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시 40
*늦게 가는 편지
울산 방어진에는 울기등대가 있다. 그리고 울산의 명소로 손꼽는 대왕암이 있다. 그 대왕암 입구에 보면 늦게 가는 편지를 담는 키 큰 우체통이 하나 있다. 그곳을 찾았다가 문득 하나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만약 이 우체통에 신라시대의 어느 왕자와 소녀의 사랑이야기를 편지로 써 둔 것이 있다면, 그 편지를 지금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리고 지금 내가 편지를 써서 이 편지통에 넣어둔다면 천 년 후의 어느 한 소년이 내 사연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물론 현실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상상에 현실적인 논리를 들이민다면 이미 상상이 아닌 것이 된다. 그렇다면 동화도 존재하지 않아야 하며, 공상과학 소설도 존재의 의미를 지니기 힘들다. 문학은 어차피 픽션의 기능이 있고, 그 기능을 시에 접한다면, 상상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으리라. 이런 상상을 해본다면 재미있지 않을까?
삼국을 통일한 문무대왕과 그 왕비의 이야기를 시로 적어보았다. 경북 양북면 봉길리에 있는 대왕암은 문무왕릉이다. 그에 반해 울산 방어진 울기등대 앞에 있는 대왕암은 문무대왕비의 무덤이라는 전설이 내려온다.
신라의 어느 사랑 이야기
젊고 멋진 신라 왕자가
방어진을 지나다 하루를 묵었다네.
그 날은 달이 하도 밝아
혼자 달을 보고 걸었다네.
방어진 바다 가는 길에는
키가 큰 소나무 숲이 있었는데,
달빛 머금어 고요한 소나무 사이에서
그만 하얀 소녀를 보고 말았네.
“용궁의 공주일까?
하늘의 선녀일까?
사람이 어찌 이리 아름다울까?
저 소녀를 사랑할 수 있다면
세상 어떤 부귀도 부럽지 않을 텐데.
다가가서 말이라도 건네 볼까?
놀라서 도망이라도 가면
언제 다시 볼 수나 있을까?
뛰는 가슴아 제발 진정해라.”
소녀에게 반해버린 왕자는
가슴 조마조마하며 숨어
살며시 소녀를 뒤따랐다네.
바다가 보이는 언덕까지 간 소녀는
달을 보며 소원을 빌었다네.
“내 낭군은 어디 있는가요?”
날 사랑하는 마음만은 저 바위처럼
단단해 변함이 없는 사람.
부디 그런 사람 만나게 해주세요.”
그때 왕자는 신분을 숨기고
소녀 앞으로 다가갔다네.
소녀는 깜짝 놀랐지만
하얀 달빛에 비친 얼굴이
선하게 생겨 안심했다네.
처음 만난 둘은 금방 사랑에 빠졌다네.
밤이면 밤마다 둘은
소나무가 울창한 바닷가에서
아무도 모르게 사랑을 나누었네.
시간은 바람개비처럼 빨리 흘러
왕에게서 백제가 침략했으니
돌아오라는 명이 내려졌고,
이제 왕자는 돌아가야만 했다네.
왕자는 소녀에게 떨리는 말로 언약했네.
“날 기다려 준다면
다시 돌아와 그대를 데려가
저 달이 멈추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그대를 사랑하겠오.”
“잘 가세요, 내 사랑
바다의 저 바위가 바람에 닳고
파도에 녹아 없어져도
언제까지나 당신을 기다릴게요.“
왕자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고
소녀는 눈물로 손을 흔들었다네.
왕자는 금방 돌아오고 싶었지만
백제와 싸우고, 고구려와 싸우고
당나라와 싸우며, 전쟁은 끝이 없었다네.
전쟁터에 나가서 용감히 싸웠던
왕자는 소녀에게 돌아올 수 없었다네.
그 사이 아무 것도 모르는 어부는
딸을 시집보내려 하였지만
소녀는 한사코 거절했다네.
‘저 바다의 저 바위가 그대로 있는데
어찌 다른 사람을 사랑하리오.
마음이 하나이듯 사랑도 하나이니
언제나 그대를 기다리겠어요.‘
전쟁터에서 생사를 오가며 싸우는 왕자도
달을 보며 소녀를 그리워했다네.
‘저 달을 그대도 보고 있겠죠.
변함없이 달이 뜨고
변함없이 달이 지고
내 마음도 변함없이
오직 그대만 그리워한다오.”
어느 덧 15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그 사이 왕이 죽고 왕자는 왕위에 올라
백제를 무찌르고, 고구려도 무찌르고
당나라도 쫓아내었다네.
삼국을 통일한 왕이 된 왕자는
그 소녀를 찾아갔다네.
소나무가 울창한 방어진 바닷가
처음 봤을 때처럼
소녀는 달을 보고 있었다네.
한 눈에 소녀를 알아본 왕은
살며시 다가가 소녀를 안았다네.
감짝 놀란 소녀는 눈물을 흘렸다네.
둘은 너무나 기뻐 감격하며
서로를 안았다네.
울창한 소나무도 함께 기뻐했다네.
둘은 경주로 함께 돌아와 결혼했고
왕과 왕비로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다네.
왕은 죽어 양북 앞 바다 바위 속에 묻혔고.
용이 되어 신라를 지켰다네.
그 바위를 사람들은 대왕암이라 부른다네.
왕비는 죽어 방어진 앞바다
바위 속에 묻혔고 용이 되었는데,
그 바위도 사람들은 대왕암이라 부른다네.
용이 된 왕과 왕비는 달빛 하얀 밤이면
아무도 몰래 사람으로 변해
울창한 울기 등대 솔 숲 사이를 함께 거닐며
대왕암처럼 단단한
변하지 않는 사랑을 이어가고 있다네.
신라 왕자와 소녀가 사랑을 속삭인
방어진 바다 언덕 위엔 등대가 세워져
길 잃고 방황하는 어부를 지켜주었네.
그 등대를 사람들은 울기등대라 부른다네.
울기등대와 대왕암 사이엔
늦게 가는 편지를 담는 우체통이 있다네.
천 년도 훨씬 지난 어느 날
대왕암 앞, 늦게 가는 우체통을 지나다
신라 왕자와 소녀가 넣은 편지를
우연히 보게 되었네.
순수한 신라 왕자의 마음과
순수한 신라 소녀의 마음이
변하지 않은 채 담겨있었네.
그 편지를 읽고, 내 사랑 이야기도
그 속에 담아 두었네.
천 년이 지난 어느 날
누군가가 우연히 보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