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차의 맛으로 표현하자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씁쓰레하다'가 아닐까?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고통'이라고 했는데 이 말에 동의한다. '씁쓰레하다'는 건 조금 쓰고 텁텁하다는 뜻인데 '고통'보다 감정을 더 섬세하게 표현한 것 같다.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 <인생>(1995)으로 더욱 많이 알려진 위화의 장편소설 『인생』을 최근에야 읽었다. 영화와 소설이 이렇게 다를 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작가도 영화를 보고서 꽤 불만스러워 했다고 한다. 그래도 영화 덕분에 많은 이들이 원작을 읽어보게 되지 않았을까? 나 또한 시간이 꽤 오래 걸리긴 했지만 영화 때문에 소설을 찾게 되었으니까. 영화가 희망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소설은 지난한 삶에 더 초점을 둔 것으로 여겨진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데, 영화에서는 병아리, 소설에서는 밤이 메타포로 쓰였다.
소설 『인생』은 농촌을 돌아다니며 민요를 기록하는 ‘나’가 어느 날 푸구이라는 늙은 소와 푸구이라는 노인을 만나면서 시작한다. 보통 노인들은 자신의 인생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 노인은 소상히 기억하고 있다. 지난 세월 살아낸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른 노인들은 삶이 너무 고달파서 과거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푸구이는 잘 기억할까? 그 차이는 어디서 생겼을까?
아무래도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서 노력했기 때문이 아닐까? 삶의 비참함과 고달픔을 푸구이야말로 만만치 않게 겪은 인물이다. 그런 그는 늙은 소 푸구이가 일을 하도록 매번 가족의 이름을 하나하나 대고 누구는 벌써 이만큼 일을 했다고 비교하며, 그들을 불러내고 다시 살려낸다. 매번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억하지 않을 수 없었고 여전히 그들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푸구이라는 인물을 보며 든 생각 중에 하나는 그가 애처가라는 것이다. 올해 봄 유난히 사랑받았던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애순이 남편 양관식이 떠오르는 인물이다. 물론 푸구이는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다. 모든 자산을 잃고 나서야 자신의 여자를 진정 아끼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푸구이 모습은 영락없는 양관식이다. 위화의 소설은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삼아 사건이 이루어지지만 캐릭터를 보면 사실적이라고 하기 어렵다. 푸구이라는 캐릭터가 시련이 컸다 한들 그렇게 갑자기 애처가로 변모하는 것은 사실적이기보다는 판타지 같다. 한결같았던 양관식 캐릭터도 판타지라고 많이들 얘기하는데 말이다.
소설 속 화자 ‘나’가 푸구이를 만나 이야기를 듣기 전, 소설의 도입부가 사실 가장 인상 깊었다.인생의 맛을 차의 맛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나는 농민들이 즐겨 마시는 씁쓰레한 찻물을 좋아했다. 그들은 대개 차통을 밭둑의 나무 밑에 놔두곤 했다. 나는 아무 거리낌 없이 찌꺼기가 잔뜩 낀 찻잔을 들어 찻물을 따라 마셨고, 더불어 내 물병까지 가득 채웠다.”(19쪽)
소설 도입부에서 소설 속 화자인 ‘나’가 씁쓰레한 농민들이 마시는 차를 좋아하고 더러운 찻잔도 거리끼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물병에 담아 옮기는 행위가 뜻깊지 않은가? 소설 도입부는 소설의 전체적인 주제를 이미지로 보여준다고 하는데, 찻물을 통해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가 씁쓰레하겠다고 짐작해 볼 수 있다. 차의 맛으로 표현한 것이 차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색다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농촌을 돌며 민요를 수집하는 일을 하지만 자신의 삶도 이들의 고통스러운 삶과 다르지 않다. 기꺼이 그 삶을 살아내겠다는 의지도 느껴진다. 그러면서 당신도 삶이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살아보겠느냐고 질문하는 것 같다. 나는 "네"라고 쉽게 대답하지 못하겠다. 그래도 결국엔 그렇게 대답할 거 같기도 하다. 고통은 싫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고 싶기 때문이다. 푸구이에게는 슬픔과 고통이 있었지만 자신의 이름(푸구이, 福貴, 행복하고 귀한 존재)처럼 그만이 가진 귀한 행운과 행복도 있었다. 살아있다 보면 나에게도 행운과 행복이 있으리라고 굳게 믿어본다.
푸구이가 인생에서 씁쓰레한 맛을 가장 크게 느꼈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푸구이 자신이 누렸던 부를 고스란히 차지한 새로운 지주 룽얼에게 가서 자신이 소작할 땅을 부탁할 때가 아닐까? 차 마시러 오라고 해놓고선 차 한 잔 권하지 않고 찻주전자를 들고 마시는 룽얼을 보며 입 안 가득 씁쓸한 침이 돌지 않았을까?
챗지피티(ChatGPT) 생성 이미지
영화의 인기 때문인지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서 출판되었는데, 원제는 ‘활착(活着)’이다. ‘살아간다는 것’이다. 인생과 살아간다는 것은 같은 듯하지만 다르다. 요즘 같은 세상엔 챗지피티(ChatGPT)에게 물어보면 잘 가르쳐준다. '인생은 철학적인 개념으로서 고통과 기쁨, 의미, 성장, 관계 같은 것들을 포함하는 삶 전체의 이야기이지만, 살아간다는 것은 훨씬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것으로서 밥 먹고 일하고 걱정하고 웃고 하는 반복되는 날을 하루하루 이어가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이 소설은 삶의 의미와 가치를 묻고 따지기보다 지금 먹고, 자고, 일하고, 걱정하고, 울고, 웃고, 버티며 하루하루 살아내는 사람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분명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인생의 맛을 씁쓰레하다고 표현한 소설 『인생』. 앞으로도 씁쓰레한 삶의 순간을 더 많이 겪을지 모르나 달큰한 삶의 순간들도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다. 푸구이에게는 어떤 달큰한 순간이 있었을까? 자전이 아들 유칭을 안고 친정으로 돌아왔을 때, 펑샤가 얼시와 결혼할 때, 펑샤가 쿠건을 임신했을 때, 늙은 소 푸구이와 함께 밭을 갈 때였을까? 그 달큰한 순간을 위안 삼아 씁쓰레한 삶이 우리 삶의 디폴트(default) 값이더라도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 씁쓰레한 침을 삼키고 있는 이들에게 달큰한 차 한 잔을 대접하고 싶다.
[이은영의 작품 속 차 이야기 5] 인생의 맛을 차의 맛으로 표현하면? < 칼럼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