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돈암동 살던 어느 가족 (1)

■ 고향집, 집 앞 골목

by SALT

아래 제적 등본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1960년대 서울의 성북구 돈암동 38번지 34란 주소에서 나는 태어났다. 서울 돈암동이 나의 고향인 것이다.


사진) 제적 등본 상의 출생지 주소


그 당시는 돈암동에 아파트라고는 당연히 전혀 없었고 거의 모든 주택들이 단층 주택이었다. 물론 이후 서울의 대다수 동네가 바뀐 것처럼 세월이 흐르면서 돈암동도 많이 변해서 이제는 고층 아파트 단지로 바뀐 곳도 꽤 많다.


사진) 고층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선 모습으로 변한 2014년 돈암동 모습


10여 년 간의 오랜 해외 주재 근무를 마치고 2014년 여름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내가 태어났고 또 유년 시절을 보냈던 고향 돈암동이 그리워 찾아갔던 적이 있다.


그런데 정말 오랜만에 방문해 보니 주변 지역 거의 모두 아파트로 바뀌어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내가 태어난 고향집 주변만은 아직도 1960년대 흔적이 남아있는 단층 주택이 꽤 많이 존재하고 있었다. 물론 그런 단층 주택들도 60년대 보던 모습과는 많이 변해 있었지만 어쨌든 그 오래된 주택 모습 덕분에 과거 고향집과 집 근처 골목길들의 향수를 희미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한편 처음에는 제적등본에도 나와 있으며 나 역시도 뚜렷이 기억하고 있는 주소, 즉 내가 태어난 집 38-34라는 주소가 지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아서 집을 찾는데 어려움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희미한 옛 기억을 더듬어서 어렵게 고향집을 직접 찾아낼 수 있었는데 가서 보니 집의 주소가 39-6으로 바뀌어 있었다. 최근에 도입된 도로명 주소와 지번 주소가 다른 것은 이해하겠지만,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몰라도 같은 지번 주소마저도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하긴 50년이라는 시간, 즉 반백년이란 세월이 무수히 흘렀으니 그간 너무 많은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래 사진이 그때 그렇게 어렵게 찾아낸 고향집 모습이다. 돈암동을 떠난 지 50여 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난 후에 처음 다시 보게 된 고향집이었는데, 비록 집 외관은 많이 바뀌어 있었지만 대문의 오른쪽에 집이 있고 그 앞에 작은 마당이 위치해 있는 구조는 과거와 변함이 없었다. 또 대문 쇠창살 틈으로 보이는 집안 내부 모습도 50여 년 전에 봤던 희미한 기억 속의 내 고향집 흔적이 다분히 남아있었다.


사진) 2014년 방문 찍은 돈암동 고향집의 모습. 이 집에서 나는 태어났다.


이 집의 2014년 기준 모습은 사진과 같지만 60년대 이 집과 집 근처 골목 모습은 아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최근 모습과는 달랐다.


사진) 60년대 돈암동 고향집 대문 모습. 대문 옆에 요즘은 보기 어려운 아버님 함자가 새겨진 문패도 보인다. 대문을 살짝 열고서 미소를 짓고 있는 귀여운 소녀는 이제는 이미 환갑을 훌쩍 넘기신 누님이시다. 세월이 너무나도 빠르다는 사실을 새삼 또 말해 무슨 소용 있겠는가....


사진) 1960년대 돈암동 집 앞 골목길에서 찍은 누님 사진. 골목 안 모습이 2014년에 같은 장소를 찍은 아래 사진 속의 모습과는 꽤 다르지만 자세히 보면 주택 건물 하단부 낮은 축대 모습은 예전 모습과 매우 유사해서 필경 60년대 당시 사용되던 축대가 최근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진) 2014년에 찍은 같은 골목 모습. 주택 하단부 축대가 1960년대 찍은 사진 속 축대와 동일해 보인다.


사진) 누님(오른쪽)이 꽤 성장한 후 돈암동 집 앞 골목에서 친구와 찍은 사진. 초등학교 2~3학년은 되어 보이는 걸로 봐서 1967~8년 즈음에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누님은 고등학교 때까지 전교 1등도 수시로 할 만큼 공부를 잘했고 또 초등학교 때는 피겨스케이팅 선수까지 할 정도로 운동도 잘해서 초등학교 시절 나는 선생님들로부터 내 원래 이름이 아니라 너무도 유명했던 '누님의 동생'이란 이름, 즉 '미라의 동생'이란 이름으로 항상 불리곤 했었다. 예를 들면 "아, 네가 미라 동생이구나...." 뭐 이런 식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누님이 초등학교를 졸업해서 떠나고 나니 이제는 황당하게도 선생님들이 "아, 바로 네가 호영이 형이구나" 이렇게 불렀다. 내 이름은 여전히 온데간데없고 누님의 동생에서 이제 동생의 형으로만 불렸는데 동생 역시 누님만큼 공부를 잘해서 그렇게 불렸던 것은 결코 아니었고 내 동생이 워낙 활동적이고 사교성이 좋아 친구와 선생님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고 따라서 그만큼 학교에서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장남이었던 나는 결국 공부에서는 누님을 넘을 수 없었고, 사교성에서는 동생을 넘을 수 없었던 셈이다....


한편 누님은 워낙 그렇게 공부를 잘하다 보니 1970년대 말 고등학교 재학 중에 프랑스 파견 교환 학생으로까지 선발이 되어 프랑스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모든 면에서 몹시 뛰어났던 누님은 20대 초반 젊은 시절 어느 날 '조현병'이란 몹쓸 정신병에 걸리게 되었고 이후 지금까지 40년간 그 병으로 평생 고생하고 있다. 너무 총명하기만 했던 누님 어린 시절에는 아무도 상할 수 없었던 일인데 정말 인간 각자에게 주어진 운명은 알 수 없는 것 같다....


사진) 돈암동 성신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에 피겨 스케이팅 선수로 활약하던 누님의 모습


사진) 어린이 대표 중 한 명으로 정부 행사에 참여했을 때 찍은 사진 (육영수 여사 앞 등이 보이는 어린이가 누님)


사진) 누님이 유명 음료 광고 모델로 출연한 사진.


사진) 누님 프랑스 유학 시절 (1970년대 말)


사진) 유학에서 돌아와 서울에서 대학 다니던 시절의 누님 모습 (198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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