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규직 근로자 김내성 과장이다. 내 이름처럼 난 내성적이고 알파벳 소문자 a형의 극 소심한 김 과장이다.
오늘 모처럼 방문한 고객사 손님과 향후 비즈니스에 관하여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마라톤 미팅을 했다. 한 공간에서 10시간이 넘는 이야기로 체력이 바닥난 상태인데 나의 팀장은 개인적인 일이 있다며 손님들의 저녁 접대를 나에게 맡겼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최근 입사한 신입사원 한 명을 데리고 고객과 접대 장소로 향했다.
저녁 접대 자리에는 무슨 얘길 꺼내 들어야 서로 어색함 없이 잘 보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나저나 오랜 미팅으로 업무에 대해 떠들어 댔는 데다가 심신도 미약해졌는데 아직도 더 할 얘기가 있어야 한다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어쨌든 저녁식사가 시작되었다. 회식자리에서는 낮에 있었던 업무 이야기가 리바이벌된다. 그러다 새로운 발견점이 있으면 고객들은 또 어떤 숙제를 만들어 던진다. 사실 이들과 할 얘기는 일 얘기밖에 없다. 가끔 시사적인 것이나 사회적인 이슈를 서로 이야기하다가도 공감된 부분을 찾지 못하면 대부분 어색하게 끝나버린다.
나는 어쨌든 어떤 공통된 주제를 찾아 분위기를 심심하지 않게 해야 한다. '아니 근데 만난 지도 얼마 안 되었는데 그 공통된 주제가 도대체 뭐람?' 식사를 한다고 그저 앉아 있는 게 아니다. 이들을 웃게 해 주거나 관심을 끌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화를 하면서도 다른 화재거리를 머릿속으로 계속 찾아 내야 된다. 이야기가 끊기지 않고 여러 흥미 있는 주제들로 이 자리를 화기애애함으로 계속 채워 넣는 것이 나의 임무이다. 마치 노래방에서 부를 노래들을 미리 선곡해야 하는 것과 같다도 비슷한 듯하다. 그러다 더 이상 좋은 이야깃거리가 떠오르지 않는다. '아, 지원군이 필요한데...'
"이런 제길 같이 데려간 신입 놈은 아무 말도 없이, 표정 변함없이 밥만 먹고 있다.
저놈은 정말 밥 먹으러 온 녀석이군!"
지루한 회식자리를 즐겁게 만들고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능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것도 나같이 내성적인 사람에게 있어서는 한계가 있는 듯하다. 당장이라도 집에 돌아가서 처자식들의 얼굴도 보고 휴식을 취하고 싶다. 더 이상 서로 할 말도 없는 고객들은 멀리서 온 손님들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오늘 하루 숙박을 해야 하고 웬만하면 우리 회사 법인카드로 접대를 받는 것이 이들에게는 이득일 수 있다. 나는 회사에 야근수당, 연장수당을 청구하고 싶지만 아무도 이것을 노동으로 생각하지는 않는 듯하다. 오히려 회사 돈으로 맛있는 저녁을 배불리 먹었다고 혜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나는 그렇게 재밌거나 편한 스타일이 아니라서 오늘 나를 마주한 이 고객 손님들도 다소 어색한 기분에 불편함이 있을 텐데, 어째 먼저 집으로 가라고 이야기하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가 울리는 변죽 따윈 신경 쓰지 않는 듯하다. 이렇게 얻어먹는 것도 녀석들의 원가 절감 수법인가? 이 녀석들의 어깨에 들어가 있는 뽕은 아직도 하늘을 향해 승천하고 있다. 나이도 한참 어린 동생들인데, 큰집에 사는 머슴이라고 본인들도 나와 같은 머슴이라는 것을 잠시 잊어버린 듯하다.
생각해보면 오늘의 나의 접대도 나에게 있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이 고객 손님들은 내가 누군가의 지시로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을 모셔야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도 나로부터 제공되는 표정, 말투, 몸짓, 재미있는 이야기 등 모든 대접이 가짜라는 걸 알고 있는 눈치다. 결국 이들은 자신들이 받는 이 접대의 고마움을 내가 아니라 나를 보내준 팀장에게 할 것이다. 나란 존재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이들과의 대화 속에서 숨겨진 인간적인 친밀함을 갈구한 건 아녔을까?
이 상황에서 나의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중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진심을 다하려고 해도 이 상황과 분위기는 나를 가짜로 만든다.
나는 이런 상황이 그저 원망스럽기만 하다.
접대 자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라디오를 틀었다. 많이 듣던 전주가 나오고 서영은의 '혼자가 아닌 나'라는 노래가 나왔다.
<힘이 들 땐 하늘을 봐 너는 항상 혼자가 아니야 비가 와도 모진 바람 불어도 햇살은 다시 비추니까...>
쓸쓸했지만 그리고 아쉬웠지만 그래도 이 모든 시간들은 노래 가사처럼 '내일'이 되면 어쨌든 그렇게 '어제'가 되는 하루인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