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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원철 Jun 14. 2017

월드컵에 탈락한다는 것.

월드컵 없는 2018년 6월을 상상할 수 있는가?

이 글을 구상하면서 "설마 진짜로 이런 일이 벌어지겠나?" 했던 일이 현실로 일어났다.


그렇다. 2018 러시아 월드컵 최종예선 카타르 원정경기에 나선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졸전 끝에 카타르에 2:3으로 패했다. 이것으로 9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할 확률이 상당히 올라갔다. 마지막 2경기의 결과에 따라 한국 축구는 조 3위가 되어 기나긴 플레이오프의 가시밭길로 접어들 수도 있고, 심하게 굴러 떨어지면 그것조차도 불가능할 수도 있다. 즉, 월드컵 탈락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나는 여기서 한국 축구의 문제에 대해 길게 하고 싶지는 않다. 축구 이야기는 나보다도 더 잘 아는 이들의 몫일 테니.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월드컵 탈락이 부를 축구 이외의 부분에서의 변화다. 한국 축구가 참가하지 못하는 월드컵이 열리는 2018년 6월은 지금까지의 '4의 배수+2'년 6월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일단 대규모 응원단이 러시아로 가는 일이 없어진다. 한국 축구가 월드컵에 없다는 것은 한국 축구의 든든한 12번째 선수였던 붉은 악마의 자리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팀의 경기를 보기 위해 출국하는 열성 축구팬, 혹은 그들의 모임은 있을 수 있지만, 응원단과 여행객 집단은 아주 많이 다르다. 응원단이 출국하지 않는다는 것은 방송사에서 월드컵 대응팀을 꾸리는 일도 없어진다는 뜻이다. 2002년 이후의 월드컵을 돌아보면 지상파 방송 3사는 축구 캐스터와 해설위원 이외에도 자사의 간판 프로그램의 출연진들을 모두 끌어모아 대규모의 팀을 꾸려 시청률 경쟁에 나섰다. 월드컵 기간이 되면 아침 교양 프로그램도 저녁 뉴스 프로그램도 주말 버라이어티 프로그램도 하나같이 배경이 축구 경기장이었다. 2014년 6월에 방영된 '무한도전' 브라질 월드컵 응원 특집을 보면, 멤버들과 게스트들이 숙소에서 알제리와의 경기가 열리는 포르투 알레그리까지 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서 다른 방송사 간판 프로그램의 MC며 패널이며 리포터까지 줄줄이 만나는, 이른바 '정모'의 현장이 브라질에서 연출되었다. 이것도 어디까지나 한국 축구가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한국 축구가 월드컵에 없다면?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이 열렸을 때, '이경규가 간다'에서 월드컵 특집을 최초로 시도한 이래 이어져온 하나의 흐름에 종지부가 찍힐 것이다. 어디까지나 러시아에 가는 것은 캐스터와 해설위원 몇 명으로 구성된 소수의 팀이 될 것이다. 다른 방송에서 월드컵 특집을 한다고 해도 아마 '무한도전'의 2006 독일 월드컵 특집처럼 한 방에 참가국 출신인들을 모아 그들과 같이 호흡하고 소통하면서 월드컵을 그냥 보는 정도의 방송이 나오지 않을까?


응원단이 가지 않으면 거리응원도 없다. 2002년 이후, 월드컵이 열리는 때마다 거리를 뜨겁게 물들인, 한 손에 태극기를 든 붉은 물결도 없어진다. 우리는 적막하기까지 한 광장을 마주할 것이다. 분명 우리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이 거리응원이 없는 대한민국을 보며 아쉬워할 것이다. 우리와 태극기가 다시 가까워질 기회도 사라진다. '태극기 집회'의 등장으로 인해 태극기는 극우의 상징물로 추락했고, 사람들에게 혐오의 대상으로까지 변질되고 말았다. 거리응원을 통해 2002년을 재현한다면 이른바 '태극기와의 화해'도 가능할 수 있겠지만, 그것조차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거리응원 철을 노린 이른바 '월드컵 마케팅'도 사라지고, 쇼핑의 성수기도 오지 않는다. 아마 치킨 판매량도 지난 월드컵에 비해 감소하지 않을까. 경기가 있어야 치느님과 함께할 테니. 게다가 공교롭게도 내년 전국 동시 지방선거일이 월드컵 개막 바로 전날인지라 선거유세차량도 돌아다니지 않을 것이다. 후보들의 현수막도 없다. 어제와 같은 평범한 일상이 월드컵과 관계없이 지속된다.


좋은 점도 몇 가지 있다. 드라마가 결방할 확률이 거의 없어진다. 한국과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의 시차는 6시간이다. 만일 러시아 월드컵 경기가 현지시각으로 3시에서 5시 사이에 킥오프 한다면 지상파 3사의 밤 드라마는 그냥 결방이다. 월드컵 대한민국 축구 중계는 보통 경기 1시간 전부터 시작하니까. 만일 한국 축구 없는 월드컵이 성사되면 방송중계는 특별한 경기를 제외하고 4개 방송사(즉, KBS, MBC, SBS, JTBC) 산하의 스포츠 채널에서 맡게 될 것이다. 지상파 3사에서 한국 경기를 겹치기로 중계하는 것에 의한 전파낭비도 사라진다. 드라마와 축구는 분리된다.


그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지상 최고의 축구 경기를 즐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한다. 사실 2002년 이후, 내가 국대축구를 볼 때마다 이기면 기분이 보통보다 조금 좋은 수준인데 지면 기분은 엄청 나빴다. 그런데 국대 없는 월드컵을 보게 된다면 경기마다 내가 응원하는 팀을 정하거나, 그럴 필요도 없이 그냥 보면 된다. 최고의 선수들이 보여주는 베스트 플레이의 향연에 그저 감탄하면 되는 것이다. 한국인으로서 보는 월드컵이 아니라 '나'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최초의 월드컵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한국 축구가 월드컵에 안 나가도 좋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단지 '한국 축구가 월드컵 본선에 탈락한 미래'를 상상했고, 그것을 글로 쓴 것뿐이다. 심기일전한 한국 축구가 월드컵 본선 진출을 결국 해낼 수도 있는 것이다. 미래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탈락의 미래'를 상상해보는 것도 마냥 나쁜 일은 아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한번 상상해 보라. 탈락의 미래를. 단, 지나치게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는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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