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니카) 꼬리표의 나라 (2-2)

■ 그 출장자의 서글픈 기억들 (8편 중남미-03)

by SALT

88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출장으로 방문했던 그 시절 중남미 도시들의 기억을 적은 이야기.



산토도밍고, 도미니카공화국

Santo Domingo, DOMINICAN REP.



3. 꼬리표의 나라 (2-2)


전편 "2. 꼬리표의 나라 (2-1)"에서 이어짐....




당시 도미니카에 있던 우리 거래선 회사 이름은 스페인어로 '꼬리삐요(Corripio)'로 회사 창립자 Ramon Corripio의 성(姓)을 따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도미니카에서 이 회사는 그 시절 나름 꽤 큰 규모의 대기업이었다.


(Corripio 소개 자료)

https://en.m.wikipedia.org/wiki/Grupo_Corripio


(Corripio 본사 건물)

https://do.worldorgs.com/catalogar/santo-domingo/oficinas-de-empresa/edificio-corporativo-i-grupo-corripio


(Corripio 매장)

http://retaildesigns.blogspot.com/2011/08/corripio-santo-domingo.html


한편 이 회사 이름 중간에 있는 'rr'은 스페인어에서는 마치 혀를 굴리듯이 발음해야 했기 때문에 스페인어를 학습하지 않은 한국인에게는 그 발음을 제대로 하기가 꽤 어려웠다.


(스페인어에서의 Corripio 발음)

https://translate.google.co.kr/?hl=ko&sl=es&tl=ru&text=corripio%0A&op=translate


그러다 보니 그 당시 스페인어를 모르던 우리 회사의 공장 동료들은 발음하기 편하고 또 기억하기도 쉽게 이 거래선의 이름을 '꼬리표'로 바꾸어서 부르기도 했다. 내 거래선 회사 이름이 '머리', '꼬리' 할 때의 '꼬리표'로 바뀐 인데, 실제 그 발음이 한국어 꼬리표와 비슷하니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사실 스페인어 발음은 일반적으로는 한국인이 발음하기에 대체로 큰 무리가 없을 만큼 평이하다. 하지만 이 'rr'처럼 간혹 특이한 발음이 드물게 있어서 중남미의 다른 거래선들 경우도엉뚱하고도 희한한 이름으로 공장에서는 불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예를 들어 페루 거래선 이름은 원래 '까르사(Carsa)'인데 공장에서는 '까자'로만 불렸으며, 코스타리카의 거래선인 '아르~깨비(Arquebi)'는 '도깨비'로 불렸다. 결국 소중한 내 중남미 거래선들은 모두 '꼬리표'에 '도깨비'에 '까자'등 해괴한 이름을 가진 거래선으로 변해 버렸는데, 당사자인 거래선들이 지구 반대편 한국에서 자신들이 이처럼 매우 이상한 의미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알았으면 꽤 섭섭했을 것 같다.




번씩이나 출장 가서 만났던 Corripio와는 무슨 내용으로 상담을 했었는지는 이젠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지만 생애 처음으로 방문한 외국 국가였던 카리브해 섬나라인 도미니카의 너무 아름다운 해변 풍광과 코발트색의 눈부신 바다는 지금도 눈에 선하다.


바닷물 색이 그런 코발트색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실물로 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고 또 카리브해 해변에서 감미로운 음악을 들으며 시원한 맥주 한 잔 하던 그 분위기도 너무나 지겹기만 했던 군대 생활에 이어지는 각박하고 힘겨운 직장 생활로 연이어 찌들어왔던 나 같은 한국의 말단 사원에게는 그야말로 오랜만에 누려보는 엄청난 사치와 호강이었다.


그때 들었던 특이하고 감미로운 노래는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 후 90년대 중반 어느 한국 가수가 부른 레게(Raggae) 풍의 그런 음악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는 그러한 음악이 레게 음악이라는 것도 몰랐다.


(90년대 중반 유행했던 레게 음악, 03:47)

https://www.youtube.com/watch?v=n7-y0X5reVc




도미니카에는 섬유공장을 운영하던 대학교 선배도 있었다. 당시 한국에서 미국으로 섬유 제품을 수출하려면 까다로운 제약들이 많았었는데, 카리브해의 국가들 경우에는 미국과 별도의 협정이 체결되어 있어 도미니카에서 생산한 제품을 미국에 수출할 때는 그러한 제약을 피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한국의 섬유 업체들이 도미니카로 많이 진출해 도미니카에서 섬유제품을 생산한 후 미국으로 수출을 하곤 했는데, 이 선배도 그런 공장을 운영하는 분들 중 하나였던 것이었다.


(도미니카의 한국 섬유 공장들, 1989년 기사)

https://mnews.joins.com/article/2340582


그런데 이 선배는 이미 도미니카에 거주한 지 오래돼서 이제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도미니카에서 태어난 두 딸 때문에 돌아가지 못한다고 했다. 한국 공항에만 내리면 너무나도 정신없이 돌아가는 한국의 모든 것에 두 딸 모두 바로 경직되곤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한국의 그런 삭막한 현실에 두 딸이 도저히 적응을 하지 못할 것 같아서 부득이 귀국하지도 못하고 여전히 도미니카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사실 일 년 내내 온화한 날씨에, 길에는 열매를 먹을 수 있는 과실수가 즐비하고, 국방부 앞 초병은 총을 옆에 내려놓고 반쯤 걸터앉아 쉬고 있고, 신호 위반으로 경찰에게 걸려도 잔돈이 없으니 돌아오는 길에 벌금을 내겠다고 말하면 그저 보내주는 그런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에게 한국은 정말 너무 많이 다른 무섭고도 각박한 사회로만 보였을 것이다.


내가 해외 국가로는 생애 처음 방문했던 도미니카에 도착해 한국과는 너무나도 다른 그들의 낙천적인 삶의 방식을 보고 너무도 큰 문화적 충격을 받았던 것을 생각해 보면, 이와는 정반대로 도미니카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 선배의 아이들이 한국에서 보게 된 악다구니 같은 한국인의 삶의 방식들이 얼마나 큰 충격이었을지 충분히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너무도 낙천적인 도미니카 사람들의 삶의 방식뿐 아니다, 그 외에도 한국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또 다른 꽤 특이한 풍습을 경험하기도 했다.


한 번은 저녁 식사를 하러 갔던 식당에서 소변을 보기 위해 화장실에 들렀다. 그런데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니 소변기 옆에 어떤 중년 남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서 있었다. 소변을 보러 왔으면 소변을 보던가 아니면 나가든가 해야 하는 데 그저 화장실 안에 서서 허공만 보고 있으니 소변을 보는 데 신경도 꽤나 쓰였고 어떤 면에서는 다소 무섭기도 했다.


하지만 변함없이 계속 그렇게 서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못 본 척하고 내 볼 일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오면서 손을 씻고 화장실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갑자기 그 사람이 내게 뭔가를 '쑤~~욱' 내밀었다.


깜짝 놀라서 쳐다보니 하얀색 물건이었는데 좀 더 자세하게 보니 작은 수건이었다. 난 얼떨결에 그 수건으로 손을 닦고 화장실을 벗어났다.


자리로 돌아와 다른 사람들에게 방금 전 겪은 황당했던 경험에 대해 얘기했더니, 선배들은 웃으면서 그것은 일종의 화장실 서비스로 그렇게 사람들이 볼 일을 다 마치는 것을 기다렸다가 수건을 건네주는 것이 그 사람의 일이고 그 일 대가로 그 사람은 팁을 받는다고 했다.


즉, 실업이 많고 일 자리가 없으니 그런 식으로 화장실에서 수건을 건네주는 거의 불필요한 일까지 하면서 받는 팁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도 있었던 것이었다. 이후에도 중남미 출장을 다니면서 유사한 경우를 몇 번 더 경험했는데 이미 경험이 있었던 터라 그때는 그렇게 놀라거나 불편해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경험을 하고 나서 한참 후인 2015년에 제작된 한국 영화에서 그 당시 경험했던 것과 너무 흡사한 장면을 보기도 했다. 물론 내가 상황을 이해 못해 팁을 주지 못했던 도미니카에서의 경우와는 달랐지만 어쨌든 '내부자들'이란 영화에서 주인공이 수건을 들고 화장실에서 서 있다가 팁을 받는 장면이 너무 유사했던 것이었다.


(영화 '내부자들'중 화장실 장면)

https://sq-al.facebook.com/1handsun/videos/916129311817625/




주차할 때 거리 아이들에게도 팁(?)주는 특이한 모습도 보았다. 섬유공장을 하는 그 선배 차를 타고서 식사를 하러 갔는데 식당에 도착해 근처에 주차하니 주변에서 놀던 동네 아이들이 선배 앞으로 바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리고는 마치 서로 꽤 잘 알고 있는 관계였던 것처럼 그 선배를 빤히 바라보며 뭔가를 기다렸는데, 그 선배는 아무런 말도 없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동전들을 꺼내서 그 아이들에게 몇 개씩 나누어 주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그 선배는 이렇게 동전을 주면 식사 중 도난 등 차에 위험이 있으면 아이들이 알려 준다고 했다. 그런데 반대로 그렇게 몰려들었는데도 동전을 주지 않으면, 오히려 그 아이들이 차를 긁어 버리거나 고장 내 버린다는 것이었다.


결국 아이들도 잘 알고, 선배 역시도 알고 있던 그 사회에서 통용되는 묵시적인 불문율을 상호 간 이행을 했던 셈인데, 한마디로 동전 몇 개로 아군과 적군이 완전히 갈리는 그런 상황이었다.




도미니카는 2019년 기준 인당 GDP가 약 8,500불이었다. 따라서 그다지 잘 사는 나라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번잡한 도심에서 벗어나 한적한 바닷가에 가니 정말 너무도 멋지고 고급스러운 주택들이 즐비하게 있는 그런 동네가 있었다.


그 동네는 인적이 꽤 드문 지역이었음에도 명품이나 보석과 같은 제품들을 파는 고급스러운 매장들도 많이 있어서 다소 의외였는데 알고 보니 그 동네는 현지인이 거주하는 동네가 아니라 미국의 돈 많은 부자들 별장이 몰려 있는 곳이었다.


즉 그곳의 멋진 주택들은 미국의 부자들이 여름 휴가철에 도미니카로 휴양 올 때 한동안 거주하는 그런 주택들이었고 그곳의 명품 매장도 바로 이런 미국 부자들을 주 고객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이었다.


선배를 따라서 그 동네 매장 몇 군데를 방문하기도 했는데, 직원들 태도, 영어 구사능력, 매장의 인테리어, 전시된 제품 등 모든 것이 도미니카의 수도 산토 도밍고 시내에서 봤던 것과는 역시 너무 달랐다. 대다수가 가난한 도미니카인들이 사는 공간과, 돈 많은 미국의 부자들이 여름 휴양지로 살고 있는 공간은 도미니카 땅에서도 예외 없이 달랐던 셈이다...




도미니카에는 좀 색다른 기억도 있다. 바로 도미니카를 두 번째로 방문했던 90년대 초 수십만 달러에 달하는 현찰을 지니고 서울에서 출발해 도미니카에서 만났던 파나마 지점 주재원에게 전달해 준 일이었다.


그 당시는 마침 도미니카 바로 옆에 있는 파나마가 미국의 침공을 받고 있던 상태였다. 그런데 그렇게 두 국가가 전쟁 상태에 있다 보니, 본사가 파나마 지점에 매달 송금해왔던 지점의 운영 자금을 제대로 송금할 수가 없었다. 파나마에 대한 미국의 금융 제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군의 파나마 침공 당시 모습, 1989년)

https://blog.daum.net/philook/15721724


전쟁 속 혼란으로 지점 창고가 떼강도에 털리는 등 극심한 혼란 상태에 있었던 파나마 지점은 몇 달째 송금을 못 받고 있으니 운영 자금은 말할 것도 없고 당장 주재원들 생존에 필요한 돈조차도 절박한 실정이었다.


결국 본사에서는 인편을 통해서라도 자금을 송부하기 위해 파나마 인근 국가로 출장 가는 직원들찾았고, 마침 내가 인근 도미니카에 출장 가려던 시점이라 나에게 연락이 왔던 것이었다.


중남미로 출장을 떠나기 전날이었는데 회사 자금부서에서 갑자기 보자고 연락이 왔다. 그리고는 미국 달러로 수십만 달러나 되는 엄청난 액수의 현찰을 주면서 도미니카에까지 가지고 가서 거기서 파나마 주재원을 만나서 전달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사실 그렇게 큰 금액을 그것도 전액을 현찰로 들고 치안이 좋지 않기로 유명했던 중남미로 가는 것이 솔직히 너무 많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파나마 주재원들이 전쟁통에 운영 자금을 못 받아서 그들의 생계까지도 걱정해야 할 상황이라는데 모른척하고 거절만 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게다가 당시 그 지점에 있던 주재원들은 모두가 대학 선배들로 개인적으로도 잘 아는 사이였다. 결국 자금부서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요즘도 그렇지만 90년대 초 그 당시에는 외화 반출이 훨씬 더 까다롭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금액도 한화로 수억 원이 넘으니 반출 절차는 더 까다로웠다. 요즘도 수억 원이라면 꽤 큰돈인데, 30년 전인 1990년대 초에는 그 돈이 얼마나 큰돈이었겠는가?


그런데 그러한 복잡한 반출 절차는 회사 자금부서에서 모두 알아서 처리했고, 그 결과로 내 여권에는 적법한 외화 반출 절차를 완료했다는 증빙과 내가 들고나가는 금액이 표기된 도장만 찍히게 되었다.


그렇게 수억 원의 현찰을 몸에 지니고 탈 없이 도미니카에 도착한 후에 그곳에서 파나마 주재원을 만나 무사히 전달해 주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는 아무런 문제조차 없었던 일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때 수억 원의 현찰을 들고서 파나마 주재원에게 전달해 줄 때까지는 혹 도난이라도 당할까 봐서 출장길 내내 마음을 졸이며 온갖 걱정을 했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내 허리를 수억 원의 미국 달라 현찰이 들어있는 띠로 칭칭 감아서 다녔던 것은 내 인생에 있어서 그때가 처음이었고 아마 결국에는 마지막이 될 것 같다. 남은 인생에서 언제 또 그런 엄청난 경험을 하겠는가....


90년대 초반 대기업 사원 월급이 약 50만 원대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출장 때 가져간 수억 원에 달하는 그 거액을 분실하거나 도난당하고 만일에 그 결과를 내가 책임져야만 했다면 아마 나는 그 회사에서 죽을 때까지 평생을 일해도 그 돈 다 갚지 못했을 것이다.


생애 처음 방문했던 해외의 국가이며, 카리브해의 아름다운 섬나라이며, 소중한 거래선 '꼬리표'가 있던 도미니카 섬에 대한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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