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출장으로 방문했던 그 시절 중남미 도시들의 기억을 적은 이야기.
16. 중남미를 떠나며....
약 30여 년간 한 회사만 다니다 퇴직했다. 이 땅에서 100년정도를 산다고 가정해도 그 인생의 약 1/3에 해당되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한 직장에서만 보낸셈인데, 삶의 시간이 100년을 다 채우지 못한다면 그만큼 이 직장에서 보냈던내 시간의 비중은 더 커질 것이다.
이 회사에서의 30여 년은 수출 업무를 주로 하면서 프랑스, 캐나다, 중국, 대만, 홍콩, 마카오 등의 해외 국가에서 직장 생활의 대략 반에 해당하는 약 14년간 주재 근무를 하기도 했었고, 또그 외여러 해외 도시로 업무상 출장을 다니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처럼 짧지 않았던 30여 년의 직장 생활과또 해외 경험의 시작점은 바로 이 지구 반대편에 있는중남미였다. 회사에 입사하자마자 중남미 수출부로 배치를 받아 중남미 수출 업무로 처음사회생활을 시작했던 것이었다.
요즘은 해외에 법인이 많이 설립되어있어서 현지 거래선은 거의 대부분 현지에 설립된 법인들을 통해서 거래를 하지만 80~90년대만 해도 한국 기업의 해외 법인은그다지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특히 미국과 유럽처럼 잘 알려진 시장도 아닌 한국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중남미 시장은 당시 한국 기업에게는 이제 막 새로 부각되는 신흥 시장이었고 따라서 중남미 전체를 통틀어 법인이 하나도 없었을 만큼 법인 등 현지조직 인프라는 더더욱미흡했었다.
그러다 보니 중남미 지역 수출을 담당했던 당시에는 본사의 수출부 담당자가 각 거래선과 Telex 등으로 직접교신하며 거래를 했고 신용장도 거래선에서받아 본사에서 직접 수출 진행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해외 법인이 많이 늘어나면서 이후에는 거래선 관련 업무는 대부분 해외 현지법인으로 이관됐고, 본사 수출부 담당자는 그저 그러한 해외 법인을 본사에서 지원하는 역할로 기능이 바뀌었다.
결국 80~90년대 중남미를 담당했던 그 시절이우리 회사 본사에서 해외 각국의 거래선들과 직접 거래를 했던 마지막 시절이었는데, 지금도 기억나지만 그 당시 매월 말만 되면 당월 실적 확정하느라 거의 매일 같이 거래선에 Telex 또는 Fax를 보내서 신용장(L/C)을 빨리 열어달라고 아우성치곤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L/C에 의거하여 은행에서 E/L(Export Licence)을 발급해 줬고, 이 E/L을 근거로해서 세관에서 E/P(Export Permit)를 받아제품을 출하하면 최종적으로 그달의 판매 실적에 포함될 수 있었기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달의목표한 실적을 채우기 위해서는 신용장 입수가 가장 선결적인 요인이었고 실적에 의한 막대그래프 인생을 살던 수출부서 직원들은 그런 이유 때문에 월말에는 모두가 온통 이 L/C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무리하게 L/C에만 매달리다 보니 여러 가지 해프닝도 있었다. L/C는 아직 도착 안 했지만 실적 채우는 것이 급하다 보니 L/C 번호만이라도 받아서그것을 근거로 E/L, E/P까지 모두 진행을 완료하기도 했는데 나중에 정작 L/C를 받아보니 번호가 전혀 달라서 관련부서에서 욕을 몇 바가지씩 얻어먹어가면서 E/L, E/P 모두 수정하러 다니곤 했던 기억도 있다.
또 마감에 임박하여 E/L을 취득하려니 회사 담당 부서에서 너무 늦었는데 그럼에도 굳이 실적을 잡으려면 본인이 직접 은행에 가서 E/L 진행을 하라고 하기도 했다. 결국 그러한 경우에는 은행에 직접 찾아가기도했는데 그때 늦게 신청된 E/L로 꽤나 짜증스러워 하던 은행의 직원과묘한 신경전을 펼치기도 했었다.
은행의 E/L 담당 직원을 찾아가서 회사의 담당자가 적어준 E/L 신청서를 내밀었더니, 그 창구 직원 하는 말이 "글씨를 이렇게 '찍찍'써왔느냐"라고 투덜거리는 것이었다. 나는 이'찍찍'이라는 말에 열이 꽤 많이 받기는 했지만 일단은 내가 아쉬운 입장이니 완곡하게 반박하는 의미로, "찍찍 쓴 것이 아니라, '짹짹' 썼는데 미안합니다"라고 답을 했다.
그런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들고한동안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더 이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E/L을 발급해 줬다. 아마도 나를 쳐다보고는 실적을 잡기 위한 다급함에 너무도 절실했던 당시 내 시선이나 표정에서 혹 살기 비슷한 것이 느껴져서 그렇게 빨리 처리해 주었던 것은 아니었을지....
지금도 기억이 나는 잊을 수 없는 거래선의 명언도 있었다. 월말에 L/C 빨리 보내라고 거의 매일 같이 거래선에 독촉을 했는데 3~4일간 계속해서 아무런 답변도 없었던 거래선이 있었다. 그래서 왜 답도 안 하느냐고 다시 독촉했더니 그때 그로부터 받은 답이 가관이었다. "너네들이 내게 판 제품들 판매하느라 바빴다"였던 것이다. 꽤나 얄미운 답변이었지만 어쨌든 우리 제품 판매하느라 바빴다고 답하니 딱히 반박할 말이 마땅치 않았다.
E/P 신청은 수원에 있던 제품과라는 부서에서 진행했는데, 우리 부서 과장님이 지시하기를 월말 마지막 날 받은 E/L을 들고 수원 제품과로 가서 당월 실적에 포함될 때까지절대 서울로 돌아오지 말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 지시에 따라 실제 그 E/L 들고 가서 거의 반나절 가량 제품과 직원 옆에 서서 애원하다시피 했다.
그런데 그 직원은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 눈 하나 깜짝 않고 내 E/L은 너무 늦었다며 결코 접수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불가했던 일을 신입사원에게 강요한 우리 부서 과장님도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거의 반나절 동안 옆에 서서 애걸복걸하는 데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절했던당시 그 제품과 직원도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었던것 같다.
부산에서 중남미로 출항하는 배에 제품을 선적해야 했는데, 생산 지연으로 출항하기 직전에야 출하가 완료돼서 밤늦게 수원에서 부산으로 이동하는 트럭들을 급하게 구해 제품을 이송시킨 적도 있었다. 그런데 수출 제품 경우 보세 물품을 운송할 수 있는 허가를 받은 트럭을 이용해야 했음에도 그규정을 잘 몰라 허가가 없는 트럭을 사용해서 이후 문제가 되기도 했었다
당시 그 배를 놓쳤으면 거래선의 수입허가 기한이 만료되어 제품이 현지에 도착해도 통관할 수 없었던 상황이라 반드시 그 배에 제품을 선적해야 했던 실정이었는데 잘못된 트럭을 사용해서문제를 야기시키긴 했지만, 그래도 어쨌든 그렇게 급하게 서둘렀던 덕분에 배가 출항하기 전에 제품을 선적할 수 있었다. 아직 뭐가 뭔지 제대로 잘 모르던 신입사원시절 저지른 무지하고 용감한실수였지만 그 무모함 덕에 제품을기한 내 선적할 수 있었던 셈이다.
Arquebi, Curaçao, Carsa, Westminster, Sielca, CCE, Moral, Antares, Brastemp, Brasif, General Supply, IRT, Corripio, Casa Bee, RTA, Majestic....
이 이름들은 내가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까지 사원 시절 담당했던 중남미 거래선들의 이름이다. 이미 30여 년 전의 오래된 과거에 담당했던 거래선들이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거래선들의 이름이 지금도 여전히 정확히 기억이 난다.
그 시절에 회사가 있던 시청 근처 순화동에서 매일 점심과 저녁을 먹으러 부지런히 다녔던 식당들 이름은 이제는 상당 부분 기억이 나지 않는 반면에 이 거래선들 이름만은 잊지 않고 이처럼 모두 기억난다는 것은 필경 그 시절 회사 일과 거래선에 그만큼 신경을 많이 썼다는 의미일 것이다.
서울 올림픽 준비가 한참 진행 중인 1988년 중남미에 있는거래선들과 상담하러 가슴이 설레는 첫 해외출장을 떠나게 되었다. 요즘이야 해외여행이 너무나도 흔한 시절이지만 그 당시는 해외여행이 매우 드문 시절이었다. 나 역시 88년도 그때 출장이 내 생애 처음 해외 국가를 방문하는 경우였고또 비행기를 타 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비록 공군에서 학사 장교로 군대 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대전에 있던 교육 부대 사격장에서만군 생활을 해서 그 전에는 공군에서조차 비행기는 가까이에서 본 적도 없었던 것이다.
당시 출장을 요즘 출장과 비교하면 정말 너무도 큰 혜택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2주나 3주 출장을 떠나면 웬만해서는 그 기간은 일체 회사와 연락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2~3주 간은 회사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난 시간 속에서 보낼 수있었다는 의미다.
요즘이야 항공기 안에 탑승해 있는 시간을 제외하면 출장을 가도 해외 어디에서나 회사의 결재 시스템, 이메일 시스템, SNS, 핸드폰 등을 통해서 항상 회사로부터 연락을 받고 또 연락을 해야만 하지만 당시는 현지에 지점이나 법인도 거의 없는 실정에서 이러한 온갖 시스템들 마저도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었으니 출장만 떠나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2~3주 후 사무실로 복귀한 시점에야만 알 수 있을 정도로 연락이 단절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었는지를당시에는 충분히느끼지 못했는데, 세월이 흐른 후 출장을 다녀도 회사 사무실 안에 그대로있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을 정도로 회사로부터의 연락을 빈번하게 받으며 시달리게 되다 보니 그러한 단절의 행복을새삼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중남미 출장 다니면서 잡다한 사건사고도 있었고 아찔했던 순간도 적지 않았다. 그처럼 당시에는 고생도 참 많았지만,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난 현재 시점에서 다시 되돌려 생각해 보면, 그래도 피 같은 젊은 나이에 중남미 돌아다니며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느낄 수 있었던 것이 정말큰 축복이었던 것 같다.
당시 한국의 한 젊고 미숙한 직장인에게 그렇게 땀 흘리고 시행착오를 겪어가면서 열심히 돌아다니며 일 할 수 있었던 기회와 시간이 주어졌던 것이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었다는 의미다. 주변을 돌아보면 적지 않은 국가 젊은이들이일할 기회조차도주어지지 않아서 과거와 변함없는 빈곤 속에서 허덕이면서 목표도, 기약도, 꿈도 없이 그리 소중한 청춘을 허송만 하고 있는 경우가 정말 얼마나 많은가....
내 사회생활의 첫 시작이었고, 내게는 너무도 깊고 선명한 기억들을 남겨줬으며, 또 내 20대 청춘을 온전하게 바쳤던 지구 반대편 땅 중남미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그때의 내 모습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음이 참으로 아쉽고 서운하다.
미련이 많이 남지 않는 시간이었어야만 했는데 지나고 보니 결과는 결코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소중하고 귀한 그 젊음이미 모두 다 보내버린 이 시점에 그런 아쉬움 토로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코발트빛 카리브 바다,
드넓은 브라질 대평원,
공항에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스페인어 방송,
완전히 뒤바뀐 시차로 취한 듯 몽롱한 정신,
테킬라와 독한 중남미 럼주,
환상적인 치안 현실,
게릴라와 반군들 이야기,
극심한 가난과 빈부차,
Lima의 빈민가,
중남미에서 만난 한국 식당들,
상파울루 진로 식당에서 내려다보이던 거리 모습,
Panama에서 마주쳤던 북한인,
Puerto Rico에서 먹었던 된장국,
Chino라 불리며 놀림당하던 순간들,
샘플 줄에 걸어 목에 매고 활보하던 Miami거리,
Buenos Aires에서 차별받던 일,
Laredo의 일식집,
LA Redondo Beach에서 먹던 게,
백두산보다 높은 도시 Quito의 뜨거운 활주로,
아름다운 혼혈 미인들....
이 모든 기억이 남아 있는 중남미를 이제 떠났지만, 그리고 그 시절로 결코 다시 돌아갈 수 없지만, 이 지구의 반대편에 있는 중남미는 그럼에도 20대 청춘이던 젊은 나의숨결과 발자국과 땀이 새겨진 곳임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