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21살이 되던 해에, 엄마는 갑상선 암 진단을 받았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아니라, 난 이 세상이 끝장나는 줄 알았다.
누구라도 붙잡고 짐승처럼 울고 싶었지만, 나만 바라보는 어린 동생들을 보며 꾸역꾸역 울음을 참았었다. 목구멍이 찢어질 듯이 아프고,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지만 '이깟게 다 뭐냐, 엄마가 가장 아플 텐데'라는 마음이었다.
엄마는 평생 말하는 걸 업으로 삼으셨고, 노래도 잘 부르시는 멋쟁이 었다. 그런데, 종양 위치가 성대와 너무 가까워 다신 노래를 부르지 못할 거란다. 순간 발밑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노래 한곡쯤은 부를 수 있는 상태로 퇴원하게 됐다. 그렇게 며칠간 입원 생활을 끝내고 퇴원 수속을 밟으며, 의사 선생님과 다시 만나게 됐다. 의사 선생님은 엄마와 내게 당부하셨다.
"이 약은 꼭 매일 드셔야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 망했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뒤집어놨다.
우리 엄마는 감기 몸살에 걸려도 병원 가길 귀찮아하고, 받아온 약도 한 봉지(하루치 말고, 고작 한 봉지)만 드시고 던져놓기 일쑤였다. 그뿐이랴? 몸이 아파도 저녁 약속이 생기면 "아이고 이 정도는 아픈 것도 아니야."라며 나 몰래 쌩 나가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개구쟁이 엄마가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니. 눈앞이 컴컴했다. 그렇다고 의사 선생님을 세워놓고 "아이고 선생님, 저희 엄마는 청개구리라서 하루 이틀 먹으면 다행이고 오늘부터도 안 드실지 모릅니다."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반쯤 포기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하단 말을 연신 뱉고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진귀한 일을 목격했다. 난 걸음을 멈추고 엄마를 바라봤다.
'헐.'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이후 최고의 반전이었다. 무려 우리 엄마가 엄마 손으로 알아서 약을 드시고 계셨으니, 이건 세상에 이런 일이 급 특종이었다.
그 자리에서 쪼르르 달려가 엄마의 엉덩이를 팡팡 두들기며 칭찬세례를 뿜어냈더니, 엄마는 괜스레 부끄러워하셨다.
"왜이려?"
"우리 이여사 이뻐죽겠으요."
"저리 안가?"
"넵."
비록 다른 약들은 꾸준히 드시진 않았지만, 이는 장족의 발전이자 첫아이가 첫 뒤집기 성공한 걸 직관한 부모의 마음이었다. (이거 우리 엄마가 보면 한 세대쯤 등짝 맞을지도.)
아무튼 그렇게 몇 년이 지났고, 지금도 엄마는 호르몬 약을 복용하신다. 가끔 까먹는 날을 제외하곤 아주 잘 챙겨 드시고 계신다. 언젠가 한번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웬일로 약을 혼자 다 챙겨 드시는 거예요?"
"먹으라잖아."
"그거야 엄마를 진찰한 모든 의사 선생님들이 그러셨었죠."
"뭐 또 잔소리야?"
"헤헤"
"아프면 안 되겠더라고. 내가 아프면 내 새끼들이 잘못되니까, 겁나더라."
가볍게 물어본 질문이었는데, 이렇게 진지한 답으로 돌아올 줄 몰랐다. 친구 '같은' 엄마이기에 평소처럼 유쾌한 답을 기대했지만 돌아온 답에 가슴이 먹먹했다. 아침부터 사람 울려놓고 엄마는 태연하게 텔레비전 드라마 재방송을 보시길래, 앞을 가로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