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
초행길은 언제나 우리를 낯설고 두렵게 한다. 자동차 운전을 할 때는 더욱 그렇다. 달리는 도로며 눈에 보이는 주변 지형과 건물이 모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등산길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히말라야를 처음 등반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경험 많은 셰르파와 동행한다. 험준한 산을 수없이 다녔을 그와의 산행은 처음 등반하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우리는 인생의 길을 걸어감에 있어 모두가 초행길이다. 노년이 되어 기력이 떨어지면 자신에게 닥쳐올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내가 가야 할 죽음 저 너머의 세상은 과연 어떤 세상일까? 하지만 아쉽게도 세상에서 현자라 불린 어떤 사람도 이에 대해 명쾌한 대답을 해 주지 못했다.
지난 역사의 발자취에는 사람들의 의문에 답하듯 사후 세계를 묘사한 예술 작품이나 출판물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이를 통해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다. 그중 에는 단테의 신곡이 있다.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일컬어지는 이 작품은 지옥과 연옥, 천국을 여행하며 사후에 겪는 여정을 묘사하고 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자신이 지은 죄의 무게에 따라 9개로 나눠진 지옥을 여행하며 죄와 벌을 목격하게 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영향을 받아서일까?
많은 종교의 가르침과 행위 역시 사람들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고자 화답했다.이러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데 종교가 일조를 했다. 16세기 가톨릭 교황청에서는 신자들의 죄를 사하여 지옥과 연옥을 면할 수 있다는 면죄부를 판매했었다.
사제들은 지옥과 연옥을 가르쳤고, 교회의 목사들 역시 지옥을 서슴없이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불안하게 했다. 불교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절에 그려진 그림들은 공포스럽게 지옥을 묘사함으로 두려움에 떨게 했다. 이렇듯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죽음 이후의 지옥에 대해 사실처럼 가르쳐왔다.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젊음이 한창일 때는 까맣게 잊고 살다가 막상 노년이 되어 죽음이 가까워지면 슬슬 불안해진다. 자신도 모르게 각인된 가르침의 효과 때문인가? 혹시 자신에게도 지옥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실 확인을 위해 사전 답사를 해볼 수도 없다. 혹시라도 나에게 이런 일이 닥친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죽음을 목전에 둔 부자들은 혹시 뜨거운 지옥에라도 떨어질까? 교회나 절에 가서 자신이 평생 동안 모아둔 큰돈을 기부한다.
누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줄 수 있을까?
사실 우리 주변의 종교들은 사람들이 진리를 깨닫기를 원치 않는 것 같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돈을 모으는 데 있을 뿐인 것 같다. 할 수만 있다면 많은 신자를 모으고 그 신자들은 돈을 모으는 수단일 뿐이다. 그들은 모은 돈으로 건물을 웅장하게 짓고, 호화로운 부를 누리고 자식들에게 그 부가 이어지도록 세습에 관심을 가질 뿐이다.
초행길에 대한 진리는 알 수 없는 것일까?
논리적인 생각을 해보면 인간의 생각과 이해를 뛰어넘는 창조주가 계신다면 명료한 답을 알려주시는 것이 맞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사후의 세상에 대한 답을 알려주셨다.우리는 죽음 이후의 세상을 경험해 보지 않았지만, 그 대답을 명확히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마치 초행길을 등반하는 등반객이 노련한 셰르파를 믿고 의지하듯 우리는 하느님의 인도에 의지해야 한다.더 이상 세속화된 종교들의 가르침에 속을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세상의 헛된 속임수에 현혹되지 말고, 겸손하게 하느님의 가르침과 인도에 순응하자.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처럼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 (이사야 55:9 신세계 역)
"살아 있는 자는 자기가 죽을 것을 알지만,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한다. 그들에 대한 기억이 모두 잊혀졌기 때문이다."(전도서 9:5 신세계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