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돈암동 살던 어느 가족 (7, 종편)
■ 이번 삶 떠나기....
아래 사진은 어느 결혼식장에서 우리 삼 남매가 함께 찍은 사진인데 1968~9년 경이 아닌가 싶다. 우측에 한복 입고 계신 분은 외할머님이시다.
사진) 삼 남매가 말끔하게 차려 입고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
60년대는 해외여행이 정말로 드물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어쩌다 누군가 해외로 나가게 되면 친척들 대다수가 공항에까지 가서 배웅을 하곤 했었다. 아래 사진 역시 그런 경우의 사진인데, 우리가 돈암동에 살던 시절 농구선수였던 외사촌형이 국가 대표 농구 선수 중 한 명으로 해외 경기에 출전을 했다. 그때 우리 가족 전원을 포함해 외할머님까지 친척들 여러 명이 김포 공항에 가서 외사촌형을 배웅했는데 그때 모습이다. 고작 며칠간 해외여행 다녀오는 것이었지만 마치 다른 나라로 영원히 이민이라도 떠나는 것처럼 친척들 다수가 공항에까지 갔던 시절이었다.
사진) 60년대 말 김포공항에서 해외로 떠나는 외사촌형을 배웅할 때 친척들과 함께 찍은 사진. 외사촌형은 키가 워낙 커서 사진 속에 보이는 다른 친척들과는 머리 하나에서 둘 정도 차이가 있었다.
한편 첫 번째 사진을 보니 희미하게 기억나는데 사진 속에 보이듯이 누님은 원래 콧등에 작고 검은 점이 하나 있었다. 하지만 그 점이 누님 미래 운명에 좋지 않다고 해서 언젠가 제거를 했다. 그런데 그렇게 점을 제거했음에도 안타깝게도 20대 초 젊은 나이에 누님은 조현병이라는 몹쓸 정신병에 걸려 현재까지 40여 년간 평생 그 병으로 시달리는 질곡의 삶을 살고 있다. 흔히 하는 말처럼 정말 사람의 운명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인지.... 결코 그렇지 않기를 기대하고 또 믿는다....
사진) 1964~5년 경 우리 삼 남매가 돈암동 집 거실 앞에서 햇살에 나란히 앉아 찍은 사진. 마당을 가득 비추는 오래전 돈암동 60년대 과거 햇살이 참 그립고 아련하게 느껴진다.
사진 가운데가 난데 사진에도 보이듯이 어린아이가 이마에 주름살이 유독 많아서 어린 시절 나는 '어린 김희갑'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한다. 아래 링크 속의 김희갑 선생님 사진을 보면 실제 어린 시절 내 인상이 그분을 꽤 닮기도 한 것 같다
(김희갑 선생님 사진)
사진) 햇살과 나뭇잎 그늘 가득한 돈암동 집 마당에서 찍은 우리 삼 남매 사진. 중앙의 아이가 난데, 오른쪽 눈썹 바로 밑 상처가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어디에선가 넘어져서 생긴 상처로 기억하는데 상처 위치가 조금만 달랐어도 이후 평생을 한쪽 눈 시력 없는 상태로 살아야 했었을 것이다.
나는 이 돈암동 집에서 태어났고 내 동생도 역시 이 집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약 10여 년 이곳에서 살다가 이촌동으로 이사 갔는데, 이 집에 사는 동안 사건 사고도 정말 많았다. 안전 관리 상태가 요즘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취약하던 시절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누님은 길에 있던 못 박힌 나무 조각을 밟아서 발이 대못에 뚫린 경우가 있었고 또 동생은 선인장에 정면으로 넘어져서 얼굴에 온통 선인장 가시가 박힌 적도 있었다. 나는 더 크게 다친 적이 있는데 캄캄한 저녁에 거리의 웅덩이에 빠졌는데 하필 그 웅덩이 안에 깨진 유리 조각들이 있어서 손목과 턱 등이 심하게 찢어진 적이 있었다.
어머님 말씀을 들어보면 그때 아버님이 피투성이가 된 나를 업고 병원을 찾아다녔는데, 버스 기사가 정거장이 아니라고 어렵게 찾은 병원 입구에서 버스를 세워주지 않자 아버님이 난리를 치셔서 그 버스에서 내린 적이 있다고 한다. 희미한 기억이지만 나 역시 그때 너무나도 놀라서였는지 어렴풋이 아버님께서 버스 세우라고 마구 고함치던 장면이 기억나는 것 같기도 하다. 10살도 안됐던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그날 병원에서 상처를 꿰맸는데 그때의 상처 흔적은 지금도 손목과 턱에 각각 약 5cm 정도 남아 있다. 이제는 아버님도 이 땅을 이미 떠나셨고 나도 돈암동을 떠난 지 오래됐지만 그 상처만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인데, 60년대 돈암동이 내 인생에 영원히 남겨준 상처인 셈이다....
위 사진을 보면 세명의 남매가 찬란한 햇살 아래서 너무도 편하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지만, 이 사진을 찍은 후 약 50여 년이 지나간 현시점에서 되돌아보면 삼 남매의 인생은 사진 속 햇살처럼 결코 그렇게 찬란하지만은 않았다.
가장 어린 동생은 모 대학 교수로 재직 중 이미 10여 년 전 46세 아직 한참 더 살아야 할 나이에 뇌출혈로 갑작스럽게 사망을 했고, 전교 일등까지 여러 차례 했고 운동도 잘했던 능력이 너무도 많았던 누님은 20대 초반에 걸린 조현병을 안고 평생을 살고 있다. 또한 단 한 번뿐인 소중한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직장 생활 30여 년 간을 그날그날 뭔가에 홀린 듯 하루살이처럼 살다가 몇 년 전 은퇴한 나는 퇴직 후 공허한 날들을 하염없이 반복하는 그런 삶을 살고 있다.
60년대 돈암동에 살던 사진 속 저 세 아이의 미래가 그렇게 결정되게 될지는 당연히 당시는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막연하지만 그저 찬란한 미래가 영원토록 남아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덧 세월이 흐르고 인생이 한참 지나고 나서 보니 그와 전혀 다르게 되어있는 우리들 모습을 보게 되었고, 게다가 영원할 것처럼 보였던 그 인생마저 끝이 있다는 것을 이제 실감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온 가족이 모여 찍은 사진은 유일하게 한 장 남아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아래 사진인데, 1968년 경 찍은 것으로 보인다. 이 사진에 있는 5명의 가족 중 이미 2명의 가족이 이 세상을 떠났다. 76세로 돌아가신 아버님, 46세로 사망한 동생이다 그리고 서운하고 허망하고 두렵기도 하지만 언젠가는 사진 속의 나머지 남은 3명의 가족도 역시 먼저 떠난 가족들처럼 그렇게 이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진) 돈암동 살던 시절 가족이 함께 찍은 사진. 우리 가족 구성원 전원이 모여서 찍은 사진은 1968년 찍은 이 사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유일한 가족사진....
사진) 60년대 돈암동에 살던 5명의 가족 중 아직은 이 땅에 남아있는 사람들, 누님, 나, 올해 92세 되신 어머님....
사진) 이제 고인이 된 가족이 이 땅을 떠나기 전 찍은 사진. 동생 (2001년 사진, 이 땅 떠나기 약 8년 전),
아버님 (1998년 사진, 이 땅 떠나시기 약 3년 전)
사진) 동생이 일본 유학하던 시절 일본으로 오신 아버님과 함께 찍은 사진. 동생은 석박사 모두를 일본에서 마치느라 거의 10 년 가량 장기간 일본에 체류했었다. 그 기간 내내 학위를 받느라 꽤 고생했다고 들었는데 그 고생의 대가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너무 일찍 이 세상을 떠났다. 동생 옆의 아버님도 이미 떠나셨다.
사진) 2001년 이후 아버님 흔적이 이 땅 위에 남아있는 곳. 아버님 고향 북녘 땅이 가까운 파주 동화경모공원이다.
사진) 2009년 이후 동생의 흔적이 이 땅 위에 남아있는 곳. 아버님 산소와 가까운 동화경모공원 내 납골당이다.
시간을 되돌려서 딱 한번 주어진 이 귀한 인생을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다시 살아보는 기회를 가져보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희망은 당연히 허망한 망상일 뿐이고, 아직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남은 세 가족도 이미 허송해버린 아까운 과거 시간을 그리워하고 아쉬워하면서 언젠가는 먼저 떠난 가족들처럼 이 땅을 떠나게 되는 그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다섯 명의 가족 모두가 이 땅을 떠나게 되면 60년대 돈암동 살던 그 가족의 이야기도 함께 이 땅에서 사라지고 잊혀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잊혀가기 전에, 그리운 60년대 돈암동 집과, 집 앞 골목을 가득 채우곤 했던 눈부시고 아련한 그 햇살을 다시 느껴보고 싶은데 지나간 오래전 과거의 그 햇살을 이제는 다시 느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60년대 돈암동 골목길의 아련한 햇살....
사진) 60년대 돈암동 골목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