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없이 작게만 느껴질 때

-스페인, 발렌시아

by 셜리shirley

발렌시아 공항에 도착한건 저녁 9시즈음, 나는 이렇게 다시 스페인 땅을 밟게 되었다.


먼저 도착해 있던 동생을 만나 숙소 체크인을 마치고, 함께 저녁을 먹으러 나섰다. 저녁 늦은시간이라 거의 닫혀있겠지 싶었지만 생각보다 거리의 불빛은 밝았고, 열려있는 레스토랑도 곳곳에 있었다. 발렌시아에 왔으니 발렌시아식 빠에야를 시켰는데 엄청난 크기의 팬에 담겨 나왔다. 노르스름한 색깔의 빠에야의 맛은 정말이지... 최고였다! 연신 맛있다며 감탄사를 외치며 우리는 그 큰 빠에야 팬을 싹 비웠다. 마치 발렌시아에 온 걸 환영해- 라는 그런 따뜻함이 담긴 발렌시아에서의 첫 저녁이었다.


다음날은 아침, 눈부신 햇살이 비추는 발렌시아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가까이에 있는 성당과 마켓을 둘러보고, 맛있는 점심을 먹고 일찍 돌아왔다. 하지만 뭔가 이대로 오늘이 끝나는건 아깝다는 생각에 호텔 바로 앞에 바에서 발렌시아의 명물이라는 붉은 와인 ‘띤또 데 베라노’를 한잔하며 동생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스페인에서 1달정도 교환학생으로 연수를 왔다는 동생은 스페인이 늘 그리웠다고 했다. 유학시절에는 아무 걱정없이 즐거운 날들이었겠지. 지금은 면접을 보러다니며 정해지지 않은 미래 때문에 불안하지만, 그래도 스페인에 다시 오게 되어 너무 좋다고. 승무원이 돼서 이 도시를 기쁘게 다시 온다면 더 좋을 것 같다고. 동감하는 마음으로 와인잔을 함께 기울였다.

내일 우리에게 제발 행운의 여신이 웃어주기를 기도하며.







발렌시아에서의 면접 당일 아침이 되었다.

오늘은 유달리 한국인 지원자들이 많이 보였다. 부산에서 함께 스터디했던 동생도 이 면접에서 겨우 만나게 되었다. 이 친구도 한국인 전탈이라는 소식을 듣고도 자신에게는 첫 오픈데이라 도저히 포기할 수 없어서 왔다고 했다. 우리 모두 각자에게 이 면접은 이토록 소중했다.

여느 때와 같이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이곳에서조차 한국인 전탈이라면 정말이지 나는 더 이상 면접을 볼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에 너무나 간절했다.

CV드롭이 끝났고, 이제 모든 건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결과발표는... 놀랍게도 한국인 합격자가 나왔다. 대기하면서 잠시 얘기를 나눴던 분이었는데 남아공에서 유엔 관련 인턴을 하다가 이곳에 여행 차 와서 면접에 참여했다고 했다. 게다가 이탈리어까지 유창해서 이탈리아 지원자들과 너무나 자연스럽게 얘기를 나누는 게 눈에 띄었다. 이미 스펙부터가 너무나 차이난다고 생각하니 내 자신이 작아지는 것 같았다.

면접관을 사로잡은 저 밝고도 당당한 모습도 스펙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내 멋대로 그렇게 단정짓자 더더욱 침울한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한국인 전탈이 아닌 걸 경험한 것만으로도 희망이 있는 면접이었다. 그 말은 결국 내가 탈락한건 내 역량 부족이라는 말과도 같았다. 환경 탓을 하기엔 나는 여전히 너무나 부족했던 걸까.

문득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봤다. 남색 원피스를 입고 스카프를 두른 채 깔끔하게 올려묶은 머리. 브리스톨 면접에서는 주변 지원자들로부터 승무원 현직같아 보인다는 칭찬을 들을 정도로 나는 첫 유럽면접투어에 비하면 이미지적으로 한단계 성장한 모습이었다. 입꼬리에 경련이 생길정도로 연습한 덕에 미소 짓는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고, 9cm힐은 여전히 발이 아팠지만, 걷는 모습도 제법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주눅들어 자신감을 잃자 그 모든 게 허사가 되는 듯 했다. 나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지 않는 지원자를 뽑아줄 면접관은 누가 있을까.


나에겐 그 사람처럼 화려한 스펙은 없을지 몰라도, 내겐 나만의 스토리가 넘쳐났다. 일본교환학생, 공항근무경력, 영국어학연수 등등 지금까지 경험한 것들을 바탕으로 준비한 면접답변은 오히려 너무 스토리가 많아서 간추리기 힘들 정도였으니까. 면접은 결국 내 이야기를 어떻게 면접관에게 잘 어필하느냐의 싸움이기 때문에 나에겐 유리한 싸움이었다.

이 1차 면접의 고비만 넘기면, 내게는 풀어낼 매력적인 이야기들이 너무 많이 있기에,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는 나를 누르고 자신감을 빼앗을 뿐이다. 자신감을 잃고 한없이 작아져 있기에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분명했다.


문득 어떤 책의 한 구절이 생각이 났다.

나아감이란 내가 남보다 앞서나가는 게 아니라, 과거의 나에서 한발짝 성장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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