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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빅 Feb 13. 2019

동적 힐링도 좋지만 휴식이 필요해

그린델발트ㅣ  멈춤 그리고 제자리에서 쉼

산골마을에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고 싶어 그린델발트까지 들어왔다. 골짜기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지은지 200년쯤 되었다는 샬레를 물색해 둔 것은 참 잘한 일이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나는 스위스에 머무는 내내 하루를 일찍 시작해야 했다. 날마다 하이킹은 기본이요, 자전거를 비롯한 탈것들과 다양한 액티비티 또한 녀석은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어떤 날은 리기로, 다른 날은 피르스트로 그리고 인근의 작은 산간 마을들로 녀석과 분주히 옮겨 다녔다.


중간에 짬이라도 생기면 놀이터와 축구장 순회도 잊지 않았다. 혹 남은 체력이 있다면 다 끄러모아 야무지게 소진한 후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이 스위스에 온 후 녀석의 일과로 굳혀졌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원하는 루틴이 아니었다.


"엄마는 오늘 종일 숙소에 머물 거야. 아무 데도 안 갈 거야"


나는 이렇게 선언을 하고 하루의 휴가를 얻어 냈다. 팔닥거리며 돌아다니는 녀석을 쫓다 보니 멍하니 앞산을 바라볼 겨를도 없이 사나흘 보낸 후였다.






앞산도 어디 그냥 앞산인가. 턱을 괴고 창가에 앉으면 이 일대에선 좀 먹어준다는 3형제 중 둘째가 내려다보며 인사를 건넨다.


‘어이! 거기! 안녕하신가?’


내 앞에 풍채 좋게 서 있는 이 아이거 북벽의 정상을 두 눈에 담을라치면 고개를 한껏 치켜올려야 했다.  


스위스에 온 이후 처음으로 느긋한 아침을 맞았다. 산봉우리를 타고 골짜기를 거친 늦가을 햇살이 집안으로 들이비칠 즈음 일어났다. 아침식사를 하자마자 녀석은 마당에 나가더니 열심히 축구공을 쫓느라 바빴다.


아침식사의 흔적을 정리하고 돌아서려는 내게 쌓여있는 묵은 빨래가 눈에 띄었다. 오늘 하루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 손이 근질거려왔다. 못본채하기가 어려웠다. 빨래를 하지 않은지 꽤나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그와중에 녀석은 입고 있던 상의를 벗어 던지고는 여행길에 본인 몫으로 산 유니폼으로 재빠르게 갈아입었다. 하의와 타이즈까지 입으려는 것을 나의 만류로 거두었다. 백넘버는 아이의 요청을 받아들여 어릴때부터 속해있던 유소년 축구단의 백넘버를 마킹했다. 몸값 꽤나 나간다는 프리미어 리그 플레이어가 느닷없이 스위스 시골마을에 납시었다.





세탁이 필요한 옷들은 대부분이 녀석의 것이었다. 가는 곳마다 탁 트인 공원의 잔디만 보면 어김없이 몸을 뉘어 뒹굴거린 덕분이다. 그러나 넓고 푸른 잔디밭의 실상은 알고 보면 주인에 이끌려 산책 나온 수많은 강아지들에 의해 테러가 가해진 개똥밭이 분명하거늘.


지나온 길에 묻혀온 흔적을 뽀얀 거품으로 말끔히 지우고 나니 개운했다. 따스한 햇살 아래 빨래가 마르는 것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았다. 순간순간 불쑥불쑥 발현되는 이 몹쓸 DNA를 어쩌면 좋을까.


"엄마아~ 배고파아~ 우리 점심엔 스파게티와 피자를 먹을까?"


녀석은 어느새 마당 한쪽에 메어진 그네를 타고 있었다. 어디에서 무얼하든 밥때를 거르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미리 구입해둔 재료가 있었기 때문에 준비는 어려움이 없었다. 파스타 면을 삶고 냉동피자도 오븐을 이용해 그럴듯하게 구웠다. 전날 삼겹살에 곁들이고 남은 쌈야채는 급조한 발사믹 소스와 만나 샐러드로 거듭났다.


점심은 야외 테라스에서 먹기로 했다. 바람도 없고 햇볕이 알맞게 좋았다. 소박한 재료로 차려낸 단촐한 플레이팅이었지만 이날의 점심은 온전히 눈앞의 뷰가 안겨준 호사였다.






"엄마~ 나 핫초코 먹을 수 있어요?"


녀석은 대관절 무얼 믿고 생각나는 대로 입 밖으로 뇌이는 것일까. 도깨비 방망이도 아니고 말만 하면 다 나오는 줄 아는듯 했다. 속으로 타박을 하면서도 나는 똑 떨어진 카카오가루를 다시 채워넣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짐 정리를 하기 위해 트렁크 속을 탈탈 털다 말고 나도 커피 한잔을 만들어 테라스로 나왔다. 하루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마당 한편에는 고만고만한 아들 셋을 둔 주인 내외가 돌보고 있는 토끼 사육장이 있었다. 코코아를 단숨에 들이킨 녀석은 이번엔 사육장 앞으로 다가가 찰싹 붙어 떨어질 줄 모른다. 커피 한잔을 다 비우고도 한참을 앉아 있다 집안으로 들어와 보니 트렁크에서 쏟아져 나온 물건들과 손도 못 댄 점심식사 뒷정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애써 눈을 질끈 감고 못 본 척 외면해버렸다.


반면 녀석의 관심사는 어느 틈엔가 마당에 와있던 주인집 고양이에게로 옮겨져 있었다. 회색 고양이 루이치의 특징이라면 부담스러울 정도로 과한 애교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다. 쥐를 잡는데도 매우 능숙하다.


도착한 첫날, 침실 창가 앞에 작은 생쥐 한 마리를 물어다 놓는 바람에 우리를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던 게 저 녀석과의 첫 만남이었다. 놀란 우리 앞에 주인댁 할머니께서 다가와 즉시 사건 현장을 수습해 주셨다. 당황해하는 우리에겐 푸근한 웃음을 날리신 반면 루이치는 할머니의 호통을 들어야 했다.






적잖이 먹은 점심이 어느 정도 소화가 되었던지 녀석은 본격적으로 몸을 풀어보겠다고 했다. 흙먼지 날리는 운동장이 아닌 잔디 위에서 공을 쫓으며 좋아하던 것도 잠시, 비좁게 느껴진 마당을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실비아가 알려준 학교 운동장을 가보기로 했다. 뒷마당에서 종일 부잡스럽게 움직이던 아들 녀석에 대한 호기심이었을까. 간간이 아이가 놀던 마당을 기웃기웃 하던 아이들이 다니고 있는 마을 아래의 학교일 것이다. 동네 산책 겸 나도 따라나섰다.


가을 해는 기울기 시작했고 골짜기로 퍼져나가던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들려오던 학교 운동장은 텅 비어있었다. 그린델발트의 저녁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아이는 학교 운동장 또한 생각만큼 넓지 않았던지 좀 전에 지나쳤던 동네 어귀의 커다란 창고 앞 넓은 공터로 나를 이끌었다. 비로소 발에 힘이 한껏 들어간 녀석은 고요한 골짜기가 울리도록 공공 뻥뻥 차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땀범벅이 되었다. 늦가을 짧은 해는 땀이 맺힌 아이의 머리 위를 스치는가 싶더니 빠른 속도로 찬란한 빛을 거두고 있었다. 으스스한 한기가 순식간에 파고들었다.


어둑한 그림자가 큰 걸음으로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 집도, 건너집도 앞 기슭에 점점이 박힌 많은 집들도 하나 둘 불을 밝히는 시간. 이렇게 그린델발트에서의 또 하루가 지나갔다.





눈앞의 경치나 감상하며 별 일정 없이 늘어지게 쉴 생각이었다. 녀석은 축구를 하다가 싫증나면 그네를 타거나, 그것도 아니면 고양이나 토끼랑 놀면서 마음 끌리는 대로 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보내지만 난 그럴 수 없었다. 고무장갑도 없이 오랜만에 손빨래 신공을 펼치고 끼니때가 되면 밥을 차리고, 손톱 깎고, 게다가 구멍 난 양말도 찾아 기우고... 겨울이 되려면 아직 많은 날이 남았는데 스위스 산간 마을의 해는 너무나 짧다는 것을 몸소 체험한 하루였달까. 그래도 앞산을 바라보며 차 한잔 할 수 있어서 그것 만으로 감사했다.


그날 밤, 아니 정확하게 다음날 이른 새벽. 세상모르고 자는 아이 곁을 빠져나와 마당 한가운데에 오도카니 서 보았다. 스위스를 떠나기전에 꼭 하고자 했던 유일한 한가지를 실행에 옮기기 위함이었다. 밤하늘에 총총 떠있는 별을 보는 일이 그것이었다.


‘혼자보기 아깝고 기절할 정도로 아름다우면 어쩌지? 곤히 자는 녀석을 깨워 함께 보자고 할까?’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시야에 별이 맺히지 않았다. 휘영청 밝은 달빛은 마을을 휘감는데 뒷목 뻐근할 때까지 오랫동안 올려다보고 있어도 별을 찾는 것이 어려웠다. 왜지? 무엇때문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 이유를 알아버렸다. 처음에는 아이거의 만년설이 원인이라 여겼다. 한밤에도 눈이 시릴 정도로 환한 탓에 별이 잘 보이지 않는 것으로 단정지었다. 그러나 만일 내 추측이 맞다면 별들의 흔적을 가리고자 했던 원인 제공자는 따로 있었던 듯 싶다. 바로 건너편에 떠 있던 보름달이었다. 보름달이 반사경 역할을 하여 아이거를 비롯한 주위 봉우리의 만년설에 닿았고 그 바람에 더욱 주위가 환해졌던 것이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베어 나왔다. 일종의 의식처럼 아껴두었던 나만의 별 마중은 한편의 시트콤처럼 싱겁게 마무리되었다. 생각지 못한 훼방꾼들에 의해 뜻하지 않게.






그렇지만 골짜기로 퍼지는 카우벨 소리가 간간이 들려오는 산골마을의 새벽은 쏟아질 듯 촘촘히 박힌 샛별이 없어도 그 자체로 완벽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할 것들이 넘쳐나는 스위스에서는 알다시피 동적인 힐링이 정답이다. 알프스를 즐기는 다양한 방법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하루쯤은 걸음을 멈춘 채 동적인 힐링으로 채워진 에너지를 마음 한쪽에 촘촘히 나르며 다른 한편은 비워놓는 시간을 갖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잠시 멈추고 쉬어가는 장소로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황송한 뷰가 펼쳐져 있는 스위스의 조용한 산골마을은 더할 나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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