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일기 (17-15)

by SALT

1925년 3월 8일부터 2001년 1월 10일까지

76년간의 시간을 우리가 사는 이 공간에서 살다 떠나신

아버지의 1950년대 20~30대 젊은 시절 일기




(일기 기록 날짜는 없으나, '6·25 전쟁’ 중 경상북도 대구에서 경험하신 내용이 기록된 걸로 봐서 1951년 1·4 후퇴 직후, 즉 아버님 연세 27세 때의 일기로 보인다)



태양(太陽)은 뜨겁게도 우리들의 머리를 쪼인다. 여기가 바로 대구(大邱)라오....

그러나 역시(亦是) 오월(五月) 달임에 틀림없다.

대구 서(大邱署) 앞에 열 살 남짓한 조고만 행상(行商)이 서 있었다. 지금 막 백환(百圜) 짜리 가져온 어린애에게 '말 눈깔(아마도 사탕으로 추정)' 다섯 개를 팔았다.


때마침 어데선가 달려온 찌프 차가 소년(少年) 앞에 머물렀다. 통행인(通行人)모여들기 시작(始作)했다.

소년(少年)은 숨김없이 호주머니에서 '도롭프스'와 '쵸코레-드'와 양(洋) 담배를 꺼내면서 울기 시작(始作)하고 찌프 차()에서 국군(國軍) 헌병(憲兵)이 내려와 압수(押收)한 소상품(小商品)을 미국(美國) MP에게 전(傳)한다.


소년(少年)은 자꾸만 운다. MP의 얼굴에는 돌연(突然) 이상(異常)표정(表情)뜨이고 그는 울고 있는 소년(少年)주시(注視)하였다......

이윽고 MP는 압수(押收)한 것을 소년(少年)에게 다시 돌려주고 국군(國軍) 헌병(憲兵)은 미소를 띠면서 차(車)에 올랐다.


찌프 차()는 또 가로(街路)질주(疾走)하였다.

눈물을 거둔 소년(少年)!

하늘에는 "잿트"기()가 힘차게 날고 있다.

아마 또 전쟁(戰爭)인가 보다.


※ 6·25 전쟁 당시 미군부대에서 불법적으로 유출된 미제 사탕과 초콜릿, 양담배 등을 팔던 어린 한국인 소년이 미군 헌병에게 적발되어 물건을 압수당했다가 다시 돌려받는 장면을 아버님께서 목격하시고 일기에 기록하신 것으로 추정된다. 참으로 가슴 아프고 힘들게 살았던 아버님 세대의 한 장면인 것 같다.




3月 8日 (연도 기록 없음)


해마다 돌아오는 생일(生日)을 나는 맞이했다.

오늘은 내 생일(生日)이다.

많지는 않은 과거(過去)이지만 나는 과거(過去)에 이십여 회(二十餘回)의 생일(生日)을 가질 수가 있었다.

세상(世上)생()을 얻었다는 것이 즐겁기에 남들은 다 그날을 즐기려고 맛있는 음식(飮食)을 해 먹는다.


"내일(來日)이 3月 8日,생일(生日) 날이 내일(來日) 이로구나" 하면서도 나는 어떠한 계획(計劃)도 없었다.

어머니 계시는 집에 있었더라면 으레 닭 한 마리는 죽일 것....


한편 섭섭하면서도 기뻤다. 또 하나의 생명(生命)연장(延長)되기 때문에.... 그러나 역시(亦是) 나는 섭섭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따스한 국이라도 한 그릇 마셨더라면....


참아라 전쟁(戰爭)이다. 죽느냐 사느냐가..... 그러나 나는 죽는 신세(身勢)는 아닌데.... 그렇다고 음식점(飮食店)에 들어가서 먹는다는 것은 맛이 다르지 않는가....

참아라 Dukha(아버님 이름)여 아름다운 명일(明日)이 있지 않은가




인간(人間)의 마음은 육체와 함께 멸망(滅亡)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으로부터 어떤 영원한 것이 남게 되는 법이다.


설교만으로서는 사람을 선도(善導)하기 곤란(困難)하다.

자기(自己)절제(節制)함으로 사람을 선도(善導)할 수가 있다.


악인(惡人)타인(他人)해()하기 전()에 벌써 자기 자신(自己自身)을 해()하고 있는 것이다.




지상(地上)에서의 인간(人間)의 참된 일이란 자기(自己)존재(存在)신()조화(調和)시키는 데 있다.


그때에만 애()이성(理性)만능력(萬能力)

깨끗한 운하(運河)의 흐름과 같이 그 사람을 통()해서 흐를 것이다.


진심(眞心)생활(生活)자기(自己) 부정(否定)시작(始作)될 때에 비로소 있을 수 있다.

명()보다 암()을 찾고, 순()보다 역()을 즐기며 화()보다 전()을 좋아하는 버릇은 진(眞)과 (선)善과 미()추구(追求)하는 인간(人間)이성(理性)과는 배치(背馳)되는 일




아버님의 고교 졸업 앨범 마지막 페이지. 윗부분에 앨범 편찬위원 4명의 사진(좌측에서 두 번째가 아버님)과 그 아래 졸업생들의 메모가 적혀 있는 부분이 있다.


졸업생들이 앨범 마지막 페이지에 남긴 메모를 보면 당시 공용어인 일본어로 적혀 있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간혹 한글로 적혀 있는 메모도 두세건 정도 보인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한글로 적은 몇 되지 않는 메모 중에는 '예수 밋고 天堂(천당)'이라는 문장도 하나 적혀 있다 (사진 속 붉은색으로 표시한 부분)


2차 대전이 종전되기 직전, 패전을 피하기 위한 일제의 마지막 발악이 서슬같이 시퍼렇던 1944년경 평안북도 선천(宣川)의 한 고등학교 졸업생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글로 적어 앨범에 남겨 놓은 것 같은데, 일본 국왕이 신격화하여 신사 참배가 강요되던 시절에 예수를 신으로 믿으라고, 그것도 과감하게 한글로 적어 남겼으니 꽤 과감한 행동이었던 것 같다. ('밋고'는 당시 한글이 학교에서 가르쳐지지 않던 시절 '믿고'를 그렇게 적은 것 같다.)


졸업앨범 마지막 페이지 졸업생들의 메모 중, '예수 밋고 天堂(천당)'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부분을 확대한 사진



아버님과 어머님 사진. 1950년대 어느 날 서울에 내리쬐던 사진 속 햇살이 70여 년이 지난 지금 봐도 참 따듯하게 느껴진다.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어딘가 여행 가서 찍은 사진 같다. 그런데 우측 사진에 보면 어떤 여자분이 아버님과 어머님을 바라보는 모습도 같이 사진에 찍혀 있는데, 정면을 바라보고 계시는 아버님 어머님과 그 두 분을 옆에서 바라고 계신 여자분이 각각 같은 비중으로 사진 속 공간을 점유하는 구도가 참 특이하다......


어찌 보면 '시간 여행자' 한 분이 실수로 아버님과 어머님 사진 속에 같이 찍힌 것 같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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