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연처럼 Aug 29. 2024

꼭 죽어야만 할까?

"누구나 멸망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조금 무거운 주제이기는 하지만 이 주제는 너무 중요하기에 가끔은 이 주제를 떠올려보게 된다. 우리의 삶과 죽음은 이웃사촌이다. 우리는 결코 이를 떠나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심코 쓰는 표현 중에 못 살겠다, 죽겠다고 말할 때가 있다. 그러면 실제 이 말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대다수는 실제 죽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습관처럼 그냥 나도 모르게 입에서 쉽게 나오게 된 게 대부분이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언제 이런 말을 했는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웃거나 다른 일에 몰두하게 된다.


오히려 우리는 자신에게 닥쳐진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그것을 감당하며 스스로 이겨 내려고 온갖 힘을 다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의 경우엔 위험을 무릅써가며 삶을 즐기기에 온 힘을 다한다. 어떤 사람은 히말라야의 빙산을 등반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바닷속 구경을 위해 태평양의 심해 바다로 들어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며 위험을 무릅쓰기도 한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길진 않지만 한 번뿐인 인생을 멋지게 살아보려는 마음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한편으로는 좀 더 건강하게 좀 더 오래 사는 방법이 없을까를 찾으며 부단히도 노력하는 우리 이웃들을 자주 보게 된다. 소문난 온갖 좋다는 음식과 약이며 운동 등 자신의 여건에서 하는 방법이 있다면 무엇이든 하려고 애쓴다. 이러한 간절한 노력은 건강한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불의의 사고로 큰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남아 앗는 능력으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의미 있는 일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게 될 때 우리는 눈시울이 붉어질 때가 있다. 이처럼 우리의 생명은 건강한 사람에게나 몸이 불편한 사람에게나 누구에게나 소중하다.


이처럼 우리가 본능에 따라 온 힘을 다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인간은 누구나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길 원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에 대한 간절함은 살아생전만이 아니다. 본의 아니게 때 이른 죽음을 맞이하거나 나이가 들어 정상적인 죽음을 맞이한다고 하더라도 남은 자들에게는 여간 슬픈 일이 아니다. 그래서 산 자들은 죽음이 못내 아쉬운 나머지 해마다 죽은 기일이 되면 이날을 잊지 않기 위해 죽은 자를 위해 제사를 지낸다. 심지어는 얼굴도 한 번 본 적이 없는 죽은 조상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관습이 지금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우리에게 있어 죽음이란 옷이 우리에게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것인지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다.


나라마다 약간의 문화 차이는 있겠지만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관습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고대 삼국 시대의 왕릉에서 출토된 유적을 보면 죽은 임금과 함께 그가 사용하던 다양한 물품들을 함께 넣어줌으로 그가 혹시 사후 세계에서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한 것 같다.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에서도 별다르지 않은 것 같다. 후세의 많은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수많은 유물이 죽은 자와 함께 발견되므로 죽은 자들이 가진 삶에 대한 애착을 유추해 보게 된다.


그러면 우리 인간에게 이처럼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각자를 한번 돌이켜 볼 수 있겠다. 그중 한 가지는 할 수만 있다면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우리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면 한 가지 분야를 오랫동안 연구해서 박사 학위를 받는다. 동물과 식물학자는 물론 의학박사 등 자신이 좋아하는 한 가지 분야를 연구한 결과이다.아마도 이들에게도 좀 더 배움의 기회가 더 주어진다면 자신이 하던 분야를 좀 더 깊이 연구해 보든지 아니면 지금까지 해왔던 분야와는 다른 분야를 배워 보고 싶은 사람이 많을 것이다.


배움에 대한 간절함은 이뿐이 아니다. 어떤 이들의 경우엔 배움의 기회를 놓쳐서 그것이 평생을 두고 한이 되어 더 늦기 전에 배움을 시도하기도 한다. 사실 이분들의 경우엔 배워도 딱히 그 배운 것을 써볼 기회나 시간이 많지 않음에도 그러한 힘든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60대 70대가 되어서도 그 열정이 식질 않아 결국 늦깎이로 배움을 다시 시작하는 경우를 보게 되면 인간에게 있어 이 배움이라는 것이 얼마나 간절한 것인지 다시금 느끼게 한다.


죽음이 더욱 안타까운 이유는 원래 우리 인간은 죽지 않고 살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설계자들은 자신이 만든 제품이 얼마 지나지 않아 제대로 사용도 못 해보고 고장 나게 하는 설계자는 없을 것이다. 별 능력도 없는 인간이 이럴진대 하물며 전지전능하신 창조주께서 우리 인간을 처음부터 죽도록 의도하셨다면 이치에 맞지 않는 처사가 아닐지 생각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창조주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고 나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정복하라고 명령하셨다. 적당히 살다가 죽으라고 말씀하지 않았다. 만일 처음부터 그렇게 의도하셨다면 그분은 전능하신 분도 아닐뿐더러 사랑이 없는 분이 될 것이다.


여러 가지 증거를 살펴볼 때 인간에게 죽음은 너무나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원래 창조주의 인간에 대한 목적대로 이 땅에서 영원히 살도록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창조주의 의도대로 모든 것이 바로 잡힐 때가 도래할 것이다. 이것이 자연의 순리다.


로마서 5:12 "그러므로 한 사람을 통해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를 통해 죽음이 들어왔으며 이처럼 모두가 죄를 지었으므로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퍼졌습니다."


요한복음 3: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매우 사랑하셔서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믿음을 나타내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공정한 세상은 가능할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