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일기 (17-14)

by SALT

1925년 3월 8일부터 2001년 1월 10일까지

76년간의 시간을 우리가 사는 이 공간에서 살다 떠나신

아버지의 1950년대 20~30대 젊은 시절 일기


◎ 표시 부분은 대부분 한자로 쓰인 오래된 일기 원문이 훼손되어 판독이 안 되는 부분




Nov. 15, 1951

북진(北進)하던 동짓달에

우연히 만난 그대 춤추는 여왕(女王)

무용가(舞踊家)의 꽃봉오리 피여 날 때에

맞아 핀 꽃이 아름다웁고

밤에는 이슬 안고 고이 잠들며

사랑하는 예술(藝術)을 버리지 않고

군복(軍服) 입고 연마(練磨)하던 그대이더니

살리시오 반드시 예술(藝術)의 길을

문화극장(文化劇場) 무대(舞臺)에서 춤추던 모습

피어가는 꽃봉오리 활짝 피어서

무궁(無窮)에 빛나며 향기(香氣)로워라


- 정치외교과(政治外交科) 이덕하(李德河) -




붉었던 서울 찾아

천도(遷都)하던 시월에

아련히 피어진 한송이의 꽃봉오리

쓸쓸히 피어진 코스모스이련만

차디찬 바람에도 시들지 않고

억센 동풍에도 꺼지지 않고

항상 향기(香氣)로운 오리엔탈....

뜻하지 않은 후퇴(後退)의 길로

그대를 먼저 보낸 이내 가슴은

서울에는 오체(五體)지만 내 마음은 ◎◎

갈 수 없는 대궐에 한 번 두 번 ◎◎

그대 이름 불렀건만 대답(對答)이 없었소

차디찬 하숙방(下宿房)에 홀로 앉아서

과거(過去)를 생각(生覺)하니 감개가 무량해

정(情) 들었던 친구들을 하나씩 둘씩....

이것이 피(避)치 못할 인간사(人間事)라면

울지 않겠소만

그러나, 내 어이 낙루(落淚)치 않으리오.


※ 6·25 전쟁 기간 후퇴했던 유엔군이 반격하여 1950년 9월 말 서울을 탈환하던 당시의 일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도 나는 이 자리에 서있다.

아무도 없는 사령부(司令部)이것만

아 - 나는 지금(至今) 수◎대(水◎臺)에 서 있다.

아무도 없는 사령부(司令部)이것만

지금(至今) 나는 누구를 기다리며

지금(至今) 나는 저 현관(玄關)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오늘 부산(釜山)으로 갔다고

그럼 내 마음은 영원(永遠)히 여기 서있다.

방금이라도 그는 저 문(門)에서 나올 것만 같다

늠름히 나오는 그대를

나는 또 이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다.


- 5월(五月) 2일(二日) 헌사(憲司) 앞에서 -




아버님의 고교 졸업 앨범. 좌측 사진에 보면 학생들이 강당 같은 곳에 모여 있는데 중앙에 보면 대형 일장기가 붙어 있다. 일본어가 국어인 시대이고 주권을 빼앗긴 일제시대이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왼쪽에 보이는 군인 복장이 전혀 한국군 복장 같지 않고 북한군 복장처럼 보이는 것으로 봐서 6·25 전쟁 종전 후 아마 판문점에서 찍은 사진이 아닌가 싶다. 가운데 안경 쓰신 분이 아버님이다.



사진 속 여성분들 복장이나 외모가 일반인처럼 보이지는 않고 문화, 예술 분야에 계신 분들 같이 보인다. 아버님께서는 문화, 예술 관련 부문에서 일하신 적이 있어 그 분야 분들과의 모임도 잦았다고 들었다.


아버님은 연대 정외과를 졸업하셨다. 하지만 사실 연대 입학 이전에 서울대 미대를 1년 정도 다니셨을 만큼 예술과 문학에 관심이 많으셨다. 하지만 1940~50년대 대다수 한국인 모두가 궁핍하고 어려웠던 시절, 미술과 예술로는 먹고살 수 없을 것 같아 미대를 자퇴하고 학교를 옮겼다고 하셨다.



아버님과 어머님 연애하던 시절 사진.

차가 많지 않던 시절이라 그런지 사진 속 차 번호판이 매우 간단하다. '서울 자 25'



아버님과 어머님의 약혼식 사진. 단기 4290년이니 서기로는 1957년 10월 25일 약혼식을 하셨다. 군복을 입으신 분은 아버님의 바로 위 형님, 우측 끝은 어머님의 큰 오빠분이시다. 당시 어머님의 아버님은 이미 돌아가셔서 장남이 대신 약혼식에 참석하셨던 것 같다.



약혼식에 이어서 같은 해 진행된 아버님과 어머님의 결혼식 사진. 정동교회에서 목사님 주례 하에 진행되었다 한다. 아버님께서는 모태신앙이라고 하셨는데, 교회를 열심히 다니시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마음속 깊은 생각은 알 수 없을 것이다.

어머님은 현재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시지만 결혼하시던 당시는 물론 이후에도 한동안은 종교가 없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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