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어느날 비관과 허무에 잠식된다면, 부디 여기로 찾아오기를.
다른 세계의 에블린이 당신을 동경한다는 걸 알기를.
당신 안팎의 웨이먼드를 지나치지 말고 발견해 주기를.
그렇게 조이를 되찾아오기를.
사랑하며, 가여우며, 미우며, 애틋한 엄마에게 이 글을 바침.
*스포 및 결말 포함
세탁소 운영과 세무 조사에 찌들어 있는 에블린.
딸 조이와의 갈등, 세탁소 운영, 다리가 불편하며 보수적인 아버지 케어, 세탁소 운영, 세탁소가 압류되지 않도록 철저한 세무 조사 준비까지 모두 해내려니 버겁다. 말 그대로 삶에 찌들어 있다. 눈에는 생기가 없고, 지침과 피곤함이 역력한 얼굴이다. 모든 게 벅찬 에블린에게 남편 웨이먼드와 딸 조이는 계속해 대화를 요구한다. 그러나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빠 죽겠는 에블린에게 그 요구가 중요하게 여겨질 리 없다. 계속 "이따 이야기해", "지금 바빠, 이따가." 하며 대화를 미루기 일쑤다. 웨이먼드는 에블린에게 "숨 쉬어", "조급해하지 마." 라는 속편한 소리만 해댄다.
음, 사실 영화의 결말을 보고 나서도 이 장면에서 실질적인 일은 에블린이 다 하며, 웨이먼드는 속편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거두어지지는 않는다. 의도된 연출이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다시 눈알로 돌아가자. 바빠 죽겠는데, 남편 웨이먼드는 일을 도와주지도 않으면서(적어도 에블린은 그렇게 느낀다) 쓸데없이 세탁소 곳곳에 눈알을 붙인다. 짜증이 난 에블린은 거칠게 눈알을 뜯어내며 불만을 토로한다. 이런 거 하지 말랬지!
대부분 닳아 있으며 자주 아빠를 닦달하고, 가끔은 대화를 피하기도 했던 엄마가 겹쳐 보인 장면이었다. 아직은 엄마를 전부 이해할 수 없지만, 이 모습만큼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지쳤던 거다. 삶을, 가정을 영위하기 위해 품이 들어가는 모든 것들이. 마른 몸으로 매일 새벽같이 일을 나서며, 당신만 노력하고 고군분투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왜 내가 이런 것까지 해야 돼', 발끈하기도, 비참하기도 하면서. 딸과 남편의 철없음과 낭만이 당신에게는 사치처럼 느껴졌겠지. 낭만이란 멀리 떠나온 것, 두고 온 것으로 여기면서 말이다.
'미국으로 이민'한 '아시안(여성)'
두 키워드를 조합하기만 해도 에블린의 삶이 '증명'투성이였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에게 자신이 자랑스러운 딸임을 증명했어야 하고 (하고 싶었고),
미국(세무당국)에 자신이 사회에 유용한 일원임을,
국가의 재정을 축내지 않고 건전하게 사업을 영위하고 있음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삶.
이 증명 의무는 영화 속에서 곧바로 생계의 위기와 직결된다.
1. '자랑스러운 딸' 증명 실패.
에블린은 웨이먼드와 헤어지고 무술 배우로 성공한 세계선에서, 당신을 따라 갔다면 "'세탁소나' 하며 살았겠지" 라며 '최악의 에블린'의 처지를 비관한다. '최악의 에블린'이 존재하는 세계선이 바로 이 영화의 주된 배경이다. 부모에게 결국 결혼 승낙을 받지 못하고 웨이먼드를 따라나선 에블린은 생계를 위해, '세탁소나'의 바로 그 세탁소를 운영하게 된다.
2. '유용한 이민자' 증명 실패.
영화 초반부에 에블린이 종종거리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세탁소 세무조사 때문이다. 에블린이 운영하는 세탁소는 세무조사로 인하여 가압류 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 세탁소를 운영하며 어떤 범죄를 저지른 바가 없음에도 이민자인 에블린은 자국민보다 훨씬 엄격한 잣대로 사업의 건전성을 증명해 내야 한다. "우리, 미국의 단물만 빨아먹는 이민자가 아니에요." "우리 힘으로 떳떳하게 가게를 운영해요. 세금도 잘 내고요."를 말이다.
설상가상으로, 부족한 영어 실력 탓에 이민2세인 딸 조이 없이는 결백을 증명하는 것이 쉬운 일도 아니다. 세탁소 세무조사와 그에 대한 증명 실패는 가압류, 즉, 생계의 위기로 직결된다.
이렇듯 증명은 에블린의 삶에서 도무지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고, 이는 에블린에게 부채이자 상장이다.
증명해내야 한다는 마음으로 종종거리면서도, 인정 욕구가 충족되면 달콤해하는 것.
그러나 인정 욕구가 충족되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며,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인정 욕구는 또 다른 인정 욕구를 낳고, 충족되지 못한 인정 욕구는 결핍이 된다.
이미 딸을 가진 어머니가 되었음에도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에블린에게, 남편 웨이먼드는 "우리 생각이 중요하지."라는 말을 던진다. 정말 맞는 말이지만, 이런 마음가짐은 사실상 기적에 가깝다.
진심으로 웨이먼드의 멘탈이 부러운 대목이다. 내가 나 자신에게 저런 말을 해 주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누군가 인정욕구 때문에 고민한다면, 비록 속편한 말처럼 들릴지라도 저 말을 건네주고 싶다. "그건 맞지만..." 으로 시작하는 반박을 받아도 괜찮다.
최악의 에블린이 처음으로 알파 웨이먼드를 만나는 장면이다.
한국인의 삶을 관통하는 문장이 아닐까? 늘 뭔가를 이룰 기회를 놓쳤을까 봐 전전긍긍한다는 것.
그 모든 거절과 실망이 당신을 여기로 이끌었어.
거절과 실망을 무수히 당해 본 사람은 강하다는 의미일까. 여러 번 실패한 사람이라고 해서 겁이 없는 것은 아닌데. 아니면, 가진 게 많이 없는 사람은 잃을 게 없어 강하다는 의미일까? 어쨌든 거절과 실망을 무수히 경험한, '최악의' 에블린이 알파 세계선을 구할 유일한 인물이다.
당신이 실패의 길을 택했기에 다른 에블린들이 성공한 거야.
이 문장 역시, 앞의 문장과 비슷하게 고민할 지점을 던져 준다.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며 처지를 비관하던 에블린이지만, 알파 웨이먼드가 콕집어 '너는 에블린 중 최악이야'라고 하자 발끈한다. 얼마나 인간적인가. 내 처지는 나만 비관할 수 있어. 남이 내 처지를 비관하면, 약소한(어쩌면 비대한 걸지도) 자아가 분노한다. 내가 뭐 어때서!
이 장면을 처음 볼 때도 조금 마음이 동요하며 반박하고 싶었다.
'최악'과 '실패'가 뭔데? 어떻게 그걸 규정하는 거야? 기준이 뭔데? 하고.
영화의 결말을 알고 난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든다. 최악과 실패는 상대적인 것이다.
이 말은 즉슨 인간은 가 보지 못한 길을 영원히 동경하며,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이상적으로, 성공으로 그린다는 것이다. 반면 이미 선택해서 눈앞에 생생히 펼쳐지고 있는 길은 실패로, 최악으로 규정해 버린다. 현실을 실패로 낙인 찍고, 이루지 못한 꿈을 장밋빛으로 채색해서 마음 한켠에 영원히 간직하는 게 훨씬 쉬우니까.
웨이먼드를 따라가지 않고 무술을 연마하여 배우가 된 에블린은 어쩌면 가슴이 뻥 뚫려 있을지도 모른다.
외롭거나 삶에 회의가 들 때마다 웨이먼드를 떠올렸을지도. 클리셰처럼 일등석을 타고 하늘을 날면서 '내가 원하던 건 이런 게 아니야', '내가 바라던 건 웨이먼드와 소박하게 사는 것이었어' 했을지도. 웨이먼드와 결혼하지 못하게 막은 부모를 영원히 원망할지도. 음, 꽤나 구시대적 담론이라는 논의는 차치하도록 하자.
어쨌든 인간은 선택하지 않은 것을 영원히 이상화하고, 꿈으로 치환한다.
중요한 것을 선택할 때 이걸 염두에 둬도 좋을 것 같다.
"과연 둘 중 무엇을 포기할 때 그걸 덜 동경하게 될까?"
그러니까 정리하면, A 세계선에서 성공을 위해 포기한 것은 A 세계에서의 실패가 된다. 이 실패는 곧 B 세계선에서의 성공이자 A 세계에서의 동경의 대상이 되지만, A세계에서 성공한 것은 B세계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즉, 이 세계에서의 성공은 다른 세계에서의 실패이다.
사소한 결정 하나하나가 균열이 되어 세계선을 나누고, 그것이 누적되면서 아예 다른 세계로 뻗어나가게 된다. 이러한 설정이 애니메이션 '슈타인즈게이트'를 떠올리게 했다. 해당 애니에서 나비가 분기한 세계선들을 따라가는 연출이 있었는데, 그 장면을 못 찾겠으니 패스한다.
보세요, 실패를 많이 한 사람이라고 겁이 없는 건 아니라고요.
에블린은 알파 웨이먼드에게 자신은 알파 세계선이 사라지든 말든 상관없으니 자신을 빼 달라고 한다.
무섭겠지. 아무리 영웅으로 거듭날 인물이라고 해도, 그녀가 평범한 사람 중 하나라는 것을 보여 준다.
허무주의에 빠진 조부 투바키, 조이.
가장 겁에 질려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가장 무의미를 주장하는 인물이 가장 겁에 질려 있는 인물이라니. 이 얼마나 모순적인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살면서 허무주의를 마주하게 된다. 지금 내가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내가 아무리 버둥거려도 우주에서는 보이지도 않는데. 우주의 존재는 허무주의를 가져다 주기도, 낙관주의를 가져다 주기도 했다.
우주에서는 한낱 먼지일 뿐이야! vs. 우주에서는 한낱 먼지일 뿐일 텐데...
겁내고, 도전하고, 거절 당하고, 더 겁을 내다 보면 사람은 뭉툭해진다. 뭉툭해질 대로 뭉툭해져서 뾰족해진 마음은 날을 숨기고, 모두 의미없다는 마음이 된다. 적어도 그러면 상처받지 않을 테니까. 아무것도 겁내지 않아도 되니까. 나는 무능하고, 경제적이지 않고, 쓸모없으며, 나약하다는 마음에 괴롭지 않아도 되니까.
그러니까 허무주의에 빠진 사람은 더 상처받지 않으려 이불을 덮어쓰고 떨고 있는 사람이다.
누군가 이불을 걷어서, 해가 참 예쁘지, 우주는 멋진 곳이야 하며 산책을 시켜 주길 바라고 있는 사람이다.
다 무의미하니 사라지겠다는 조부가, 에블린과 함께 베이글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사실 무서웠던 거야. 혼자서 할 엄두도 안 났던 거고.
에블린은 딸 조이가 문신을 하고, 여자 친구를 사귀며, 집에 잘 오지 않고, 반항적인 것이 조부 투바키의 영향 때문이라고 믿는다. 조부 투바키를 회유하면 '착한 딸'이 돌아올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다 이내 동공이 커지면서 조부 투바키의 허무주의에 설득된다. 디어드리를 때리고, 세탁소 창문을 깬다.
"이제 아무렴 다 상관없어."
허무주의에 빠져 주저앉은 에블린. 웨이먼드는 상황을 수습하고자 디어드리에게 무어라 말하고, 깨진 유리를 빗자루로 쓸어담는다. 에블린은 '한심한 남편'이 또 디어드리에게 뭐라고 한 거야? 하며 못미더워하지만, 디어드리는 에블린의 행동을 문제삼지 않고 심지어는 일주일의 시간을 주고 물러간다.
조부 투바키는 계속해 에블린을 고양시킨다. 허무주의가 진리야.
다정함이고 뭐고 다 부질없어. 다 외면해.
웨이먼드의 삶의 태도는 'kind(다정함)'과 '부드러움'.
에블린은 아직도 그에 동의할 수 없다. 너무 늦었어. 혹은 (그건) 너무 나약해.
다들 무섭고 혼란스러워서 싸우려는 거 알아요.
이 대사가 심금을 울렸다. 지구에서 전쟁이 없었던 날이 단 5일 뿐이라고 했던가.
그들은 모두 무섭고 혼란스러워서 싸우는 것일까.
사람이 죽고 다치는데, 누가 이기는 게 뭐가 그렇게 대수란 말인가.
누구 잘못인지 따지기 급급한 세상. 당장 나만 해도 그렇다. 내 잘못이 아닌 걸로 판명나면 한시름을 놓고, 책임 소재에서 발을 뺀다. 웨이먼드에게서 삶의 태도를 본받고 싶다. 내 일이 아닌 것이 분명함에도 마음을 쓰는 것. 타인의 불행에 마음 아파 할 줄 아는 것. 괜히 내 잘못 같아요.
부드러움과 친절함이 약한 거라고, 지는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게 아니다. 영화 초반부에 국세청에서 에블린이 디어드리와 한참 실랑이를 하는 장면이 있다. 이때 웨이먼드는 디어드리에게 쿠키 하나를 건넨다. 에블린은 그의 행동을 못마땅해하지만, 디어드리는 "쿠키 잘 먹을게요."라며 그들에게 세무조사를 방어할 시간을 더 준다. 그것이 웨이먼드의 행동이자 전략이었다.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건드는 것. 선의로, 호의로, 친절로.
내가 아는 거라곤 다정해야 한다는 거예요. 특히나 뭐가 뭔지 혼란스러울 땐.
세상이 돌아가는 게 너무 빨라서 멀미가 날 때가 있다. 빠른 회전 속도 속에서도 중심을 잡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옆사람을 짓밟기 일쑤이고, 혼란스러운 와중에는 그게 당연한 거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게 자본주의 사회라고 일축하면서. 그럼에도 다정해야 한다.
선인일지 악인일지 모르는 타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은 아무래도 어려운 일이다. 이사하며 돌린 떡이 뜨거운 날씨 탓에 상할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환영해요!" 메시지와 함께 답례 휴지를 받을지, 해 보기 전엔 모르는 일이다.
개인적으로 좋았던 장면. 각자와 헤어지고 자기 삶을 가꾸는 데 성공한 세계선. 이 우주를 동경한 에블린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만, 그 우주 속 웨이먼드는 '최악의 에블린'과 함께하는 우주를 동경한다. 이렇든 저렇든 결국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세계는 미련으로 남는다. 영원히 동경한다.
무얼 해도 미련을 남을 테니, 선택은 신중히, 선택한 것은 최선과 존중을.
딩. 한 대 맞은 표정을 짓는 에블린. 나 역시 그랬다.
이제야 보이는 웨이먼드의 고군분투. 웨이먼드는 자신의 방식대로 에블린의 웃음과 낭만을, 일상을 지켜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철이 없어! 하고 치부했던 것이, 어쩌면 그의 노력이었음을.
웨이먼드가 붙이던 눈알은 그의 삶의 태도이자 무기, 'kind(다정함)'을 대변한다.
눈알, 베이글, 세탁기, 우주, 돌멩이 등 영화에서 상징적인 요소는 모두 동그란 형태로 표현된다.
장난기와 눈치가 공존하는 눈빛.
앗, 또 한 소리 들으려나?
미안하다고 해야 할 사람은 에블린임에도 어쩐지 사과하는 사람은 웨이먼드다.
"나도 미안해."
에블린이 사과하는 장면을 의도적으로 자른 연출일 수도 있지만, 에블린이 말하지 않아도 눈빛만으로 그녀의 마음을 읽을 줄 안다고 느꼈다. 저렇게 다정함과 섬세함을 타고난 사람들 정말 질투 나. 나는 평생 공부해야 하는 영역이다.
웨이먼드의 태도를 수용하기로 한 에블린. 이는 돌멩이에 눈알이 붙으면서 상징적으로 표현된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대화하던 무색무취의 두 돌멩이.
이제 눈알로 개성을 취득한 돌멩이는 다른 돌멩이에게 다가간다.
그것이 삶일 것이다. 실패하고, 상처받고, 겁내더라도, 곁을 내어주는 것. 거리를 좁히는 것.
사랑하는 것들과 대화하고 웃는 것.
장면 전환과 배경 효과음이 어지러울 정도로 자유분방하다가 처음 돌멩이 장면이 등장했을 때,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숨 참고 몰입하게 만들었고, 압도되었다.
우리 모두 돌멩이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잖아요.
희망을 갖게 된 에블린에게 조부 투바키는 마지막 설득을 한다.
그거 다 일시적인 거야. 다 사라져.
이 장면이 유독 오래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영화는 단편적으로는 낙관을 말하는 영화다. 나 역시도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인류애와 사랑으로 마음이 벅차올랐다. 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난 후 영화에서 빠져나와 다시 현실로 복귀하자, 다시 스멀스멀 비관이 피어올랐다.
아무리 좋은 영감을 받아도, 희망을 느껴도 영화를 끄면 끝일까? 다 사라지는 것일까? 아마 마음의 문제겠지. 계속 마음에 품고 살아가려 노력해야겠지. 역시 거저 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인생은 공부와 연마의 연속.
변한 점이 있다면 이제는 비관주의가 고개를 들어올릴 때마다 이 장면을 생각한다.
내 안의 웨이먼드의 힘을 생각한다.
아, 또 조부가 찾아왔네. 잘 설득해서 이쪽으로 넘어오게 해야지.
웨이먼드의 방식으로 우주를 구하기로 한 에블린.
총알이 아니라, 철없는 장난으로 치부했던 웨이먼드의 눈알(다정함)로 무장한다.
이제 에블린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공격이 아니라 결핍을 채워 주는 것.
에블린, 이제 와서 말이지만 라따구리 내쫓은 건 정말 너무했어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디어드리에게 당신은 사랑스럽다고 말해 준다.
관용과 포용, 누구나 사랑받을 구석이 있다는 낙관적 믿음.
비록 그것이 속편한 말, 입에 발린 말일지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꼭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한다.
타인의 결핍을 들여다보면서, 에블린은 마침내 자신의 결핍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에게 매정하게 자신을 시집 보내 버린 데서 오는 배신감을 토로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냥 보낼 수가 있냐며. 정말 그럴 줄은 몰랐다며. 그리고 비로소 인정욕구에서 해방된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않아도 괜찮아요. 마침내 내 자신이 자랑스러우니까."
이 장면은 영화 초반부, "아버지가 퍽이나 자랑스러워하시겠다." 라며 비관하던 대사와 대비된다.
나의 현위치는 어디일까. 부모로부터의 인정욕구와 부채감에서 얼마나 해방되었을까. 나는 아직 한참 멀었다고 자부한다. 아마 평생의 숙제가 되겠지.
사람은 누구나 엉성하며, 엉망이며, 부족하다.
그래도 괜찮다.
우리는 연대하며 살아갈 것이니까.
또 다른 부족한 사람들과 서로를 참아 주며, 견뎌 주며 살아갈 것이니까.
나도 누군가에게는 다정하고 인내심 많고 너그러운 사람이고 싶다. 엉망인 쪽만 맡는 건 너무 이기적이잖아.
에블린이 설득되지 않자 혼자서라도 베이글 속으로 들어가겠다는 조부 투바키.
그를 막으려 에블린은 온몸으로 조이를 끌어안고, 함께 베이글로 빨려들어간다.
아니었다. 에블린을 아버지가 끌어안아 막아 주고 있었고,
장인어른을 웨이먼드가 끌어안아 막아 주고 있었다.
그러나 조이는 모든 게 다 지겹기만 하다. 웨이먼드와 에블린의 낙관을 받아 줄 여력이 없다.
모녀 관계를 관통하는 문장이 아닐까.
"지쳤어. 더 상처받기 싫은데 엄마랑 있으면 자꾸 둘 다 다쳐."
서로가 서로를 참아 주고 견뎌 주는 관계라는 것이 낭만적이면서도 벅차다. 그냥 함께 존재하며 나아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상처받아 꽁꽁 싸맨 조이. 에블린의 손을 놓고 베이글 속으로 몸을 던지려 한다.
상징적으로 조이 돌이 굴러떨어지고, 에블린 돌은 어쩌지 못하고 바라보고만 있다.
마지막으로 조이를 막아서는 에블린.
딸의 입장에서는 "아 엄마, 제발..." 이 절로 나오는 대사로 포문을 연다.
"난 어디든 갈 수 있는데" 라는 문장을 여러 번 곱씹었다.
가장 단순하게는 버스 점프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게 되어 다른 우주에서 원하는 모습으로 살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조이를 낳지 않고 자아를 마음껏 실현하며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는 우주로. 조이가 딸이 아닌 우주로.
아마 대부분의 딸들이 엄마에게 가지고 있는 부채감일 것이다. 아빠를 안 만났다면, 나를 안 낳았다면, 꽃다운 나이를 더 즐기며 풍족하게 살았을 텐데. 엄마는 나를 위해 무언가를 포기하고 희생했다는 감각. 나는 엄마의 청춘을 갈아넣어 피어난 존재라는 부채감. 거기서 비롯된 증명 의무. 엄마가 희생해서 피워낼 가치가 있는 식물이었는지를.
조이, 네 말대로 비관주의를 느낄 만한 요소는 어디에나, 어떤 모습으로든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이 우주에 너랑 있고 싶어. 에블린은 말한다.
조이는 기뻤을까?
내가 영화 속 조이라면 아마... 눈물 나게 고맙지만 그래도 다른 우주로 넘어가라고 했을 것이다.
엄마, 나를 낳지 않고, 아빠를 만나지 않고, 훨훨 날아갈 수 있는 우주로 날아가.
어쨌든 에블린과 조이는 이 우주에 남기로 한다. 화해를 하면서.
조이도 나와 비슷한 의문을 제기하여 반박한다. 핀트는 조금 다른 것 같기는 하지만.
"(굳이 왜? 엄마는)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잖아. (그냥 서로 자유롭게 살자.)"
에블린은 그 말을 인용하여 조이의 상처를 포용한다.
"우린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어."
결국에는 사랑, 다정, 포용, 관용, 친절.
가족애, 협의의 사랑, 모녀관계, 자아실현.
여러 주제를 다루는 것 같으면서도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낙관이다.
숨을 참고 보게 됐던 장면.
보수적일 것으로 추정되는 할아버지가 조이 여자 친구에게 말을 건넨다.
"그래, 네가 조이 여자 친구라고?"
긴장은 예상치 못한 다음 대사로 풀려 버린다. 영어가 아닌 할아버지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것.
"뭐라고 하신 거예요?"
대화가 꼭 언어의 형태를 띄고 있을 필요는 없다.
조이 돌의 투신을 바라보고 있던 에블린 돌.
마침내 조이 돌을 향해 함께 몸을 던진다.
마침내 두 돌이 맞닿고, 두 세계가 충돌하며, 희망의 분화구가 생겨난다.
"우린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어."
끌어안는 모녀를 보고 활짝 웃는 웨이먼드. 인상이 너무 좋으세요...
영화 초반부쯤 다정한 노부부를 보고 웨이먼드가 부러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장면과 오버랩된다.
에블린은 가족과 함께 국세청에 방문하고, 웨이먼드에게 용기내어 애정 표현을 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오버랩 장면.
영화 초반부의 국세청 방문에서도 에블린이 멍 때리면서 디어드리의 말을 놓치는 장면이 있다. 물론 그때는 혼란이 가중된 상황이기는 했지만, 그렇게 일련의 사건들이 벌어지고 나서도 비슷한 장면으로, 수미상관으로 끝을 맺는다.
결국 인간이 어떤 사건으로 하여금 아예 바뀐다는 것은 판타지에 가깝다. 교훈을 얻더라도 인간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이고, 비슷한 상황에 처해질 것이며, 또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를 주고 멀어졌다 가까워졌다를 반복할 것이다.
희망 그거, 사라져. 잠깐이야. 라는 조이의 말처럼 말이다.
나처럼 영화를 끄고 현실로 복귀하는 순간 다시 인간이 미워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았다면, 이 영화가 아니더라도 모종의 이유로 희망을 가진 적이 있다면, 자아 성찰을 통해 반성을 했다면,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와 웃음을 준 경험이 있다면,
수많은 다중우주 속 다른 세계선으로 간 셈이다.
미약한 진보겠지만, 엄청난 차이다.
돌멩이로 살면 편하겠지. 그래도 우린 눈알 달린 돌멩이니까.
사랑하고, 후회하고, 선택하고, 웃고, 고민하며, 서로 견뎌 주며 사는 거다.
비관에 지지 말자.
우린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어.
1년 전 국세청 방문 장면에서 하차한 나보다는,
끝까지 완주한 오늘의 내가 미약하게나마 발전했음을 믿으며.
나의 말 한마디에 국세청 방문 장면을 견디고 끝까지 완주해 준
나의 다정하고 인내심 많고 너그러운 K에게, 사랑을 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