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헤매도 괜찮아, 자라고 있으니

- 이탈리아 베니스에서의 마지막 밤

by 셜리shirley

1분이 1만분 같던 대기시간이 끝나고, 결과발표가 나왔다.



늘 그렇듯 면접장 문에 붙은 합격자들의 명단엔 6-7명 남짓의 번호만이 살아남아 있었다.

제발.. 제발.. 내 번호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명단을 보았을 땐

내 번호는 없었다. 이번에도 결국 이 산을 넘지 못하는구나.


터덜터덜, 짐을 챙겨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내 모습이 이다지도 싫은 적이 없었다. 어떻게 올라가서 잡은 기회인데... 결국 내 실력 때문에 떨어졌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울고 싶었지만, 나는 울 자격 조차도 없는 것 같았다. 마지막이라 생각한 면접이었는데, 내가 다 망쳐버린 것 만 같아서,

옷을 갈아입고, 숙소에 돌아오자 동행인 동생들에게서 연락이 와있었다. 베니스 시내의 한 식당인데 같이 저녁먹자며 얼른 오라는 문자였다. 면접에 떨어져서 마음이 힘든 건 마찬가지일 텐데 나를 위로해주려고 애쓰는 동생들이 너무나 고마웠다.



베니스를 여행해본 사람이라면 공감하겠지만, 길 찾기가 굉장히 힘들다. 꼬불꼬불 미로와 같은 길들은 한참을 돌고 돌아도 같은 곳인 것 같고, 아무리 구글지도라 해도 너무나 작고 좁은 길이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듯 했다. 나는 아마 꼬박 1시간을 헤매고 헤매다 겨우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모든 걸 쏟아낸 면접 직후라 속이 다 비어버리고 껍데기만 너덜거렸던 나를 간신히 데리고 나온 거라 사실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너무나 배가 고팠고 마음역시 너무나 고팠다. 하지만 저녁 어스름녁의 베니스는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헤메는 길 조차도 너무나 예쁘고 아기자기해서 나는 한참을 헤메는데도 불안하거나 짜증이 나지 않았다. 신기했다. 길치인 나에게 길을 헤메는 일은 밥먹듯 흔한 일이었고, 그때마다 나는 항상 불안해 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나에게 이젠 진짜 여행이 필요할 때라고.

나 그동안 너무 수고했고 더 이상 나를 몰아붙이지 말자고.

좀 헤메면 어때, 어쨌든 그 과정에서 분명 나는 자랐을거고, 나는 지금 더 나은 내가 되고 있는 거라고.



도착한 레스토랑은 아주 작았지만, 오래된 곳 같았다. 먼지가 쌓여있는 조명들의 불빛은 편안했고, 그곳에서 식사하는 이탈리아 현지인들의 저녁은 여유로워 보였다. 두말할 것 없이 음식은 너무나 훌륭했고, 레몬으로 담근 술은 생각보다 진하고 도수가 셌다. 덕분에 오랜만에 취기가 올랐고 그렇게 동생들과 함께 깔깔거리며 웃을 수 있었다.

그렇게 기분좋게 취한 셋은 함께 야경을 보러 돌아다니며 사진도 찍고, 서로의 쓰린 마음들을 위로했다. 이날 밤이 지나면 모두들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했고, 서로의 자리에서 기회들에 충실하자며 그렇게 서로를 격려했다.



그리고 나는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열리는 면접을 마지막으로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정했다. 그 안에 일주일이라는 텀이 남아있었기에, 나는 그동안 고생한 나를 위해 잠시의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결국 비행기 티켓을 일주일 미룬 날짜로 변경하고, 내일은 피렌체로, 그리고 다음은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가는 비행기 티켓까지 예매를 마쳤다. 나에게 주는 선물같은 티켓을 보자 슬쩍 웃음이 나왔다. 몇시간전 면접에 탈락해서 울고싶었던 기분이 순간 거짓말처럼 괜찮아졌다. 여행이 주는 마법이란 이런것일까






다음날, 베니스에서 피렌체까지 가는 기차를 타기위해 기차역으로 갔다. 워낙 소매치기와 사기꾼들이 득실대는 기차역에서 나와 동생은 바짝 긴장된 상태였다. 아니나 다를까 짐을 옮겨준다며 우리에게 따라붙은 남자가 막무가내로 우리의 캐리어를 잡는게 아닌가. 동생이 단호하게 큰소리로 거절하자 그제서야 욕설을 지껄이며 물러났다. 덩치가 큰 남자였고 무리와 함께 있는 것 같아 잔뜩 겁이 났고, 때마침 도착한 기차에 얼른 탔다.



드디어, 온전한 여행의 시작, 피렌체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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