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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LT Jul 19. 2020

후이저우, 추억이 되어버린 공장

■ 그 주재원의 서글픈 기억들 (5편 중국 여타 도시-15)

해외 주재 근무 14년간의 기억을 적은 이야기

Paris, Toronto, Beijing, Guangzhou, Taipei,

Hong Kong, Macau

그리고 다른 도시들에서의 기억......



중국 여타 도시



15. 후이저우, 추억이 되어버린 공장


선전(深圳)등 중국 남부 도시는 자본주의적 요소가 다분히 반영된 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이 중국에서는 가장 먼저 도입된 지역으로, 1979년 선전을 포함한 중국 남부의 4개 도시가 특구로 지정되면서 외국 자본과 기업들을 유치하기 위한 매우 다양한 특혜가 중국 중앙정부 차원에서 수립되고 적용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특혜를 누리기 위해, 또 당시의 풍부한 중국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 실제로 많은 자본주의 국가 기업들이 중국 공산화 이후 처음으로 그러한 도시들어와 공장을 짓고 제품을 생산해 전 세계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요즘 저가 공산품 중에는 베트남, 태국 등 동남아 국가에서 생산된 것도 꽤 있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동남아 국가의 산업화 기반은 아직 너무도 취약했고 결국 전 세계 저가 공산품은 거의 전부가 중국산으로 도배되다시피 했던 시절이었. 그리고 그 공산품들이 바로 이러한 공장들에서 제조된 것들이었다. 즉 1979년 개혁개방 정책이 적용되어 해외기업들이 중국 공장을 짓고 생산된 물량들해외로 수출하기 시작하면서 전 세계의 저가 시장은 중국에서 만든 'Made in China' 제품으로 급격히 대체되었던 것이다.


한편 그렇게 외국 자본과 기업들이 중국에 들어와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다"라고 불릴 정도로 다양하고 많은 제품들 생산하고  수출을 하면서 중국의 외화 벌이는 본격적으로 진행되었고, 그 결과 공산화 이후 수십 년간 전 세계 최빈국 중 하나로 머물러 있었던 중국의 경제는 빠르게 성장하여서 결국에는 미국에 버금간다는 G2로까지 이제 불리게 되는 수준에 르게 되었다.


한마디로 중국 경제가 급성장하게 된 변화의 시작점이 바로 선전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의 남부 도시 공장들에 있었던 셈이다.  




선전의 바로 옆에 붙어있는 도시가 후이저우(惠州)라는 도시다. 역시 경제적 특혜가 용되었던 후이저우에도 인근 중국 남부 도시들에서처럼 꽤 많은 외국계 공장들이 들어와 가동되고 있었다. 그리고 중 하나가 바로 내 오랜 친구가 운영하던 공장이었다.


(친구 공장이 있던 곳)

 https://j.map.baidu.com/e1/RJC


이 친구는 나와 같은 회사를 다니던 동료였는데, 일찍 뜻을 품고 회사를 그만두고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다. 그와 같이 회사를 다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30여 년이 다 지나도록 그와는 가까운 친구로 지내고 있는데 내가 베이징에 근무할 때도 역시 같은 중국 땅에 살고는 있었지만, 중국이 워낙에 넓은 곳이라 북쪽에 있는 베이징에서는 특별히 휴가를 내지 않고서는 그 친구를 만나러 남쪽 끝의 후이저우까지 가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홍콩법인에 발령받아 근무하게 된 이후 약 5년  기간에는 홍콩과 후이저우가 워낙 가까운 거리에 있다 보니 주말이나 휴일에는 술도 같이 한잔 할 겸 종종 후이저우 친구를 찾아가곤 했었다.


한편 중국과 홍콩은 같은 국가임에도 공휴일이 다른 경우가 많은데, 자치권이 있는 홍콩 정부가 과거에 영국이 홍콩을 통치하던 약 150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홍콩에 적용되어 홍콩인들에게 익숙해진 서구식 공휴일들을 여전히 그대로 적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홍콩에만 적용되는 대표적인 휴일들이 크리스마스나 부활절과 같은 것들인데, 공산당이 이끄는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는 결코 인정될 수 없는 이런 종교와 관련된 휴일이 홍콩에는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중국과 홍콩 간의 휴일이 서로 다르다 보니 홍콩의 휴일에 중국 후이저우에 있는  친구 공장에 가서 실제 공장이 가동되고 직원들이 일하는 모습도 직접 볼 수 있었다. 물론 중소기업 격인  친구의 공장 분위기는 훨씬 더 깔끔한 대기업의 대형공장 분위기와는 많이 달라서 친구 공장에 가면 마치 한국의 90년대 구로공단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서 당시 그곳의 공장들을 다시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었다.


(2008년 찍은 후이저우의 한국 공장 모습)

https://blog.naver.com/hakppp/50029562143

※ 블로그 속 사진은 대기업 공장 모습이라 좀 깨끗한데, 내 친구 공장과 공장 인근 지역 모습은 이 사진 속에서 보는 것보다는 훨씬 열악했다.


그런데, 왠지 그렇게 시간을 과거로 거꾸로 되돌려 놓은 것 같은 그런 분위기가 오히려  반갑고 정겹게 느껴졌었다. 이제는 공장들이 거의 다 사라졌지만 과거 봉제, 의류, 전자 제품 등을 생산하는 공장들이 다수 밀집되어 있었던 서울의 구로공단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었때문이었다.


(구로공단 과거 모습, 04:52)

https://www.youtube.com/watch?v=uLfFLS9Ygnc


한국이라는 국가 자체가 너무도 가난하고 국민들 대다수가 빈곤 속에 살았던 그 당시 구로공단에서 일하던 근로자들은 대부분 시골에서 상경한 10대 여성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어린 10대의 그녀들 시골에 있는 가족들 모두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구로공단 전성기인 70년대 말에는 그렇게 구로공단에서 일하던 근로자가 무려 10만여 명이나 되기도 했다 한다.


그만큼 큰 공장 단지였는데, 현재 한국의 수출 주력 제품인 반도체나 자동차, 핸드폰 같은 고부가가치 제품이 당시에는 아직은 제대로 생산되지 못하던 시절이었으니, 시절에는 구로 공단에서 생산되는 노동집약적 제품들이 한국의 주력 수출품이었고 그 제품들이 한국이 외화를 확보하는데 크게 기여했었다. 결국 구로공단 근로자들이 생산하고 수출해서 벌어들인 외화가 오늘날 한국 경제가 고부가 가치 제품을 수출하는 구조로 변모하게끔 는데 중요한 밑거름으로써 기여했던 셈이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한국의 경제발전에  기여를 했던 이 근로자들은 당시의 열악한 공단 환경과, 저임금, 장시간의 근무 등으로 힘들고 고달픈 삶을 살아야만 했다. 그럼에도  그런 그들을 위로해 주지는 못할 망정, 공장에서 일할 필요 없이 그저 학교에만 다니면 되는 상대적으로 유복한 서울의 학생들은 당시 그들을 '공순이', '공돌이'라고 비하를 해서 부르기까지 하는 경우도 많았다. 공장에서 일을 하는 여자 또는 남자라는 의미다.


(공순이, 공돌이 세대)

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39801




90년대 초반 회사일로 몇 차례 구로동의 그 공장들을 직접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물론 세월이 흘러서 70년대 보다는 다소 개선되었겠지만 90년대에도 여전히 대기업의 공장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는 열악한 환경에서 직원들이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표정이나 공장 분위기는 꽤 활기차고 밝보여 의외였던 기억이 있다.


아마 지금 당장은 고생하더라도 그 결과로 얻어지는 미래는 오늘보다는 훨씬 좋을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이 있어 그렇게 보였을지 모르겠다. 실제 그들의 그러한 고생 덕분에 한국 경제도 크게 성장을 했고 그들 자신들 역시 이제는 최소한 경제적으로는 과거 그 시절보다는 훨씬 여유 있는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현재는 농장주가 된 구로공단 근로자의 과거 회상 05:37)

https://www.youtube.com/watch?v=QsIUH1SaXS8


그런데 친구의 공장이 있는 후이저우 공단에 와보니, 정말 오랜만에 다시 과거의 그 구로공단을 방문하는  같았던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신기하게도 그 공단 안에 위치한 친구 공장 중국인 직원들 표정 역시 오래전 구로 공단에서 만났던 그 젊은 직원들 표정만큼 밝아 보였다.


물론 그들 또한 과거 구로공단에서 일하던 한국 근로자처럼 높지 않은 급여와 열악한 환경으로 힘들고 또한 나름대로는 어려움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역시 현재는 고생을 하더라도 그 고생 덕분에 미래는 좀 더 밝고 편할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감 때문인지 밖으로 드러나는 표정 어둡지가 않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친구의 얘기를 들어보니 그들의 삶도 언제나 그렇게 밝지만은 않다는 것도 들을 수 있었다. 후이저우 공단에는 단순 조립업을 하는 공장들이 대부분 몰려 있다 보니 전자 조립업 특성상 남자보다는 여자 직원에 대한 수요가 높았고 따라서 직원들 대부분은 과거 구로공단에서처럼 도시 물정 잘 모르는 중국 시골에서 온 나이 어린 여자 직원들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약하고 물정 잘 모르는 여성들만 많다 보니, 그런 약자들만을 대상으로 돈을 뜯어내는 사회의 암세포와 같은 건달들이 그 근처로 몰린다는 것이었다. 그 공장에서 일하는 여직원들이 월급을 받으면 오랜만에 공장의 기숙사 밖으로 나가 맛있는 음식도 사 먹고, 옷을 사기도 한다는데 그런 월급날이 건달들로서는 대목으로 외출 나온 직원들이 그들에게 협박당해 한 달 치 월급 전부를 뺏기고 돌아오는 안타까운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것이었다.

 

한국에도 약한 사람을 대상으로 등쳐먹는 사악한 인간들이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도 여전히 있지만, 중국도 마찬가지로 강자에게는 한없이 약하면서 약자에게는 한없이 강한 그런 기생충 같은 인간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었다.




중국에서도 연말에는 우리의 송년회와 유사한 파티를 한다. 후이저우에서 공장을 운영하고 있던 그 친구도 2010년을 마무리하는 연말 파티를 했었는데 마침 그날이 홍콩에서는 휴일이라 그 친구 공장의 연말 파티에 직접 참석해 구경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생산라인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은 제외하고 사무직 약 30여 명 만을 대상으로 송년회를 하는 자리였는데, 술을 마시고 식사하는 모습 등은 한국의 여느 회사에서 하는 송년회와도 별 차이가 없었다. 다만 식사를 하는 도중에 사장이나 회사 명의로 선물을 주는 모습은 한국에서는 흔하게 보지 못했던 것 같다. 한편 나처럼 사장 친구로 참석한 사람들도 그러한 행사에 참석하면 직원들 선물용으로 격려금이나 물품 등을 제공하는 것이 관례여서 나 역시 현찰 얼마쯤을 격려금으로 제공했던 기억이 있다.   


사진) 친구가 운영하던 공장 사무직 직원들 2010년 송년회 모습. (2010. 12월)


한편 후이저우에서 그 친구 만나 같이 한잔할 때면 너무도 자주  그의 하소연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생산해야 할 물량은 넘쳐나는데 일할 직원을 구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는 것이었다. 사람 채용하러 중국 산간 오지까지 돌아다녀야만 해서 자신의 업무가 공장을 가동해서 사업하는 건지 아니면 시골 돌아다니며 일할 사람 데려오는 건지 헷갈릴 정도라는 것이었다. 중국도 점차 소득 수준이 오르고, 또한 내륙도 일자리가 서서히 늘어나면서 젊은이들이 굳이 고향을 떠나 먼 곳까지 와서 힘든 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어렵게 직원을 신규 채용하는 것에 성공해도 여전히 문제가 있는데 구정과 같은 기나연휴만 되면, 직원들이 고향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고 그냥 눌러앉아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구정이나 국경절과 같은 1주 이상의 긴 연휴가 오면 내 친구처럼 중국에서 중소기업 공장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연휴 이후 공장 생산라인 가동할 인력 확보에 항상 비상이 걸린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걱정들이 이제 모두 과거 추억이 되어버렸다. 중국 경제가 지속 성장해 가면서 중국의 산업 구조나 임금 구조도 크게 변했고, 그러한 변화의 결과로 과거에는 중국 최대 생산, 수출 기지였던 중국 남부 도시들에서도 이제는 단순 조립업이나 제조업은 점차 발붙이기 어렵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과거 한국이 그런 변화의 과정을 거쳐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이제 단순 조립과 같은 노동집약적 산업은 점차 버티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최근에는 한국의 대기업들도 그러한 어려움으로 중국에서 철수하는 경우가 허다한 상황이라 하니, 제반 경쟁력이 더 취약한 중소기업의 어려움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결국 한때 천명 이상의 생산라인 직원들을 고용했고 일할 직원을 구하러 산간 오지까지 헤매고 다녀야 했던  친구 처지도 이제는 완전히 바뀌어 반대로 직원 해고하기에 바쁜 처지로 전락버렸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이제는 친구와 함께 한잔할 때 듣는 그의 하소연은 전과는 정반대로 직원 해고하기가 너무나도 힘들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생산할 물량들이 지속 줄어드니 직원을 유지할 수 없었고 결국 그렇게 어려운 인력 감축을 반복하던 그 친구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얼마 전 공장을 폐업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 도입 이후, 한때 수많은 중국의 젊은이들에게 피 같이 귀한 일자리를 제공했었고 또 중국에 적지 않은 외화를 벌어 주어, 중국이 오늘날의 경제성장을 이루는데 촉매제와 같은 중요한 역할을 했었던 중국 남부의 수많은 외국의 제조업체들도 세월이 흘러 이제는 이 친구의 공장처럼 철수해야 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서울 구로공단에 많았던 봉제, 의류, 가발 공장들한때는 한국을 대표하는 수출 산업이었지만 이제 거의 대부분 문을 닫거나 업종을 바꾸어 구로공단이 완전히 변모한 것과 같은 상황이 후이저우 등 중국 남부 도시에서도 재현되고 있는 셈이었다.


공장 문을 닫은 내 친구도 이제 20여 년 넘게 거주했던 고향 같은 후이저우를 떠났다. 그리고 나 역시 친구가 없고 친구 공장이 과거의 역사 속으로 사라진 후이저우에는 더 이상은 갈 일이 없어졌다.


그럼에도 마치 서울의 80~90년대 구로공단으로 돌아온 것 같은 그래서 그만큼 더 정겹게 여겨졌던 후이저우의 공장과 좁은 기숙사, 낡은 구내식당, 허름한 화장실 등등모습은 여전히 너무 그립다. 또 공장 주변의 오래된 골목길, 엉성한 가옥, 물건도 별로 없는 좌판 펼쳐 놓고 장사하는 구멍가게, 반 벌거숭이 상태로 가게 앞에서 세발자전거를 타고서 혼자 놀던 가게 주인 아들 등등 모습 또한 그리운 추억처럼 눈앞에 어른거린다.


(친구 공장 근처의 허름한 상가들 모습)

https://j.map.baidu.com/28/zQB


이제 후이저우의 친구 공장은 사라졌다. 하지만 이 아련한 모습과 기억들은 내 인생의 한순간 후이저우의 허름한 한국 식당에서 술 한잔 나누곤 하던 내 친구의 오래된 모습들 함께 아련한 중국 남부 도시 후이저우의 기억으로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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