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출장으로 방문했던 그 시절 중남미 도시들의 기억을 적은 이야기.
리마, 페루
Lima, Peru
4. 리마빈민가경험하기
Peru에는 'Carsa(까르사)'라는 거래선이 있었다. 이 Peru 거래선은 우리 제품을 CKD(Complete Knock-Down)나 SKD(Semi-Knocked-Down) 상태, 즉 완전히 부품으로 수입하거나 또는 반조립품 상태로 수입을 해서 최종적으로 페루에서 완제품으로 조립한 후 판매하는 그런 업체였다.
당시 중남미 대다수 국가는 자국 산업 보호와 육성을 위해 완제품 수입에는 꽤 높은 관세를 부과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수입업체들은 이런 식으로 부품이나 반제품 상태로만 전자 제품을 수입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중남미 영업을 하며 거래선에게 가격을 제시할 때는완제품의가격만이 아니라,그 완제품을 구성하고 있는수천개나 되는 부품의 가격도 함께 모두 일일이 적어서 제시해야만했었다.
꽤 오래전 일이지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 시절사무실 책상에밤늦게까지 앉아서 그다지 정확하지도 않았던 수천 개의 부품 리스트에 씩씩거리며 하나하나 가격을 입력하곤 했던 어찌 보면 가련한 당시의 내 모습이다시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하다.
한편 그 시절에는'BOM(Bill of Material)'이라고 불렸던 부품 리스트 자체도 너무나 부정확했지만, 무엇보다부품별 정확한 가격 자료를 확보하기가 어렵던 시절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부품별 가격도 정말로 황당하지만 구매 부서나 개발 부서 직원이 아닌 수출부 담당자였던 내가말 그대로 '대충' 알아서 입력하고는 했었다.
그런데도 그처럼 엉성한자료를 바탕으로 때로는 수억 원에 달하는 수주가 성사되기도 했으니 이제 와서 되돌아보면 참 웃기고도 슬픈 시절이었던 것 같다.
사실 당시 웃기고도 슬픈 사례는 너무나도 많았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우리가 부품 상태로 선적한 제품 일부에 특정한 부품이 빠져있고 대신 다른 물건이 도착했다고 거래선에서 항의를 해와 공장에 전달했더니 공장 자재부에서는 부품이 빠졌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며 부품을 못 보내겠다고 계속 우겼다. 결국 거래선에 사진을 찍어 보내달라고 요청했는데 보내온 사진을 보니 기가 막혔다. 그 사진에는 우리 회사의 로고가 선명하게 박혀 있는 누런 공장용 실내화가 몇 개나 들어 있었던 것이다....
한국의 실내화가, 그것도 새것도 아니고 한참 신고 다녔던 중고 실내화가 지구 반대편 페루의 거래선 공장에 전자부품 대신에 수출되어 도착했던 셈인데, 이제는 너무나도 대단한 글로벌 기업이라는 이 회사도 과거 한때는 이런 모습이었던 시절도 있었다는 것이 좀처럼 믿어지지가 않겠지만 실제로 그런 시절도 엄연히 있었다.
'Carsa'란 Peru 거래선 이름을 한글로 적으면 '까르사'에 가까운데, 여기서 중간의 'r'은 좀 굴려서 발음을 해야 한다. 하지만 스페인어를 배워도 한국인에게는 그 발음을 하기가 쉽지 않은 경우가 많았는데, 그 당시 우리 회사 공장에서는 아예 스페인어 자체를 아는 사람이 전혀 없으니 이 Carsa를 발음하기 쉽고 또 기억하기도 쉽게 그저 '까자'라고 불렀다. 그런데 사실 Carsa를 영어로 읽으면 '까자'와 꽤 비슷하게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Carsa에서 우리 제품을 담당하던 직원은 'CSA'란 약칭을 사용하는 여성이었다. 그녀의 원이름은 Carla Sessarego Arguello였는데 워낙 길다 보니 Telex와 같은 공문에서는 앞자만을 따서 CSA라고 표기했던 것이다. 참고로 한국이나 영어권과 달리 스페인어 이름에는 아버지의 성과 어머니의 성이 모두 들어가서 그녀의 이름 두 번째의 Sessarego는 아버지의 성이고 그다음의 Arguello는 어머니의 성이었다.
페루는 중남미 국가들 중에서도 원주민의 인구 비중이 유독 높은 높은 국가 중 하나였다. 즉 인구의 거의 반에 해당하는 약 45%가 원주민이고, 백인이 15%, 백인과 원주민 혼혈 메스티소(Mestizo)가 약 37%였다. 아르헨티나, 파나마,콜롬비아, 칠레, 베네수엘라처럼 국민 대부분이 백인이거나 아니면 메스티소인 경우와는 꽤 다른 상황이었다.
CSA는 페루 인구의 약 37%를 점하는 메스티소였는데, 그 외모가 매우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있다. 피부색도 꽤 희고, 인상도 얼핏 보면 백인처럼 보였는데, 조금 더 자세히 보면 과거 '인디오'라 불리던 원주민의 특징과 느낌도 또 꽤 갖고 있었다. 서양인 같으면서도 어찌 보면 또 원주민 같은 그런 그녀의 묘한 모습이 내게는 꽤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기억이 있다.
Carsa 직원 중에는 Engineer로 일하는 있는 중국인 남자 직원도 한 명 있었는데, 상담 후 그날 저녁 식사는 그 직원이 접대를 해줬다. 그는 중남미 최대 규모의 중국 식당이라며 Lima에 있는 'Kuo Wha(國華)'라는 중국 식당으로 나를 초대했는데 가 보니 실제로 식당 내부에는 작은 호수까지도 있었고, 방만해도 40~50개가 될 정도로 꽤 큰 식당이었다.
식사하면서 그로부터 꽤 인상적인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당시는 80년대 말 90년대 초로 중국의 경제가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훨씬 이전이었다. 따라서 중국의 국제적인 위상, 군사력, 경제력 등 수준이 지금과는 달리 현격히 낮은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그 중국인은 세계 지도까지 보여주며 식사 내내 조만간 중국이 세계 최대 강국 중 하나로 부상해 미국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가 될 것이라고 열변을 토하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당시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던 중국의 위상이 향후 그렇게까지 상승할 가능성이 그다지 높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었고, 따라서 그저 자긍심이 매우 강한 중국인이라는 생각에서만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보면 당시에 그가 말했던 것들 거의 대부분이 이미 엄연한 현실이 되어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좀 섬찟하기까지 할 정도인데, 과거 30여 년 간 이루어진 결과들을 보면 앞으로 다시 30여 년의 세월이 더 흐르고 나면 과연 그시점 중국의 위상은 또 얼마나더 변해있을지 좀 섬뜩하기도 하다.
중국의 급성장이 한국에 호재로 작용하거나 최소한 관계가 없으면 문제가 없으련만, 최근 상황을 보면 중국의 위상이 상승하면 할수록 과거 역사에서 너무오랜 기간 그래 왔던 것처럼 한반도를 무시하고 괴롭히는 그런 모습으로 중국이 다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 너무나뚜렷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Peru에는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라는 거래선도 있었다. Carsa가 Peru의 대기업 중 하나였던 것에 반해 이 거래선은 훨씬 작은 규모의 수입상이었는데, 실제 Peru에 출장 와서 이 회사를 직접 방문해 보니 직원도 몇 명 없었고 사무실도 꽤 좁고 어두웠다.
이 거래선 사장은 외모로 볼 때 완벽한 백인이었는데, 그의 성이 'Cohen'이었던 것으로 봐서 그가 유태인 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Cohen은 유대교의 제사장을 의미하는 단어로 이스라엘인에게는 지금도 가장 흔한 성 중 하나라고 한다.
이 거래선은 꽤 특이한 점이 하나 있었다. 거래선은 분명히 페루에 있었는데, 신용장과 선적서류 등 수출과 관련되는 모든 서류는 일본에서 발급됐고 또한 일본으로 송부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제품 수출은 Peru로 하고 구매와 관련된 모든 결정도 Peru에서 했지만 선적 및 통관 등과 관련되는 서류만은 일본 업체와 거래하는 방식이었던 셈이다.
아마도 수입관세를 줄이기 위해 일본에서 통관용 서류들을 다시 작성하는 것 같았는데, 뭘 어떻게 했는지는 그들만의 Know-How라 당시나 지금이나 잘 모른다. 아마도 한국의 우리 회사로부터 제품을 수입하기 전에는 일본에서 제품을 수입해 왔는데 그때 Westminster 선적 서류를 담당했던 일본인들이 오래 기간 그들과 거래해오면서 관세를 절감할 수 있는 특별한 서류 작성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고, 한국의 업체로 거래선을 변경한 이후에도 그 Know-How를 지속 활용하기 위해 그들을 통해서 거래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처럼 좀 애매하긴 했지만 어쨌든 우리에게 거래선이라고 볼 수도 있는 그 일본인들을 한번 만나보기 위해서 중남미 출장에서 돌아오는 여정에 일본에 들러 그들을 만났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주소를 들고 찾아 가보니 회사 사무실 같은 곳이 아니라 주택가에 있는 웬 정미소가 나타났는데, 다시 확인해 봐도 역시 그곳이 그들의 사무실이어서 좀 놀라기도 했었다.
그 정미소 안에는 환갑이 훨씬 넘어 보이는 남자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과의 상담 내용은 통상 다른 상담에서 하는 것처럼 우리가 판매하는 제품에 관련된 것은 전혀 아니었고 그저 그들이 요구하는 서류 작성법과 관련된 내용뿐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들 덕분에 중남미 장사를 하면서 중남미와 전혀 관계가 없는 일본에까지 가 보게 되는 기회도 가질 수 있었고, 아울러 회사에서 한 평생 전자 제품을 수출하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해외에 있는 정미소에서 상담을 하는 꽤 특이한 경험도 할 수 있었다.
한편 그 출장이 내겐 일본을 방문하는 첫 번째 기회였는데, 이렇게 말을 하면 좀 이상하지만 장기간의 중남미 출장에서 돌아와 일본에 도착하니 마치 이미 고향 서울로 돌아온것 같은 꽤 편한 마음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건물이나 지하철 등 시내 곳곳의 모습이 서울과 흡사했던 것도 그런 이유 중 하나였겠지만, 무엇보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중남미에서 겪었던 것과 달리 나와 좀처럼 구분이 안 되는 똑같이 생긴 사람들이니 그것에서부터 마음이 매우 편했던 것 같다.
중남미에서는 어디를 가도 바로 외국인으로 인식되어 주변 시선을 받아야만 했었는데 일본에서는 말만 안 하고 있으면 그 누구도 날 외국인으로 보지 않는 그것이 그렇게 편했던 것이었다.
중남미는 워낙 먼 곳이라 한번 출장을 가게 되면, 보통 3주 정도 그 지역에 머물며 여러 국가들을 순차적으로 방문해서그 국가의 여러 거래선들을 만나본 후 한국으로 돌아오고는 했었다. 그러다 보니 출장 중간에 주말이 끼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는 해외 지점이나 법인이 많지 않던 시절이라 거래선이 근무하지 않는 주말에는 객지에서 철저하게 혼자 지낼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은 그런 주말을 페루의 수도 Lima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페루는 애당초 워낙 치안이 안 좋았던 데다가 '빛나는 길 (Sendero Luminoso)'로 불리는 공산 게릴라 단체의 테러 활동까지 꽤 활발하던 시절이라서 심지어 호텔 앞에는경비원들이 총까지도 들고 서 있었는데그들이 들고 있던 총도 작은 권총 같은 것이 아니라 꽤 큰 기관총이었다.
분위기가 이처럼 험악하다 보니 겁이 나서 혼자 호텔 밖을 돌아다니며 구경을 할 수는 없던 실정이었고, 결국 일요일 하루 종일 호텔 방 안에만머물면서 너무 답답하게 시간을 때워야 했었다. 그러다가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호텔의 벨 보이가 내가 부탁했었던 무언가를 방으로 가지고 왔고, 무료함에너무 지쳐있던 나는 그 직원에서 내 방에서 술이라도 같이 한잔 하겠냐고 무턱대고 물었다.
한국에서라면 당연히 호텔 종업원이 거절했겠지만 워낙에 낙천적이고 또 즉흥적인 곳이 중남미라서 그 종업원은 마침퇴근할 시간이라고 말하며 흔쾌히 동의했고 그렇게 내 호텔 방 안에서 술판이 시작되게 되었다. 그런데 서너 잔 정도만 마시려고 했던 그날의 음주는 결국에는 둘이서 럼주 한 병 모두를 다 비우는 것으로 끝이 나게 됐고, 그 독한 중남미의 럼주를 반 병이나 마신 나는 이미 꽤 취한 상태가 되었다.
그때 그 종업원이 자기 집에 가서 한 잔 더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나는 흔쾌히 동의한 후 그와 함께 택시를 타고 그 친구 집으로 갔다. 술에 취해서 판단력이 흐려진 상황이라 겁도 없이 따라가겠다고 답을 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하니 과거 서울 변두리 산 꼭대기까지 판잣집들이 가득하게 들어서 있던 것처럼 언덕 위에 판잣집 같은 허름한 집들이 가득 찬 동네가 눈에 나타났다. 그 순간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아, 뭔가 잘 못 돼 가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머리를 번쩍 스치고 지나갔다.
돈을 노리고 사람을 인질로 잡는 경우가 허다한 곳이 당시 페루였는데, 내 경우는 스스로 자진해서 인질이 되는 길을 택하고 있다는 후회가 뒤늦게나마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나는 그 종업원이 이끄는 그대로 좁디좁은 미로와 같은 골목길들을 지나서 마침내 어떤 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해 눈에 보이는 광경을 보니 방금 전까지 너무나도 걱정했던 근심들을 모조리 한순간에 떨칠 수 있었다.
그곳에는 만면에 너무 푸근한 미소를 짓고 계신 인상 좋은 할머님과 할아버님 그리고 부인과 어린아이들까지도 함께 있었는데 그러한 분위기를 보니 그 종업원이 일단 납치하기 위해 날 이곳으로 데려온 것은 결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거기서 그분들과 같이 뭔가를 더 먹었고, 또 뭔가 한참 말을 했는데, 뭘 먹었고 무슨 말을 했는지는 이제는 기억이 없다. 하지만 그 집에 머무르는 내내 계속 웃고 떠들었던 것만은 분명히 기억이 난다.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웬 동양인이 치안이 안 좋기로 너무 유명한 Lima의 빈민가에까지 스스로 들어와서 꽤 이상한 스페인어 발음과 뒤죽박죽 된 문법 속에서 끊임없이 떠들고 있었으니 그들이 보기에 얼마나 재미있고 신기했겠는가? 게다가 또술까지도잔뜩 취해서 온통 꼬부라진 혀로 말을 하고 있었으니....
어쨌든 나는 그날 그들과 그렇게 유쾌한 시간을 보낸후에 그 호텔 종업원이 동네 밖까지 다시 나와 잡아주는 택시를 타고무사하게 호텔로 돌아올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날 나는 치안이 그토록 좋지 않다는 Lima에서도, 더욱 치안이 좋지 않은 빈민가에까지 자진해서, 그것도 만취한 상태로, 갔었음에도 전혀 아무런 봉변도 겪지 않고 무사하게 호텔로 돌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술에서 깬 후에 다시 그 일을 회상하니 정말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너무나도 미련하고, 무모하고또한 위험한 행동을 감행한 셈이었는데 운이 좋아서 선한 사람을 만났었고 다행히 그 덕분에 탈 없이 멀쩡하게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종업원과 그 가족들의 미소 가득한 환한 얼굴은 아직도어렴풋하게 기억이 나고, 산비탈에 온통 가득하던 너무나도 허름한 집들 모습도 흑백사진들처럼 역시 희미하게 기억이 난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다시 한번 그들을만나서그날을 회상하며 함께 술이라도 한잔 기울였으면 좋겠는데 그토록불안정하고 어려웠던 그 시절의 페루 현실 속에서 그분들이 무사히 버텨내서 잘 살고 있을지는 좀 의문이다. 또 세월도 이미 30여 년이 훌쩍 지났으니 할머님과 할아버님은 이미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떠나셨을지도 모르겠다.
페루의 빈부차는 여전히 심하고 그만큼 빈민가도 변함없이 존재한다고 한다. 게다가 인당 GDP는 최근에도 역시 1만 불에도 훨씬 못 미친다고 한다. 그만큼 많은 국민이 과거와 별 차이가 없는 힘들고 어려운 삶을 지속해서 살고 있다는 얘기인데, 그 좁고 컴컴한 빈민가의 너무나도 허름한 집에 3대가 다닥다닥 몰려서 몹시 가난한 삶을 살면서도 술 취한 어느 동양인의 술주정에 그렇게 환하게 웃기만 했던 그들의 모습이 참 부럽고, 많이 그립고, 또 마음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