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로 182번지'라는 주소가 표기된 도로변에도 벽돌로 지어진 오래된 건물이 있었는데, 이 건물은 지붕이 통째로 사라진 상태로 사방의 벽만 폐허처럼 남아 있었다. 반파된 건물 안과 벽에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담쟁이덩굴과 잡초가 오래전 과거 목포 역사를 조용히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사진) 지붕이 허물어진 도로변의 건물
목포대에 점차 가까워지자 아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온통 하늘색으로 벽을 칠한 주택도 보였고, 또 일본풍 구조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특이한 지붕을 가진 주택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독특한 모습들은 꽤 이국적이라 이번에도역시 햇살이 가득한 지중해 해안의어떤 마을 혹은 일본 최남단 오키나와나 인근대만의 어느 아열대 도시에 와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목포대가 점차 발전하면서 인근 무안군에 크고 멋진 최신식 캠퍼스가 새로 생겼고 그 캠퍼스로 대부분의 학과가 이전해서목포시에는 음악학과와 미술학과만 남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남은 이 학과마저도 2011년 역시 새로운 캠퍼스로 이사 가면서 목포 캠퍼스에는 이제 실질적으로 남은 학과는 전혀 없게 되었다. 실제 목포 캠퍼스에 도착해 보니 오래된 건물들만 남아 있었고 인적도 역시 거의 없었다. 결국 텅 빈 캠퍼스 건물을 보러 그 먼 길을 걸어왔던 셈이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덕분에 목포대로 걸어오면서 목포의 인상적이고 멋진 공간과 건물들을 접할 수있었기 때문에 아쉬움은 전혀 없었다.
목포대를 떠나 다시 목포역 쪽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저녁 7시경 출발 예정인 기차표를 바꿔서 좀 일찍 서울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서울에 뭐 급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멀리 목포까지 온 김에 좀 더 목포를 구경하다가 예약된 기차표 시간 그대로 목포를 떠나기로 했다. 목포대 다음에 구경할 목적지는 일단목포역에 도착해서 정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약 3시경 목포역에 거의 도착할 때쯤 되니 무안으로 갔던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일이 다 끝나서 약 20분 후 목포역에 기차로 도착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목포역에서 지인과 다시 만나니 3시 반쯤 되었는데, 저녁 먹기는 역시 너무 일러서 목포역 근처의 '젊음의 거리'라는 곳으로 가서 구경도 좀 하고 차도 한잔 마신 후 4시가 좀 넘어 이른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
식당은 목포를 잘 아는 지인이 정했는데, 낙지를 전문으로 하는 '뜰채'라는 식당으로 전국 맛집을 소개하는 유명 방송 프로그램에도 나온 적이 있는 식당이라 했다. 실제 식당에 가 보니 음식 맛도 매우 좋았는데, 음식뿐 아니라 통유리로 된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와 잔디로꽉 찬 정원의 경치역시 매우 인상적이고 매력적이었다.
술을 마시기에는 좀 이른 시간이었지만 이 식당에서 얼큰한 낙지를 먹다 보니 막걸리생각이 슬슬 간절해졌고 결국에는2통을 주문했다. 그런데 같이 간 지인이 술을거의 마시지 않는 타입이라 그 막걸리 2통을 거의 전부 나 혼자 마시게 되었다.
꼭 한번 와보고 싶었던 목포에 마침내 와서 가까운 지인을 만나 함께 맛있는 낙지를 먹으며 멋진 정원까지 바라보고 있다 보니 막걸리가 많이 끌렸던 것인데, 역시 막걸리까지 몇 잔 하고 나니 기분이 더 풀어지는 것 같았다.
한마디로 남도 목포의 찬란한 햇살과 멋과 맛까지 만끽할 수 있었던 인생의 아름다운 한 순간이었던것 같다. 흔하게 하는 말로 "인생 뭐 있겠는가...."라는 그 문장이 새삼스럽게 마음에 와닿던 시간이었다. 유한한 인생의 시간에서 이처럼 화창한 여름 햇살을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보게 될지....
막걸리로 좀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지인과 함께 목포역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지인은 먼저 무안으로 출발했고, 나는 아직 기차 시간이 남아 목포 시내를 좀 더 구경하기로 하고 또다시 목포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걷다 보니 분홍색으로 지붕을 칠하고 하늘색으로 벽을 칠한 꽤 눈에 띄는 아담한 주택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주택은 올라가는 계단까지도역시 특이한 도안으로 꾸며져 있었다. 집과 계단 모두그렇게 정성스럽게 꾸며져 있는 것을 보니 집주인의 애틋한 심미안도 함께 느껴지는 것 같았다.
목포항 바로 앞에는 '목포 종합 수산 시장'이라는 어시장도 있었다. 이 시장은 원래 100년도 넘는 1908년에 '동명동 어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그 문을 열었다 한다. 하지만 시장 내부는 전혀 그렇게까지 오래돼 보이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2004년 시장 시설 현대화 공사가 진행됐고 그때 시장 이름 역시 현재와 같은 목포 종합 수산 시장으로 바뀌었다 한다. 홍어로 유명한 지역답게 홍어 취급 상점이 많았다.
어시장을 구경하고 다시 목포역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올 때처럼 큰길로 가지 않고 시장 주변의 골목길을 따라서 걷기로 했다. 그렇게 시장 옆 골목을 어느 정도 걷는데 특이한 모습을 가진 둥근기둥 같이 생긴 작은 주택이 나타났다. 현재는 많이 낡은 모습이었지만 독특한 그 외관 디자인으로 볼 때 처음 이 주택이 지어졌을 때에는 그 디자인으로 오고 가는 행인의 눈길을 꽤 끌기도 했을 것 같았다.
기차 시간도 가까워져서 목포 구경은 이제는 마무리하기로 하고 목포역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돌아가는 길에 앙증맞은 소녀 그림이 그려져 있는 좁은 골목을 마주칠 수 있었다.
골목 안은 휑하니 비어 있었고 좌우측 건물 사이로 골목 위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을 볼 수 있었는데, 그런 장면이 벽에 그려진 소녀의 모습과 꽤잘 어울려 마치 한 폭의 정물화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래 사진이 그 골목 사진인데, 이 사진이 목포라는 도시를 처음이자 아직까지는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2020년 8월 무더운 한여름 목포에서 찍었던 마지막 사진이다.
사진) 소녀와 별과 하트가 그려진 골목 담벼락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이는 목포역 인근 골목 모습
생각해 보면 목포는 좀 색다른 도시다. 목포를 주제로 크게 히트했던 곡이 2곡이나 되기 때문이다. '목포는 항구다'와 '목포의 눈물'이 그 두 곡인데, 서울 포함 목포보다 규모가 훨씬 더 큰 한국의 도시들도 그 도시를 주제로 한 히트곡이 전혀 없거나 고작 한 곡 정도인 반면 인구 약 20만에 불과한 목포를주제로 한 히트곡은 2곡이나 된다는 것이 좀 특이한 현상이라고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기차에 올라탔고 이제 기차는 서서히 목포역을 떠나 서울로 향하기 시작했다. 기차 안에서 목포에 관한 유명곡 '목포의 눈물'이라는 노래를 생각하며 왜 굳이 목포를 눈물과 연관 지어 가사를 만들었는지 궁금해졌다.
[ 목포의 눈물 가사 ]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데
부두의 새 아씨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임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임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쩌다 옛 상처가 새로워진다
못 오는 임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목포의 눈물' 가사는 이렇게 되어 있다. 어찌 보면 단순히 돌아오지 않는 임을 그리는 그러한 가사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처럼 연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꽤 섬찟한 가사도 있다.
그래서 좀 더 검색을 해 보니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노래 가사를 만든 분은 목포에서 태어난 문일석이란 분인데 일제 강점기 시절에일본의 와세다 대학 문학부까지 졸업한 엘리트였다 한다. 대학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던 그 시절에 대학을 졸업했을 뿐 아니라, 유학까지 가서 졸업을 했으니 당시에는 꽤 엘리트였던 셈인데 바로 이 분의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이 이 곡에서 '목포의 눈물' 가사로 표현되었다 한다.
즉, 이 곡이 만들어졌던 당시로부터 약 삼백 년 전의 이순신 장군의목포 노적봉 활약 등과 연관 지어 작사가가 가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 노래에서 그리워하는 '임'은 바로 이순신 장군의 넋과 정신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런데 노래 가사의 이런 미심쩍은 부분을 의심했던 왜경이 눈치를 채고 작사가를 체포해 가사의 참된 의미를 추궁하게 되면서 작사가는 고문을 받기도 했다 한다.
결국 일제 강점기 시절에는 가사 일부분이변경되어 노래가 불려지기도 했고, 작사가 문일석 본인은 왜경 감시를 피해 한반도에서는 목포에서 가장 먼 도시중 하나인 함경남도의 함흥으로까지 도주해 그곳에서 숨어 살다 28세라는 아직은 너무도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고 한다.
목포의 눈물 가사를 쓴 때가 24세 때였다 하니, 작사를 하고 불과 4년 만에 결국 그 노래 가사로인해 사망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