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정훈희 씨의 산티아고

■ 그 출장자의 서글픈 기억들 (8편 중남미-06)

by SALT

88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출장으로 방문했던 그 시절 중남미 도시들의 기억을 적은 이야기.



산티아고, 칠레

Santiago, CHILE



6. 정훈희 씨의 산티아고


작고하신 이봉조 씨가 작곡한 노래 중 '무인도'라는 노래가 있다. 1975년, 당시 20대 초반이던 가수 정훈희 씨가 칠레 국제 가요제에서 이 노래로 1위도 아니고 3위에 입상했던 적이 있는데, 한국의 국제적 존재감이 너무도 미미했던 그 시절에는 매우 귀했던 국제대회에서의 수상이어서 언론에 크게 기사화되었고 세간에도 많은 관심을 끌기도 했었다.


어린 시절이었지만 나도 그때 TV를 통해서 정훈희 씨가 그 가요제에서 열창을 하던 모습을 몇 번 봤던 흐릿한 기억이 있다. 그런데 최근 검색해서 그 동영상을 다시 보니 당시 그녀가 노래를 부를 때 칠레의 언어인 스페인어로 불렀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스페인어 발음이야 물론 완벽하지 않았겠지만, 어쨌든 외국어 교육 인프라가 그리 발달하지 않았을 그 시절에 영어도 아닌 스페인어로 노래를 불렀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했던 것 같다.


한편 방송사에서는 정훈희 씨가 노래하고 수상하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그 행사가 개최된 칠레 Santiago 거리와 시내 모습도 같이 방송으로 보여주었는데 그때 본 Santiago의 모습이 당시 한국의 경제적 현실과 너무도 큰 차이가 있는 부자 나라의 모습이어서 꽤나 부러웠던 기억도 있다.


2020년 기준으로야 한국의 GDP가 3만 불 수준인데 반해 칠레의 GDP는 1.3만 불 수준이니 요즘은 한국이 칠레보다 훨씬 더 잘 사는 나라지만, 그 당시 즉 1970년대 초반에는 칠레의 인당 GDP가 이미 1천 불이 넘었던 반면에 한국의 GDP는 고작 300~400불에 불과했으니 요즘과는 반대로 칠레가 한국보다 3배 정도나 잘 사는 나라였던 것이다.


(연도별 칠레 인당 GDP)

https://data.worldbank.org/indicator/NY.GDP.PCAP.CD?locations=CL

(연도별 한국 인당 GDP)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anchiljeong&logNo=221415593052&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kr%2F




그런데 그렇게 부럽게만 보였던 어릴 적 기억 속의 그 도시 'Santiago'를 그 가요제가 개최됐던 때로부터 약 15년이 지난 후 한국 기업체의 직장인이 되어서 마침내 나도 직접 방문하게 되는 기회를 가질 수가 있었다. 칠레 거래선들을 만나기 위해서 출장을 가게 되었던 것이었다.


1975년에 이봉조 씨와 정훈희 씨가 20 시간도 훨씬 넘는 기나긴 시간을 항공기를 타고 이동했을 것처럼, 나 역시도 1990년대 초 그만큼 오랜 시간을 이동해서 Santiago에 도착했다.


그렇게 도착해 보니 어린 시절 봤던 정훈희 씨의 열창하던 그 모습과, 또 그와 함께 TV에서 봤던 Santiago라는 부자 나라 멋진 도시의 오래전 기억들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실제 직접 봐도 Santiago는 유럽 어느 선진국의 도시 같은 아름다운 모습이었던 것이다. 사실 칠레는 요즘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중남미에서는 인당 GDP가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였다.


(중남미 국가 국별 PPP 기준 GDP, 2019년)

https://www.reddit.com/r/MapPorn/comments/auu7z7/latin_american_countries_by_projected_gdp_ppp_per/


아울러 Santiago라는 도시가 주는 느낌도 여타 중남미의 도시들이 주는 느낌과는 좀 다른 것 같았다. 상대적으로 꽤 깨끗했고 치안도 역시 좋았으며 주민들도 백인이나 백인에 매우 가까운 혼혈이 대부분으로 같은 국경을 접하고 있지만 원주민이 주류인 인근의 볼리비아나 페루와는 많이 달랐던 것이다.


(70년대 Santiago의 젊은이들 모습)

https://www.vintag.es/2019/12/santiago-young-people-1970s.html

(Santiago 소개 블로그)

https://m.blog.naver.com/wnxor33/221702281018




당시 칠레는 매출이 나름 꽤 컸던 국가라 그 시절에도 이미 우리 회사의 현지 지점이 운영되고 있었다. 그래서 칠레에 도착한 이후에는 매일 일단 지점으로 출근했는데, 어느 날 주재원이 거래선 미팅에 가기 전에 시간이 부족하니 점심은 간단히 햄버거를 먹자고 해서 그러자고 하고 햄버거를 사러 나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 주재원은 그때 금발의 현지인 직원을 부르더니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그에게 주고 우리가 먹을 햄버거를 사 오라고 했다. 그러자 그 직원은 알았다고 하고는 돈을 받고 나갔다.


그 두 사람의 행동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그런 장면이 사실 내게는 다소 의아스럽게 느껴졌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는 우리보다도 훨씬 더 잘 살던 나라의 직장인에게 잔심부름을 시키는 것도 좀 이상했지만 무엇보다 한국인이 백인에게 그런 음식 배달 심부름을 시키는 것이 꽤 의외의 행동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사실 우리 세대가 어렸던 시절에는 당시 미군으로 상징되는 백인들이 한국 사회의 상류층 같은 그런 분위기였다. 미국 정부의 원조를 받아야 했고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음식 부산물들로 만든 꿀꿀이죽과 부대찌개 같은 음식들을 6.25 전쟁이 끝난 지가 이미 20여 년이 다 되어가는 시절에도 여전히 또 직접 보기도 하며 자랐던 그러한 세대였던 것이다.


(부대찌개와 꿀꿀이죽 유래)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181010.010300815550001


그런 기억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던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 주재원, 즉 한국 사람이 미국인처럼 생긴 금발 백인에게 햄버거를 사 오라고 심부름시키는 것이 꽤 의외의 행동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그 주재원은 그런 심정을 눈치챘는지 내게 말하기를 그 직원은 사환으로 고용된 직원으로, 지금 시킨 것 같은 일을 하는 것이 그 직원의 고유 업무라고 했다. 그것이 그 직원의 일이고, 그런 일을 하는 것에 동의를 하고 채용이 되었다면 당연히 이상할 것이 전혀 없었는데 내게는 그런 장면이 꽤 이상하게 보였으니 어쩌면 내가 이상한 사람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요즘이야 칠레 Santiago에 수백 명의 직원이 있는 법인이 들어서 있지만, 당시 칠레에는 주재원 2명과 현지 직원 3~4명으로 구성된 총 5명 정도의 작은 지점만 있었다. 하지만 바로 작은 지점에서, 본사에는 물론이고 전 세계 모든 지법인에도 소문이 만큼 크고 유명한 한 사건이 발생했었다. 바로 '칠레 배추 사건'이란 사건이었다.


Santiago 지점 주재원 2명은 모두 결혼해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에야 해외에서 한국 음식 재료를 구하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90년대 당시는 요즘과 꽤 달라서 해외, 특히 중남미처럼 먼 곳에서는 한국 음식 재료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그런 실정에서 주재원 부인들이 야채 같은 것을 주로 사던 중국인 가게가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한 부인이 이 가게에 갔더니 마침 귀한 배추가 하나 나와 있길래, 너무도 반가운 마음에 얼른 배추를 집으려 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또 다른 주재원 부인도 장을 보려고 마침 그때 같은 가게에 와 있었고 그녀 역시 그 배추를 보고 막 집으려고 했었다. 결국 결과적으로는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같은 배추를 집으려던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2명 주재원 중 후배 주재원 부인이 눈치가 보였는지 다소 미묘했던 그런 상황에서 선배 지점장 부인에게 배추를 양보하겠다고 먼저 말을 했다. 그런데 지점장 부인은 그런 그녀의 말에 단 한 번의 사양도 하지 않고서 바로 고맙다고 하고는 배추를 얼른 집어갔다는 것이었다.


결국 후배 부인은 비록 어쩔 수 없이 양보를 하기는 했지만 집으로 돌아와서는 그 일이 너무나도 서글프다며 남편에게 하소연을 했고 이런 일로 마음이 꽤나 상했던 남편은 이후 어느 날 지점 사무실에서 지점장에게 이 일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게 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악화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런 관계가 점차 심화되어 나중에는 지점의 업무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까지 비화되었던 것이었다.


게다가 이런 상황이 여기저기에 소문까지 나게 되면서 결국 회사는 인력들을 교체하는 것으로 그 일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것이 1990년대 초 전 세계 지법인에 '배추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사건이었던 것이다.


결국 꽤 사소한 에서 시작된 사건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사소한 부인들의 행동이 결코 본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지구 반대편 이방 땅에서 한국 음식 재료가 너무도 귀했던 어려운 시절에 남편과 자녀를 위해 한국 음식을 마련해 보려던 어머니의 애틋한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었으니, 어찌 보면 좀 숙연한 느낌까지도 들게 되는 사건이었던 것 같다.




당시 칠레에는 General Supply와 IRT라는 두 개 거래선이 있었다. 이 두 회사 중 General Suppy가 IRT 보다는 더 큰 회사였고 우리가 판매한 물량도 General Supply가 훨씬 많았다. 한편 칠레 시장 안에서는 이 두 회사가 당연히 경쟁 관계에 있었는데, 우리는 이 두 회사와 동시에 거래를 하다 보니, 제품 공급 등 문제에서는 두 회사 모두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이처럼 다소 민감한 처지에 놓여있다 보니 출장 중 회사 모두로부터 노골적인 공격을 받는 것을 경험해야만 하기도 했었다. 먼저 General Supply와 상담을 했는데 이 거래선은 상담 시간 내내 우리가 IRT에 제품을 공급한다고 초지일관 물고 늘어지고, 투덜대고, 불평을 해 꽤 큰 곤욕을 치렀던 것이었다.


특히 General Supply 사장은 'Fazio'라는 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자신의 후계자인 젊은 '아들 Fazio'까지 상담 장소에 데리고 나와, 마치 한국 사람들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가르치듯이 그 아들 앞에서 내게 화를 내고 짜증 내는 것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상담 중 무슨 말을 해도 IRT 같은 거래선에 왜 제품을 공급하느냐는 식으로 지속적으로 물고 늘어졌던 것이었다.

그날의 상담은 그 거래선 사장의 널찍한 집무실에서 했는데 상담 중 소변을 보려고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집무실 밖으로 나가려 했더니, 그 사장이 손으로 자신 집무실 안의 작은 문 하나를 가리키더니 거기가 화장실이니 그곳에서 볼 일을 보라고 했다. 정말 끝도 없이 이어지는 그의 잔소리에 지쳐서 화장실에라도 가서 잠시나마 피하고 싶었는데, 그걸 어떻게 눈치챘는지 멀리 있는 화장실로 가면 그만큼 너를 괴롭힐 시간이 줄어드니 방안에 있는 자신의 개인 화장실로 가라고 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렇게 정말로 짜증이 날 정도까지 그날 그 거래선으로부터 당하긴 했지만, 그가 불평을 한다고 우리가 다른 거래선과 거래를 중단할 입장도 아니었고 또 어쨌든 상담 중에 내가 의도했던 물량은 어느 정도 받아 냈으니 그것으로 거래선의 신경질도 상담 종료와 함께 말끔하게 잊었다.


General Supply와의 상담을 마치고 또 다른 거래선인 IRT 사무실로 찾아가서 상담을 했다. 그런데 IRT 사장의 상대방 속을 뒤집어 놓는 실력은 바로 직전에 상담했던 General Supply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정말 '탁월'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원하는 제품을 정하고 가격을 협의하는데 가격이 비싸다며 계속 깎아 달라고 우기더니, 나중에는 빈정거리며 "지난번 서울 출장 갔을 때 보니 너네 회사 본사 건물 너무나도 좋아 보이던데, 그 비싼 건물 팔고 시골이나 지방으로 이사 가면 비용을 절약하고 원가도 훨씬 더 낮출 수가 있지 않냐"라는 말까지도 했던 것이었다.

나 같은 일개 말단 사원이 실제로 회사 건물 매각 및 이전을 결정할 엄청난 권한이 있었다고는 당연히 생각하지 않았을 것인데 원하는 가격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그런 식으로나마 짜증을 냈던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가격은 범위가 정해져 있었고 결국 그 범위 안에서 조금 깎아주고 물량을 확정 지었다.


속은 부글부글 끓었지만 어쨌든 정해진 범위 안의 가격에서 원하는 물량을 받아냈으니 역시 상담이 종료됨과 함께 그의 짜증은 깨끗이 잊고 지점으로 돌아왔다.


이 두 거래선은 모두 그 당시에는 매출도 크고 나름 대단한 거래선이었는데, General Supply는 2003년에 우리 회사 칠레 지점이 법인으로 격상될 시기 칠레 법인으로 흡수되어 사라졌고, IRT 경우는 칠레의 온라인 매장에서 그 브랜드를 지금도 볼 수 있는 것으로 봐서 여전히 존재하고는 있지만 그 제품들 수준으로 볼 때 과거와 같은 위상은 이제 더 이상 갖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두 업체 모두 한때는 쟁쟁한 업체들이었는데, 세월과 함께 그렇게 사라지고 쇠락해 갔던 것이다....




Santiago에서는 혼자 한국 식당을 찾아가서 큰 실수를 한 적도 있었다.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서니 의외로 식당 한쪽 벽에 태극기와 북한 기가 함께 나란히 걸려 있는 생소한 장면을 목격했던 것인데 바로 여기에서부터 문제가 시작된 것이었다.


요즘이야 해외의 북한 식당에 한국인들도 자주 찾아가고 또 나 역시 중국 근무 시에 북한 식당에도 실제 여러 번 가기도 했었지만, 90년대 당시만 해도 한국인이 해외의 북한인이 운영하는 식당에 들어가서 북한인과 대화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식당 안에 두 개의 기가 동시에 나란히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사실 나는 꽤 당황했는데 아마 북한 교민이 운영하는 식당이거나 아니면 남한과 북한을 모두 인정하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에서는 북한 기가 버젓이 걸려 있는 식당에서 식사하기는 영 불편하기도 해서 바로 나와서 다른 식당으로 갈까도 순간적으로 고민을 했는데 그 시절은 해외에 한국 식당이 그렇게 흔하던 시절도 아니어서 어렵게 찾은 그 한국 식당을 포기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고 결국 그 식당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그 식당은 비교적 작은 식당으로 당시 손님이 나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음식이 준비되는 동안 다소 긴장되고 또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뭐라도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나는 사장님께 "북한 기가 걸려 있네요"라고 지나가는 말처럼 한 마디 했다.

그랬더니 사장님은 음식을 만들다 갑자기 머리를 치켜들며 "지금 뭔 얘기냐?", "아니 내가 왜 북한 기를 걸어 놓느냐?", 등 너무나도 황당하다는 듯이 말을 했다. 사장님의 그러한 반응에 나도 화들짝 놀라서 "아니 저기에 북한 기 걸려 있지 않냐"라고 얼른 대응을 했다.


그런데 내가 가리키는 기를 보고서 사장님은 정말로 어이가 없다는 듯한 허탈한 표정을 지으시며, 거기에 걸린 깃발은 북한 기가 아니라 칠레 국기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좀 더 생각해 보니 실제 그 기는 칠레 국기였다. 나는 죄송하다고 거듭 사과를 드릴 수밖에 없었는데, 출장 중 시차가 완전히 바뀌어 피곤하고 몽롱한 상태에서 칠레 국기와 북한 기를 혼동했던 것이었다.


자세히 보면 두 기가 다른 모양인 것은 맞다. 하지만 좌측의 큰 별 그리고 붉은색과 파란색만이 사용된 것 등 일부 닮은 부분 역시 꽤 있어서 당시 나처럼 정신이 맑지 않은 상태의 사람에게는 혼선을 줄 여지도 분명 있기는 있었다.


사진) 칠레 국기(좌측)와 북한 기(우측). 붉은색과 파란색, 그리고 별 등 유사한 부분이 꽤 다.


지구 정반대 편 그 먼 객지 칠레에서 식당을 운영하면서도, 한국을 잊지 못해 칠레 국기 바로 옆에 태극기까지 나란히 걸어 놓고 식당을 운영하셨던 그 사장님은 어느 날 찾아온 손님이 그것도 외국인도 아니고 한국에서 왔다는 한국인이 식당에 걸린 칠레 국기를 보고 북한 기 운운했으니 얼마나 황당하고 상심했을지 충분히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그저 아무 말 말고 조용히 밥만 퍼 먹었으면 그런 민망한 사고는 치지 않았을 것인데 방정맞은 입이 결국 문제였다.




칠레 가요제에 함께 참가했던 이봉조 씨는 1987년 57세의 꽤 이른 연세에 타계하셨고, 칠레 가요제 당시 20대 초반의 꽃다운 나이였던 정훈희 씨는 올해로 70세가 되셨다 한다.


올해가 2021년이니 어린 시절 TV에서 봤던 칠레 가요제와 그 가요제에서 지휘를 하던 이봉조 씨, 열창하던 정훈희 씨, 그리고 Santiago 시내 모습까지 이제는 모두 40년도 훌쩍 넘는 너무도 오래된 과거에 봤던 모습들이 되어버렸다.


또 그 칠레 가요제로부터 약 15년 뒤 General Supply와 IRT 두 거래선들에게 샌드백 취급받으며 연달아서 두드려 맞은 후 Santiago 시내 거리를 걷던 내 모습 또한 30년이 된 과거의 일이 돼버렸다.


내게는 엊그제 같던 이 모든 일들이 벌써 그렇게 오래 전의 일이 되어버렸는데 나보다 15년 먼저 Santiago란 도시를 방문했던 올해 70세가 되신 정훈희 씨는 그 젊은 시절 20대 초반에 경험했던 Santiago에서의 열정적인 자신의 무대를 이제는 어떻게 기억하고 계실지....


'무인도'를 열창해서 칠레 가요제 3위에까지 입상함으로써 한국에게 너무 소중한 국제 대회 입상 소식을 전해 줬지만, 사실 당시 정훈희 씨는 장출혈까지 겪을 정도로 건강상태가 너무 안 좋아 Santiago에서 병원에 입원까지 했었다 한다. 그런 그에게 화환을 보내 위로해준 칠레인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당시 칠레 대통령이었던 피노체트(Pinochet)였다고 한다.


(칠레 대통령 위로 화환)

https://news.joins.com/article/1399762


피노체트는 1973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후 17년이란 기나긴 시간 칠레 대통령으로 집권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했고, 한국의 경제성장을 모델로 삼아 칠레 경제성장을 이루어 왔다고 항상 말하곤 했다 한다. 그랬던 피노체트가 1990년 물러난 이후 2004년 한국이 외국 국가와 최초로 FTA를 체결하게 되는데 그 국가가 또 칠레였다.


(피노체트 관련 기사)

http://mnews.imaeil.com/NewestAll/2011121007145955486


어찌 보면 쿠데타도, 독재도, 아픔도, 경제 성장도, 칠레와 한국은 가까운 면이 꽤 있는 것 같기도 하다....


(1975년 정훈희 칠레 공연 장면, 05:18)

https://youtu.be/tzWAtw4jbMU

(정훈희 씨와 칠레 가요제 소개 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beauniverse&logNo=220957549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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