게 가까이 지내던 바로 그 시기 판사처장은 열심히 솔선수범해서 부정을 저지르고 있었던 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라옛말은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역시 그대로 적용되는 진리였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 회사의 창사 판사처에 문제가 터졌던 시절, 2006년 4월 공교롭게도 한국인 관광객이 창사까지 왔다가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화장실 간다고 잠시 갔는데 이후 실종됐고 16시간 뒤 그들이 머물던 호텔에서 약 5km 정도 떨어진 호수에서 아무런 외상도 없이 숨진 상태로 발견된 것이었다.


2006년경만 해도 아직 중국을 찾는 한국의 단체 관광객이 그다지 많지 않았시절이었고, 또 베이징, 상하이와 같은 대도시도 아닌 내륙 창사까지 한국인 관광객들이 찾아가는 경우는 흔하지 않던 그런 시절이라 창사에서의 한국인 사망 사건은 한국의 언론에서도 꽤 회자되던 사건이었다.


(한국인 관광객 창사에서 숨진 채 발견)

https://news.kbs.co.kr/mobile/news/view.do?ncd=861908

 

한편 잠시 화장실 갔다는 사람이 왜 호수에서 발견되었는지 그 이유를 당시 경찰 조사에서도 밝혀내지는 못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평소에 지병도 없었고 발견 당시 몸에 외상도 전혀 없는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외딴곳에서 사망한 상태로 발견되어 꽤 미스터리한 사건으로 알려졌었다.


그런데 마침 이 사망 사건 발생 시점이 당시 우리 회사 창사 판사처 금전 사고가 발생한 시기와 묘하게 겹쳐 우리 회사 주재원들에게는 창사라는 도시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한층 더 굳혀주는 그런 계기가 되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이겠지만 창사 전체를 그렇게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느 도시 어느 지역을 가도 악한 사람이 있는 것처럼 선한 사람도 다. 서울에도 범죄가 넘치는 반면 선행을 베푸는 사람 역시 적지 않은 것처럼 창사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창사는 마오쩌둥이 성장하고, 교육받고 또 공산주의 사상을 잉태하기도 했던 곳이다. 그리고 창사에서 잉태되었던 그런 공산주의 사상으로 그는 마침내 14억 인구를 가진 중국의 공산화도 이루어냈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받아 지금도 그는 많은 중국인들로부터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다.


하지만 그런 혁명의 과정에서 너무도 많은 중국인들의 피가 흘러야만 했으며, 중국 이외의 지역에서도 6.25 전쟁 개입, 티베트 침공, 동투르키스탄 점령, 문화 대혁명 등등 수많은 피로 점철된 끔찍한 역사 또한 창사에서 교육받고 성장했던 그가 만들어낸 것이라는  부정할 수 없다.


1893년 12월 태어난 마오쩌둥은 그처럼 많은 굵직굵직한 사건의 흔적을 남기며 83년을 이 에서 살다 1976년 9월 사망했다. 역시 창사의 수많은 선한 사람 또는 악한 사람 중 하나였을 인데, 과연 그는 어느 쪽의 사람이었을지?

그가 사망한 지 이미 40년이 넘지만 창사라는 중국 도시가 만들어낸 그에 대한 판단은 여전히 갈리고 있는 듯하다.


(마오쩌둥 40주기 관련 기사)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55/0000451398?sid=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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