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 카푸어의 소소한 일상
눈이 부시게 아침이 밝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출근을 하기 위해서 준비를 한다. 도심 속 고층아파트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세상은 마치 바닥에 떨어뜨려진 달콤한 사탕 주위로 향하는 개미떼들의 행렬과 흡사하다. 이곳은 개미들과 함께 모터를 달고 움직이는 거대한 쇳덩어리들의 치열한 행군도 이어진다. 그 속에선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질서가 작동하고 있다.
약 15분을 달려, 회사에 도착한다. 아침 일찍 납품차량들이 공장동 적재장을 가득 메우고 직원들의 주차장을 꿰차고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내 소중한 차량을 어쩔 수 없이 길가 도로가에 주차를 할 수밖에 없다. 벤츠는 승차감보다 하차감이라고 하지만, 이 공단 주위에 보이는 사람들은 마치 좀비처럼 허겁지겁 달려가는 모습들 뿐이다. 다들 '출근 시간 20분 전 책상에 앉아 있어라'는 사장님, 혹은 직장상사의 충고 때문인가?, 매서운 레이더를 피해 무언의 위험이 주는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 무사히 자신의 책상에 열심히 일하고 있었던 것처럼 안착하는 것이 제일 시급한 과제인 것이다.
나는 00 중소기업 영업부 주임이다. 출근하자마자 상사의 큰 목소리가 들려온다.
탈의실이 없어 탕비실에 들러 환복을 실시한다. 회사 작업복은 특별한 게 있는 게 아니라 몇 년 전 회사 체육대회 때 받은 알록달록한 색상의 등산복이다. 나는 현실세계로 돌아온 것이다.
사실, 나는 이 조직의 KGB 요원이다.
흔히 말해서 개잡부는 아침에 출근을 하며 국/내외에서 수신한 메일들을 접수하고 회신을 준다. 오늘 납품하기로 한 물량 준비가 되었는지 현장에 내려가서 포장 지시를 하고 배차를 한다. 납품차량이 도착하면 지게차로 팔레트 단위로 적재를 한다. 적재가 완료되면 사무실로 와서 출하와 판매 처리를 완료하고, 현장에 가서 재고현황을 확인한다. 가끔 현장 직원 결근이 생기면, 곧바로 라인에 투입되어 생산을 한다. 설비가 고장 나면 직접 기계를 고치기도 하고, 투입될 소재가 부족하면 직접 업체로 달려가서 물건을 공수해오기도 했다.
내가 추구하는 삶의 소중함과 행복이 짓밟히는 기분이다.
물량 공급을 위해 고객사 자재창고 앞에 도착했다. 여러 장의 A4지 물품 리스트가 놓인 클립보드를 한 손으로 들고 잔뜩 불만 어린 눈초리로 내 차의 동선을 주시하고 있는 고객사 신입 자재 관리자가 보인다.
나는 차량에 내리자마자 90도로 그 담당자에게 인사를 건네지만, 그 고객사 자재 담당자는 인사를 받아주기는 커녕 거드름일 피우며 면박을 주기 시작한다. 그는 일단 물품을 컨테이너에 바로 실어라고 지시한다. 뒷좌석에 실려있는 물품을 나 혼자 옮기는 데는 여러 차례 왔다 갔다 해야 할 상황이지만 이 자재 당자는 여전히 팔짱을 끼고 나의 노동력의 성실함과 신속함을 삐딱하게 감시하고 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자재 담당자는 내가 나온 고등학교의 3년 후배 녀석이었다.
녀석도 나 같은 협력업체 벤더 직원들을 무작정 갈구라는 지시를 상사로부터 받았을 것이다.
그래야 나 같은 협력사 놈들이 말도 잘 듣고, 그 담당자가 편할 거라고....
물건을 나르는 동안 마치 봉건시대 지주에게 감시당하는 노예가 된 듯하다. 적재가 끝나면 그 녀석의 2차 면박이 이어진다. 자존심은 구겨질 대로 구겨졌고, 이건 아니다 싶어 진짜 한번 부딪혀야겠다는 생각이 들 즈음에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나는 어찌 되었던 이 상황을 감수해야만 한다.
한쪽 방향으로 꺾인 권리를 다른 방향으로 구부리는 것은
현실세계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상사는 수고했다는 말보다. 발생한 문제에 대해 나의 과오만을 이야기할 뿐이다. 거래처에서 당한 그 수모에 이어 내가 기댈 직장이란 곳에서도 맹렬한 비난만 있을 뿐이다.
낮은 자존감, 한마디로 말해 내 인생은 'C'급 인생이다. 업무를 끝내고 어둑해진 밤거리를 헤집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내가 바라는 삶이 무척이나 훼손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내가 느끼고 싶은 짧은 순간의 행복도 나에게는 중요하다.
'금융자본주의', '가치투자', '노후대비', '저축', '투자'
모두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오늘 하루의 내 삶도 중요하다.
주말이면, 나를 설레게 하는 여인이나 친구들을 만나, 고급스러운 일상과 행복을 상징하는
벤츠와 함께 하는 것이다. 내가 감수해야 했던 수모는 그저 나 홀로 받아들이면 된다.
차량 뒷좌석에 가득 실려있었던 그리스로 무장한 열처리된 쇳덩이들이 남긴 자국도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누군가에게 행복을 주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있어서는 삶의 기쁨이다. 결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삶이 속임수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생각이 점점 깊어지는 가운데,
벤츠의 고급스러운 콕핏 모듈에서는 갑자기 연비 부족 시그널을 보낸다.
'에라이, 기름도 부족하네'
기름을 가득 넣고 싶었으나 오늘 문자에 찍혔던 잔액을 확인했기 때문에 창문을 내리고 겸손한 자세로 외친다.
아저씨, 만원치 넣어주세요
나는 내일도 벤츠를 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