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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빅 Mar 27. 2019

콜마르에서 106번 버스를 타면 벌어지는 일

콜마르ㅣ 알자스 시골마을 시계의 초침은 느리게 돈다

초저녁까지 마누 아저씨의 방갈로에서 빈둥대던 차림 그대로 실렁실렁 거리에 나왔다. 저녁을 해결 할 식재료를 구하기 위해 아저씨가 일러준 마트로 갈 참이었다.


바람에 치여 뒹구는 낙엽들이 작은 소요를 일으켰으며, 하늘 저편에서는 아스라한 한 줌의 해가 남은 빛을 거둘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자그마한 물줄기 위에 가로놓인 다리 한가운데에 이르자 나는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낯설지 않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콜마르를 대표하는 무수한 사진에서 보았던 구도임에 틀림 없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그림과는 뭔가 달랐다. 혹 누군가 나의 각막에 탁한 필터라도 장착한걸까? 다채롭고도 현란한 컬러로 눈이 어지러웠던 사진 속 그곳이 맞긴 한 걸까? 인적 끊긴 늦은 오후의 콜마르는 바래진 파스텔 톤의 색채로 휘감긴 채 내 앞에 멀뚱히 무심히 서 있었다.


유독 계절적인 영향을 받는 여행지가 있다. 콜마르도 그 중 하나로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관광객에 치이는 번잡스러움을 감내하더라도 내리쬐는 햇살 아래에 도시 전체가 꽃으로 뒤덮이는 계절에 콜마르를 와야 할 이유는 충분해 보였다.




아울러 고만고만한 규모의 마을을 상상했던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콜마르는 도시로서의 면모가 강했다. 중심가로 향하는 거리 곳곳에는 상점, 레스토랑 그리고 카페가 늘어서 있었다. 잠깐 마주한 콜마르가 내게 전해준 느낌은 작고 귀여운 마을의 그것이 아니라 소도시의 풍취였다.


관광객의 발길을 잡는 특산물과 기념품을 늘어 세운 상점가를 벗어나 한적한 골목으로 접어들면서 나는 생각했다.


‘내일 가보기로 한 스트라스부르는 대도시급 아닌가. 건너뛰자. 스트라스브르나 콜마르보다 좀 더 작은 동생 마을들을 찾아보아야겠다.’


때마침 스트라스부르는 도시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노트르담 성당이 착공 1000년을 맞이한 해였다. 마누 아저씨는 스트라스부르에 가면 평소에 접하기 힘든 다채롭고 특별한 볼거리가 많을 거라고 이야기하셨다. 그렇지만 알자스의 작은 마을에 대한 호기심으로 콜마르까지 들어온 이상 도시가 아닌 인근에 흩어져 있는 작은 마을들이 궁금했고, 마음에 더 끌렸다.


다음날 아침, 커튼을 젖히고 창밖의 날씨를 살폈다. 어제와 달리 화창한 날씨에다 하늘빛도 고왔다. 앞서 궤도 수정한 것처럼 스트라스부르는 사뿐히 뛰어넘고 콜마르 인근의 작은 마을들을 공략해보기로 했다. 구글맵에서 우리가 있는 콜마르를 가운데 두고 접근이 수월한 마을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콜마르 위쪽에 보이는 리퀘위르 그리고 아래쪽에 있는 에기솅, 이렇게 두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거리상으로 좀 더 멀어 보이는 리퀘위르를 먼저 가보기로 했다. 예정에 없던 터라 차량을 렌트할 여건이 되지 않아 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콜마르에서 30분 정도 버스로 달리면 이르는 거리에 있었다.  


하지만 때는 만성절 방학기간이었기 때문에 배차 간격이 평상시와는 달랐다. 가뜩이나 운행 편수가 많지 않은 데다 방학기간에는 그마저도 몇 대 되질 않았다. 출발 시간에 맞춰 정류장으로 향했다. 정류장 한편에 안내된 버스 요금 정보에 따라 잔돈도 주섬주섬 미리 챙겨두었다. 이제 이 작은 도시의 한적한 버스정류장에서 우리를 데려다 줄 버스만 기다리면 된다. 약속된 시간에 맞게 우리가 탈 버스는 도착했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우리에게 낯선 광경이 펼쳐진 것은 버스에 오르려는 승객들이 출입문 앞에서 줄을 서기 시작할때였다. 우리 앞에 줄을 선 승객은 고작 예닐곱 명뿐. 한데 그들이 버스에 올라 기사에게 목적지별 정해진 요금을 건네고 좌석을 찾아 앉기까지 무려 10분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던 것이다. 누가보아도 납득하기 쉬운 상황은 아니었다. 버스에 오른 승객을 응대하는데 그토록 긴 시간을 소비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기사와 승객 간에 국제 정세에 관한 열띤 토론이라도 벌이고 있는 것일까? 갑자기?


승차하자마자 버스 카드를 태그함과 동시에 미끄러지듯 들어가 자리에 앉는 데까지 10초나 걸리려나. 우리 경우에 비추어보면 버스 출입구에 장시간 머물 일이 좀처럼 없지 않은가. 이해가 쉽지 않은 광경이었다. 시계 초침이 느리게 움직이는 세상으로 뚝! 떨어진 기분이었다. 이 나이에, 내가 무슨 앨리스도 아니고. 어쩌면 내가 평균 속도라고 믿고 그 속도에 맞추며 살아온 서울이라는 시공간은 초침이 지나치게 빨리 돌아가는 세상이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울러 프랑스 북동부 끝자락의 어느 조그만 동네를 휘감아 흐르는 시간이 본래의 속도일지도 몰라. 고장 난 느린 시계가 돌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별안간 주위의 공기마저 낯설게 느껴졌다.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힌 사이에 우리 차례가 왔다.  생경한 지명인 리퀘위르라는 곳으로 ‘우리를 데려다 줄 숫자 106이 쓰인 커다란 탈것'에 비로소 몸을 실었다.


"어서 와요, 오늘 날씨가 더할 나위 없이 좋죠? 여행 중인가 봐요?"


"아 네, 그러네요. 안녕하세요?"


버스에 오르자마자 미리 준비한 버스 요금부터 기사에게 건넸다. 특별할 것도 없는, 지극히 익숙한 제스처로. 한데 이를 지켜보는 기사 아저씨의 반응에 나는 다시 한번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를 난처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버스요금이 얼마인지 이미 알고 있었던 거예요? 놀라운데요?"

기사 아저씨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과 반응을 내 앞에서 흘렸다.

'저기요, 기사 아저씨. 지금 저를 두고 장난을 하시는 건 아니죠?’

 

목적지를 가기 위해 대중교통 수단에 탑승하여 이미 정해진 일정 금액을 지불하는 일련의 행동이 매우 특별하고 때에 따라선 매우 대단한 일이 되기도 한다. 이 신기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에서는 사전에 버스 요금이 얼마인지 미리 알고 있다면 '베뤼 원더풀'한 사람으로 거듭날 수도 있다.


"정류장 안내문에 금액이 적혀있으니까요. 프렌치는 못하지만 숫자는 읽을 수 있거든요"

나의 말 끝에 버스 기사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퍼져나갔다. 그제야 나는 예닐곱 명의 승객을 태우는데 곱절의,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었던 이유를 조금 알아차렸다. 기사 아저씨는 승객들이 버스에 오르면 목적지까지의 요금을 즐거운 놀이를 하듯 함께 셈을 한다. 그 과정에서 버스 티켓만 건네는 것이 아니라 유쾌하고 즐거운 에너지까지 더불어 얹어주는 사람이었다.


날마다 그는 이 드넓은 포도밭을 가르며 나아갈 것이다. 포도밭의 풍경으로 계절의 변화도 알아채고 마을 사람들과 시시콜콜 똑같은 안부를 주고받을 것이다. 오전과 오후 각 한차례씩 마을을 넘나들며 학교를 오고 가는 많지 않은 아이들이 피우는 작은 소란이 그에겐 왜려 즐거움일지도 모르겠다. 우열을 가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하나같이 예쁜 마을들을 오가는 알자스 교통 106번 버스의 기사 아저씨는 시간에 쫓기거나 교통체증으로 인상을 찌푸릴 일이 있을까 싶다. 따라서 웃음에 인색해야 할 이유가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는지도.





버스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콜마르 시내를 벗어난 버스는 멋진 풍광을 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버스가 지나치는 길이 다름 아닌 와인 가도이다. 일정한 속도로 달리는 버스 안에서 불현듯 몇 해 전 홍콩에서의 어느 날 아침이 떠올랐다.


휴가차 홍콩에 머물던 우리는 어느 날 교외로 트레킹을 가기 위해 하루를 일찍 열었다. 산책 후 혀가 데일 정도로 뜨거운 롱 블랙과 함께 여유로운 아침 식사를 마치고 숙소 밖으로 나오니 때는 출근시간 막바지 무렵이었다. 맞은편에서는 경사로 위쪽에 있는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이 분주히 오르고 있었다. 우리도 숙소가 있던 란콰이펑에서 센트럴 역을 향해 잰걸음으로 움직였다.


우리는 곧바로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철역을 향하는 대열에 휩쓸렸다. 부지런히 발을 놀렸으나 우리의 걸음걸이보다 두배쯤 빠른 사람들의 흐름에 녹아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흐름에서 이탈하여 오도 가도 못한 채 제자리에 서서 우리 옆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홍콩섬 센트럴 역 인근을 지나는 사람들의 걷는 속도가 우리보다 두배쯤 빠른 이유는 우리보다 두배쯤 빠른 초침을 가진 시계를 강요하는 그들 사회의 속도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재빨리 태엽을 감아 시계의 초침을 이 도시에 맞춰야 할까, 아니면 나만의 속도와 보폭을 그대로 유지할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마치 경사진 굽은 도로를 뒤덮고는 옴짝달싹 못하고 꼬리를 문채 서있던 그날의 빨간색 택시들처럼. 정지화면 같은 도로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인파의 흐름은 두 배속 혹은 세 배속으로 빠른 재생 중이었던 그날의 잔상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리퀘위르에 도착했습니다. 이 곳을 오신 분들은 여기서 내리셔야 해요"


기사 아저씨의 음성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황금빛의 드넓은 와인 밭이 시야에 들어왔다. 시계 초침이 느린 세계로 다시 되돌아온 것이다.




"이따 콜마르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려면 내린 곳에서 그대로 기다리면 돼요. 내가 당신들을 데리러 다시 올 거예요"


떠나는 버스 뒷모습에는 웃으며 손을 흔들던 아저씨의 잔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눈앞에 얕은 언덕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수없이 많은 포도나무들이 줄 맞춰 심어져 있었다. 포도밭에 둘러싸인 볕 좋은 언덕에 자리 잡은 예쁜 마을 리퀘위르 어귀에 다다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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