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 Chai 지역의 Central Plaza 빌딩 33층에 있던 홍콩 법인의 사무실 구조는 도넛 같은 구조였다. 즉 건물의 중심 부분에 엘리베이터 4대가 있는 통로가 있었고 그런 통로를 중심으로 주변 공간이모두 법인 사무실이었던 것이다.
홍콩스럽다는 느낌이 물씬 드는 화려한 대리석으로 치장된 33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유리로 된 법인의 문을 열고 사무실 공간 내부로 들어오면 제일 먼저 아래 사진에 보는 것과 같은 안내 데스크가 나타났다.
사진) 화려한 엘리베이터 모습과 법인 사무실로 들어오면 가장 먼저 마주치게 되는 안내 데스크.
이 안내 데스크 주변에는 50명 정도 수용 가능한 대 회의실 1개와 10여 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소규모 회의실이 3개가 있었는데 이 회의실 공간들은 법인 직원들 간의 미팅, 혹은 법인을 찾아온 외부 손님들과 법인 직원들 간 미팅을 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대부분의 회사가 그랬지만 법인 직원이 아니면 원칙적으로 사무실 내부로 들어올 수 없었기 때문에 외부 손님들은 이곳에서 직원들과 미팅을 했었다.
홍콩 법인에서는 당시 한 달에 한 번씩 그달의 생일자들을 모아서 전 직원이 다과와 함께 축하해 주는 행사를 하기도 했는데, 그 행사도 역시 이 공간에 있던 대 회의실에서 매달 진행되었다. 한편 법인의 분위기가 거의 언제나 삭막하기만 했던 것과는 달리 이 생일자 축하 파티는 나름 꽤 유쾌하고 부드러운 다소 이색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되고는 했었는데그처럼 평소와는 꽤 다른 특이한 분위기 때문에 내게는 이 생일자 파티가 꽤 인상 깊게 느껴지곤했었다.
사진) 안내 데스크 주변의 회의실들 모습. 중앙에 보이는벽이 목재로 된 회의실이 대 회의실 (2014. 4월)
근무 시간 중에는 법인 사무실 출입구를 항상 열어 놓았기 때문에 안내데스크와 회의실이 있는 이 공간까지는언제나 외부인도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 공간을지나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는 사무실로 들어가려면 위 사진 중앙에 보이는 문으로 들어가야 했는데 이 문은 시건장치가 되어 있어 출입 카드 역할도 겸하고 있었던 회사 사원증을 접촉해야만 열 수 있었다.
한편 이곳의 회의실들 중에는 일 년 내내직원들이좀처럼 사용할 수가 없는회의실도 있었는데, 그 이유는 한국에서 출장 온 엔지니어들이거의 언제나 그 회의실을 지정석처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신 모델들이 홍콩에 도입될때는 짧으면 몇 주 길면 몇 달간 해당 모델이 홍콩의 실제 현지 환경에서 별문제 없이 제대로 작동하는지를 확인하는 테스트를 먼저 진행한 후 그 결과 이상이 없다는 것이 최종 확인되어야만 그 신 모델을 도입하고 판매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신모델이 연간 1개만 도입되는 것이 아니고 적어도 매년 10여 개 이상 줄줄이 도입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보니 그런 신 모델들의 테스트를 위해 엔지니어들이 번갈아가며 한국에서 홍콩으로 출장을 와야 했었고 그렇게 홍콩으로 온 엔지니어들이 서로 협의하면서 테스트를 진행할 공간으로 그 회의실을 주로 사용했던것이었다.
사진) 한국에서 온 엔지니어들이 법인 회의실에서 신 모델 테스트를 진행하고 있는 모습 (2010. 2월)
한편 그 시절 법인에 출장 온 엔지니어들의 생활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새삼 깨우쳤던 사실이기도 한데 이런 테스트를 진행하던엔지니어들은당시 정말로 고생이 많았다. 그들은 언제나 신 모델 출시 시점에 쫓기다 보니 쇼핑 또는 관광의 천국이라는 홍콩에까지 와서도 평일 야근은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간주되었고 주말에도 거의 항상 출근해 사진 속 저 회의실에 하루 종일 저렇게 쭈그리고 앉아서 제품 테스트로 밤늦게까지 시간을 보내곤했었다.
사실 신모델 출시는 정말로 전쟁과 같아서 제품의 성능이나 가격만큼 경쟁사 제품에 뒤지지 않게 도입 타이밍을 맞추어 시장에 내놓는 것도 매우 중요했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한국의 본사나 판매 법인의 입장에서는 그렇게무리한 일정으로라도 테스트를 빨리 마무리해서 제품 도입 일정을 맞추는 것이 절실하게필요했었다.
하지만 거의 한 번도 예외 없이 항상 그렇게 다급한 일정에 맞추어서 테스트를 진행해야만 했던 20~30대의한참 젊은 엔지니어들 입장에서는 번번이 반복되었던 그런 다급함을 맞추는 것이 사실 매우 고된 일이었을 것이다. 정말어렵게 기업에 취직하고도 3년도 채 못 버티고 자진해서 퇴직하는 신입사원들이 많다는 이유도 이처럼 고되게 업무를 해야만 했던 것에도분명 그 원인의 상당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영업과 마케팅 부문에서 오래 근무하면서 어쩌다 해외 법인 법인장까지 된 나 역시도 수십 년간 결코 쉽지 않은 고되고 힘든 직장 생활을 했다고 나름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당시 회사의 엔지니어들이 직급과 나이를 떠나서 거의 모두 신제품 개발과 출시를 위해 정말 밥 먹듯이 '날밤을 새우는' 그런 직장 생활을 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니 내가 겪었던 고생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것 같았고 나름 좀 미안하고 또한 숙연해지기도 했었다.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하는 수준에불과했던 한국과 한국 기업들이 오늘날 세계의 일류 수준으로까지 끊임없이 지속 성장해 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경영자의 날카로운 판단력과선견지명 또한 이에 상응하는 적절한 자본 투여 등도물론있었겠지만그 외에 또 다른 밑바탕에는 한국엔지니어들이 이런 고된 시간을 보내며 보다 더 우수한 제품을 끊임없이 적시에 만들어서 이 세상에 내놓았던 것도 분명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은 결코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회의실이 있는 공간들을 지나서시건장치가 되어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래와 같은 모습의 법인 직원 사무 공간이 나타난다. 직원들 좌석은 각 부서별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좌석 배치는 당시 한국의 사무실과 비슷하게 앞쪽에는 낮은 직급의 직원들이 앉았었고 직급이 올라갈수록 창문이 있는 뒤쪽에 앉는 그런 방식이었다.
사진) 법인 33층 사무실 한 공간 모습. 휴일에 출근해 찍은 사진이라 직원들 모습이 안 보인다. 유일하게 한 명 보이는 사람은 본사에서 출장 온 엔지니어였다. (2010. 2월)
사진으로만 보면 그저 평범한 여느 사무실 같지만, 사실 이 공간에서는 참으로 많이 일들이 있었다. 물론 각각 상이한 개성을 가진 사람들 수백 명이 한 공간에 모여 있던 곳이니 어찌 보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 같기도 하다.
특히 홍콩 부임 초기 약 1년여간은 역시 같은 나약한 인간일 수밖에 없는 법인장 혼자서는 정말 감내하기 어려운 일들이너무나도 많았다.하지만 본사에 강력하고 다양한 조직들이 그토록 많이 있었지만 정작 부임 초기 그렇게 한참 어려울 때는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조직은 찾기 어려웠었고, 결국 내가 법인장이라는 이유만으로 나 혼자서 현안들을 해결해 가기를 기대하는 그러한 분위기였다. 예를 들면, "그러니까 그런 일 해결하라고 법인장이 있는 거죠." 뭐 이런 답까지도 듣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1년여에 걸쳐서 정말 골치 아팠던 문제가 거의 다 해결되고 나니 이제는 반대로 본사 조직의 도움이 그다지 필요도 없는데 오히려 그쪽에서 먼저 접근해 오는 경우가 꽤 있었다....
워낙에 마음고생을 하다 보니 그 시절에는 하루하루 얼굴이 점차 까맣게 변해간다는 얘기를 주변에서 듣기도 했고, 나 자신도 역시 그렇게 느끼기도 했었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그 자리에서 어느 날 정말 갑자기 도망가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그런 상황은 전혀 회피할 수가 없었는데당시 겪었던 일들을 모두 글로 공개하기는 어렵겠지만 그중 상대적으로 덜 민감한 일부를 언급하면 아래와 같은 것들이다.
법인 직원은 부임 초기에는 약 300여 명이 있었고, 이후에 매출이 지속 늘면서2~3년지나서는 약 500여 명까지 그 수가 늘었다. 한편 우리의 학창 시절을 되돌아보면 한 반에 불과 30~40명만 있어도 그 안에는 너무도 다양한 성향의 친구들이 존재했던 것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수의 10배가 넘는 300~500명 정도의 직원들이 한 회사의 같은 공간에서 근무하고 있었으니, 그 구성원들의 다양성을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부임한 후 약 1년여 뒤에는 스스로 퇴사를했지만, 막 부임하고 나니 자신에게 부적절한 행동을 했던 동료 직원이 법인에 근무하는데 그 직원을 법에 고소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그 사건이 발생한 시기에는 홍콩에 있지도 않았던 내게 굳이 찾아와 번번이 반복언급하는 직원도 있었다.
그녀는 평직원도 아니고 한 부서의 책임자로서 법인장에게 직보하는 직급에 있었는데 자신의 그런 잠재적 고소 의향을 법인장이었던내게 반복적으로 언급했던 이유는 내가 법인 대표이니 사전에 참고하시라고 친절하게 배려하는 차원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만일에자신이 소송에 착수하면 일이 커지고 잡음도 생길 것이며그러다 보면결국 법인도 적지 않은 부정적인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종의 협박을 하는 차원에서 내게 그러한 언급을 반복했던 것이었다.그리고 내게 그런 언급을 할 때는그녀의 남편이 현직의 홍콩 변호사라는 것을 꼬박꼬박 강조하는 것도 결코 잊지 않았다.
홍콩 부임 초기 약 반년 간 그녀는 거의 한 달에 1~2번 정도 잊을만하면 내 방으로 찾아와서 똑같은 그 얘기를 반복하곤 했는데, 사실은 그녀가 뭔가 큰 문제를 만들었던 것이 있어 그 일로 해고당할 수도 있는 처지였던지라 자신을 해고하지 말아 달라는 일종의 압박용 카드로써 그것을 내게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만들었던 문제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그녀는 우리 법인에서는 더 이상 비전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약 1년 후 스스로 퇴사했고 그럼으로써 나에 대한 그녀의 괴롭힘은 마침내 종식될 수 있었다.
또 다른 특이한 직원도 경험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법인 직원 중에서는 유일하게 법인 명의로 발급된 승용차용 교통카드를 평일 출퇴근은 물론 출근하지도 않는 주말에도 역시 개인적으로 사용해 오던 직원도 있었다. 즉, 주말에 가족이 유료도로 위로 차를 몰고 장 보러 가거나 또 여행을 가도 그 비용까지 전액 법인에서 자동적으로 부담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법인의 모든 직원이나 아니면 특정 직급 이상 직원은 모두 동일한 혜택을 누리고 있었다면 직원들에 대한 회사의 복지 정책 중 하나로써 그것을 이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법인 내 수백 명의 직원 중 유독 그 직원 혼자만 그런 혜택을 누리고 있었고, 정말 더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것은 법인 내 누구도 왜 그 직원만 그런 혜택을 누리게 됐는지 그 이유를 아무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홍콩섬과 구룡반도 사이의 바닷속에는 차량이 다닐 수 있는 터널이 3개 있었고 홍콩의 차량들은 이 터널을 통해 구룡과 홍콩섬 간을 이동하고 있었다. 이 터널 중 가장 늦게 완공된 터널이 Western Tunnel인데, 이 터널은 그총길이가 불과 2Km 정도밖에 안되는데 반해 이용 요금은 한화로 약 1만 원에 해당하는 꽤 비싼 가격으로 나머지 2개 터널에 비해서 최소 2배 이상 비쌌다. 따라서 개인 부담으로 통행 요금을 지불해야 하는 경우 대부분의 홍콩인들은 그렇게 높은 터널 요금이 부담스러워 좀처럼 이 터널은 이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차들이 많이 이용하지 않다 보니 출퇴근 시 여타 2개 터널이 교통정체로 매우 심하게 막혔던 것과 달리 이 터널은 거의 막히지 않았고 따라서 이 터널을 이용하면 훨씬 빠른 시간에 바다를 건널 수 있는 꽤 큰 장점이 있었다. 그런데 그 직원의 사용 기록을 보면 그러한 장점이 있는 이 터널을 그는 출퇴근 시 매일 같이 회사가 비용을부담하는 상태로 이용해 왔었고 주말 또한 개인적인 용도로 변함없이 이용해 왔던 것이었다.
도대체 아무런 근거도 없고 이유도 없는 상황이라 인사과에 그 교통 카드를 회수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그런 지시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 법인장으로서의 책임감을 갖고 그렇게 지시를 하기는 했지만 사실 한편으로는 그가 홍콩의 악명 높은 조폭인 삼합회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는 흉흉한 소문도 있어서 막상 지시를 한 후 속으로는 나름 꽤 걱정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교통 카드 회수 조치가 모두 완료된 이후에도 다행히 그로부터 별다른 특이한 반응은 없었다.
그가 삼합회와 관련이 있다는 소문들은 그가 스스로 퍼트린 것일 가능성이 높은데, 자신은 그처럼 무서운 사람이니 잘 알아서 건드리지 말라는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알려진 공공연한 사실로 동성애자 직원도 두 명 있었다. 동성애자란 이유만으로 무조건 색다른 시각에서만 언급하는 것은 결코 아니니 오해 없기 바란다. 두 명 중에 한 명은 목소리나 말투가 때로는 여성적으로 보이는 것 외에는 별다른 특이점이 없었다. 그렇지만 나머지 과장급 한 명은 법인 조직 중 한 조직의 부서장이었는데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 부서의 직원들도 꽤 불편해했고 나 역시그랬다.
그러던중에 뭔가 업무상의 문제가 발생하면서 그는 법인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는 회사를 떠나면서 평소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자신의 부서원들을 골탕 먹이겠다는 의도에서 자신이 관리해 왔던 부서의 자료들을 제대로 인계하지 않은 상태로 그냥 떠나 버렸다. 결국 필요한 자료를 한동안 찾지 못했던 그 부서 직원들은 이로 인해 꽤나 고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본사 기준으로는 아니었지만 홍콩 법인 기준으로는 임원급 자리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는 4개의 보직이 있었다. 이 4개 보직에는 4명의 홍콩인 Director가 있었는데, 그중 2 명이 어느 순간부터 정말 서로 원수처럼 지내며 사무실 안에서도 번번이 심하게 말다툼까지 하는 경우도 있었다.그런데 그 말다툼이 때로는 그 정도가 너무 심해 사무실 공간 전체에 울려 퍼질 정도의 고성이 오가기도 했었다.
그러한관계를 풀어 보기 위해 그 두 사람 사이에서 여러 번 중재를 시도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고 몇달이 지나도록 그렇게 반목이 지속되어 이제는 두 부서의 회사 업무도 본격적으로 차질이 발생하는상황에까지 이르게되었다. 그러한 실정에서 마침내 최후의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그중 한 명을 해고해서 서로를 떼어 놓음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던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본사에서도 그 시절 임원들 간에 고성으로 말다툼하는 것을 드물기는 했지만 간혹 보기도 했는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은 어디나 비슷한 것인지 홍콩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홍콩 법인에 근무하면서 같은 인물을 3번이나 입사 면접을 본 황당한 경우도 있었다. 우리 법인에 근무하다 좀 더 높은 보수를 제안하는 다른 회사로 이직한 후 그 회사에서 받던 급여를 자신의 새로운 급여의 기준으로 삼아서 우리 법인에 다시 입사하는 것을 3번씩이나 반복을 했던 직원이 있었던 것이다.
요즘 상황은 모르겠지만 당시 본사의 해외 법인 직원 관리 지침에 의거하면 어떤 직원이 매우 탁월한 성과를 창출해도 그런 직원의 급여를 단기간에 일정률 이상으로 파격적으로 인상시켜 줄 수는 없었다. 비합리적인 과거 관행이 그대로 남아 있어 그랬던 것 같은데 어쨌든 해외 법인들은 본사의 그런 지침을 준수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능력 있는 우수한 직원들 경우에는 때로는 보다 높은 급여를 제안하는 타 회사로 이직해 급여 수준을 일단 높여 놓은 이후에 다시 우리 법인에 그 급여 기준으로 재입사하는 방식을 택하기도 했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두 번 정도까지 그렇게 재입사하는 경우는 이따금 봤어도 세 번째로 그렇게 하는 직원은 그 직원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런데 그 직원의 업무 성과가 꽤 우수했던 것 또한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었고 따라서 그럼에도 불구 그 직원 채용이 탐이 났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인사부서도 함께 관할하고 있던 관리담당은 유사한 사례가 빈번히 재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 직원의 세 번째 입사를 극구 반대했다. 반면 그 직원의 직속 상사인 홍콩인 Director와 담당 주재원은 탁월한 업무 성과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한다는 입장으로 그의 채용을 강하게 주장했었고 결국에는 그들 의견대로 그 직원은 우리 법인에 세 번째로 입사하는 직원이 되었다.
홍콩이 오랜 기간에 걸쳐서 영국의 통치를 받으면서 그만큼 직장에 대한 인식이나 이직에 대한 개념이 한국보다는 조금 더 먼저 서구화됐던 것 같고 그런 배경에서 같은 회사를 3번 퇴사하고 또 3번 입사하는 이러한 특이한 경우도 홍콩 주재 5년 반 기간 경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직원에 대한 세 번째 입사 인터뷰를 할 때는 꽤나 당황스럽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왜냐하면 그 역시 우리와 우리 법인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었고 우리 또한 그에 대해 오랜 기간 같이 근무하면서 이미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보니 인터뷰하면서도 마땅히 질문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법인에서는인사과장 등 5명이 인터뷰에 참여했는데 인터뷰에 참석한 인원 모두 질문 내용을 찾지 못해 한동안 어색한 정막속에서 멍하니 있었던 그때의 다소 우습기까지 했던 인터뷰 현장모습이 떠오른다.
한편 홍콩에서는 이처럼 빈번하게 직장을 옮겨 다니는 것이 일찍부터 보편화되어 있다 보니 직장을 옮기게되면 새롭게 취직한 직장에서 이전 직장들에 Reference Check를 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따라서 전 직장에서 퇴직할 때도 자신의 평판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마지막까지 조심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일반적 관행 개의치 않고 전술한 과장급 직원처럼 자료들을 제대로 인계하지 않고서 깽판 치고 퇴직하는 경우들도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해외 법인 법인장으로서의 업무 중에 단 하나도 가볍게 볼 수 있거나 쉬운 것이 없었지만, 그래도 그중 가장 어려웠던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과거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직원들을 상대하는 것을 그 첫 번째로 꼽을 것 같다. '직원 관리'라는 조금 더 흔하게 사용되는 단어가 있기도 하지만, 직원을 '관리'한다는 표현은 너무 일방적이고 또 옳지 않은 표현인 것 같아 보다 상호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직원 '상대'라는 표현으로 적었다.
해외에서는 외국인이었던 내가 해외 현지에서 비즈니스를 아무리 잘해도 결코 현지에서 태어나고, 현지에서 자랐으며 또 현지 언어와 문화에 모두 능통한 현지인만큼 잘 하기는 쉽지가 않을 것이다. 또 홍콩은 말할 것도 없고 전 세계 어느 곳이나 업무 능력 또 지적 수준에서 나보다 뛰어난 인물은얼마든지 있었다.
따라서 외국인 법인장으로서 내 첫 번째 임무는 비즈니스를 잘하는 우수한 현지인을 채용하여 그 우수한 현지인이 맘껏 법인에서 그 기량들을 펼쳐나갈 수 있도록 환경과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당시에도 믿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물론 그런 믿음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사실 그 시절에 법인 직원들을 상대함에 있어서 수많은 실수와 허다한 오류들을 범하기도 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원칙적으로 그러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인지 법인 매출과 이익은 내가 부임하기 전 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성장을 했고, 아울러 당연히 모두는 아니었지만 비슷한 시기에 법인에서 근무한 직원들이 이후 매우 잘 풀린 경우가 많아서, 그중에는 홍콩 유명 기업의 대표로 스카우트되어 간 직원도 있었다.
길지 않은 인생, 함께 시간을 공유했던 사람들이 잘 풀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을 옆에서 목격하게 되는 것도 꽤나 기분 좋은 일 중 하나이고 나름 복이라면 복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