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그 당시에는 내가 너무 어려서 그런지 돈암동 동네 거리 모습은 거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희미하게나마 기억나는 것 중 하나는 집 앞 골목에 말라죽은 나무가 하나 있었는데 그 모습이 오토바이처럼 생겨 '오토바이 나무'라 부르며 친구들과 함께 그 나무 위에 올라가서 놀던 기억이 있다. 놀이터 같은 시설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으니 골목 안 죽은 나무조차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로 애용되었던셈이다.
안타깝지만 우리들의 훌륭한 놀이터였던 그리운 그 나무를 찍은 사진은 없다. 하지만 그 나무가 있던 60년대 돈암동 집 근처 골목과 거리 모습이 담긴 사진들은몇 장 남아있는데 바로 아래 사진들이다.
사진) 누님이 장난감을 갖고 돈암동 집 앞 골목길 맨바닥에 앉아서 놀고 있는 모습. 길 옆으로는눈이 잔뜩 쌓여 있다.누님 나이로 볼 때1961년 경 사진으로 보인다.
사진) 어머님과 누님 사진. 당시 집 근처에는사진에서 보는 것과 같은 이런큰길은 하나밖에 없었던 바, 바로 이 도로가 현재 6차선 도로가 된 동소문로 아닌가 싶다. 역시 1961년 경 사진으로 보인다.
사진) 돈암동 집 앞 골목에서 유모차를 타고 있는 누님 모습 1960~1년 즈음의 돈암동 주택가 골목 모습이다. 골목길을 가득 채우고 있는 오래전 과거 60년대 햇살이 참 아련하게 느껴진다.
사진) 돈암동 집 앞에서 찍은 어머님과 누님 사진. 어머님의 표정을 보면 한국인 대다수가 가난하던60년대 어려운 그 시절 생활고에 찌든 가정주부의애환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 같다. 반면 그런 어머님 곁에서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누님의 모습이 대비가 된다.1962~3년 즈음의 사진으로 보인다.
사진) 온 가족이 말끔하게 차려 입고 어딘가 가는 모습.
이 사진에 보면 기와집이 꽤 많고 일본풍 건물도 보이는 등 60년대 돈암동 거리의 건물들은 요즘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일행 앞에서 활발하게 걸어가는 아이들이 우리 삼 남매이고 뒤편왼쪽이 어머님, 가운데가 외할머님, 우측은 당시식모라고불렸던 가정부 누님이다. 아버님께서 이 사진을직접 찍으셔서 그런지 사진 속에 아버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1964~5년 경의 사진으로 보인다.
돈암동 집 주변에는 유명한 고개도 하나 있었다. 너무나도 잘 알려진 '단장의 미아리 고개'라는 노래에 등장하는 바로 그 고개인데 어린 나도 이 고개를 수도 없이 여러 차례 넘어 다녔던 기억이 있다.
창자가 끊어진다는 의미를 가진 '단장(斷腸)'이란 단어가 이 노래 제목에 들어있는 이유는 6.25 전쟁 당시 북한으로 피랍되어 가는 가족들과 이 고개에서 마지막으로 이별해야 했다는 역사적 비극과 관련이 있다. 또한 이 노래를 작사한 반야월 씨는 개인적으로도 전쟁통 피난길에바로 이 미아리 고개에서자신의 어린 딸을 잃었다고 한다. 이런 비극들이 얽혀 "창자가 끊어지는 미아리 고개'라는 너무도 가슴 아픈 노래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돈암동에서 당시 또 하나 꽤 유명했던 것이 있었는데 바로 '대지 극장'이란 영화관이었다. 영화를 관람하기에는 아직 너무나도 어렸던 나는 이 영화관에 들어가 본 기억은 없다. 하지만 무더운 한 여름 이 영화관 앞을 지나곤 했던 기억은너무도 분명하게 남아있는데, 겨울도, 가을도, 봄도 아니고 오직 몹시도 무더운 한여름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이 극장 앞을 지나다녔던 기억만 남아있는 것이 좀 특이하다....
세월이 흘러 이 영화관의 오래된 건물은 완전히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는 새로운 건물이들어서 'CGV 미아'라는 이름의 영화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한다. 건물은 바뀌었지만 그나마 60년대 돈암동 대지 극장의 영화관 명맥은 현재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한편 돈암동 집에는 한동안 외할머님도 함께 거주하시기도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 당시 방이 달랑 2개뿐인 작은 우리 집에 부모님과 3남매, 할머님 그리고 또한 가정부까지 모두 7명이 어떻게 방을 나누어 생활을 하고 잠을 잤을지 좀 궁금하기도 하다.
어머님 말씀에 의하면 1960년대 그 시절 우리 집은 결코 잘 살던 집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 당시는 한국 사회 전체가 전반적으로 워낙에 일자리가 귀하던 시절이다 보니 지극히 낮은 임금을 받고 남의 집에 가서 가정부로 일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고, 그러한 배경에서 돈암동에 거주하던 시절 우리 집에도 가정부가 있었던 경우가 많았다 하신다.
위 사진에서 뿐 아니라 누님과 찍은 아래 사진에도 또 다른 가정부 누님 한 분의 모습이 보인다. 경제적으로는 모두 다 어렵고 힘들게 살아야 했던 그런 시절이었지만시골에서의 생활은 더욱 어렵다 보니 부득이 서울로 상경해서 남의 집 가정부로라도 일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사진) 60년대 가정부 누님과 함께 찍은 사진.1963~4년 경 사진.
가정부 누님과 관련되는 기억 중에는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 상황이 하나 있다. 그 상황의전후는 이제는아무런기억이 없고, 그 누님이 누구였는지도 전혀 기억이 없지만 그 당시의 상황만은 뚜렷하게 기억이 난다.
어느 날, 평소에는 항상 누나라 불렀던 가정부 누님과 함께 어딘가 갔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골목에 어떤 젊은 남자들이 여러 명 몰려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을 보더니 갑자기 가정부 누님이 몹시 긴장하면서 자신을 누나가 아닌 엄마라고 부르라고 내게 시켰다. 나는 누님이 시키는 대로 엄마라 불렀고, 그 남자들은 우리를 한번 힐끗 쳐다보더니 아무런 말 없이 그대로 보내주었다.
60년대 당시는 한국의 치안이 너무도 불안해서 도둑, 강도, 깡패들이 도처에 넘쳐나던 시절이었는데, 아마 10대 후반 나이였을 젊은 가정부 누님이 동네 건달들이 혹 희롱이라도 할까 봐 나를 자신의 아들로 둔갑시켜 엄마 행세를 해서그 위기를 넘긴 것이었다.
요즘이야 아이 엄마, 처녀 구분 없이 성희롱당할 수 있지만, 그래도 당시만 해도 아이 엄마라고 하면 그런 위험에서 좀 벗어날 수 있던 그런 시절이었던 것 같다.
돈암동에 살던 시절 관련 기억나는 것들이 많지 않지만 이 기억만은 지금까지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어린 내게도 당시 가정부 누님이 너무나도 긴장하고 공포에 떨던 것이 뇌리에 워낙 깊이 박혀 그랬던 것 같다.
미국, 유럽, 동남아, 중남미 등 어느 지역을 가도 한국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치안이 좋지 않다. 하지만 과거에는 한국 역시 치안 문제가 심각했다. 물론 요즘도 치안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어쨌든 그렇게 심각했던 한국의 치안 상황이 이제 웬만한 국가와는 비교 안될 만큼 좋아진 것은 정말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30년 전, 50년 전과 비교해도 치안 수준이 전혀 개선되지 않은 국가들이 이 지구 상에 허다한 것을 보면 더욱더 그런 생각이 든다.
한편 서울 가정집에 있던 가정부들이 급격하게 줄어든 것은 서울 등지에 공단이 생겨 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제 지방에서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온 여성 인력들은가정부가 아니라공단 공장들로흡수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 집 역시도 1970년에 돈암동을 떠난 이후에는 가정부가 거의 없었다.
한국에서 가장 먼저 조성된 그러한 공단들 중 하나로 '구로 공단'이 있었다. 요즘은 반도체, 선박, 차량, 핸드폰 등 기술 축적적이고 고부가가치 상품이 한국의 주력 수출품이지만 70년대에는 한국에 그런 기술이 전혀 없었고 그저 단순한 노동집약적인 제품이 주로 수출되었는데 그러한 제품들이 생산되던 대표적인 곳이바로 이 구로 공단이었던것이다.
그런 구로 공단의 공장들과 근로자들이 외화를 벌어들이기 시작하면서 그 외화를 바탕으로 한국의 기술들이 축적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따라서 생각해 보면 결국 70년대 구로공단에서일하던 근로자분들은 본인이 의도를 했던 안 했던 결과적으로는 모두 한국 국가 경제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애국자였던 셈이다.
현재는 구로디지털 단지, 가산디지털 단지로 불리며 디지털 기술 관련 업체들이 다수 몰려 있는 지역이 과거 공장들이 다수 밀집되어 있던 바로 그 구로 공단이다. 세월이 흐름과 함께, 그 공간의 모습도 또 그곳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바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